이조정랑 흥해배공(강) 묘갈명
公의 諱는 杠(강)이요 姓은 裵氏며 본관은 興海이니 高麗太師로 諡에 武烈이요 諱는 玄慶이 上祖이다.
이로부터 代代로 公卿이 이어지니 三世에 諱는 轅이니 太子師傅이고 號는 蓮塘이요 諱에 斯祜를 두니 門下侍中이며 諱에 五龍을 두니 벼슬이 侍中平章事이고 公에게 八世祖이다.
高祖의 諱는 裕孫이니 紫門步馬左右衛保勝別將이며 曾祖의 諱는 榮至이니 奉翊大夫行典理判書上護軍이요 祖의 諱는 詮이니 軍簿判書三重大匡封興海君이요 考의 諱는 尙志이니 恭愍朝에 判司僕寺事이다가 高麗가 亡함에 杜門洞에 들어가 罔僕의 節義를 지켰으며 後에 安東 金溪村으로 隱居하여 잣나무와 대나무를 집 가에 둘려 심고 그 가운데 집을 짓고 이로 인연하여 號를 栢竹堂이라고 했으며 崇禎後 癸卯(1662년)에 鏡光書院에 配享 되었고 여러번의 贈職으로 資憲大夫 兵曹判書이고 妣는 永嘉郡夫人 權氏니 贈領議政 希正의 따님이다.
四男을 두었는데 맏이는 諱에 權이니 持平이요 다음 諱에 桓이니 文科하여 三道觀察使요 다음 諱는 楠이니 文科하여 司憲府監察이요 다음이 곧 公이니 金溪里에서 태어났고 才智가 特異하고 文藝가 夙就하더니 자라면서 趙文貞公 庸에게 나아가 質疑하였다.
文貞公은 恭讓王朝 賢人으로 朝廷의 일로 미움을 받아 醴泉에서 귀양살이하면서 敎授를 게을리 아니하시니 一時의 名流들이 그 門下에서 배출되었고 別洞尹祥과 江湖金淑滋가 모두 同門의 契誼가 두텁고 더불어 道義로 講磨했다.
太宗 己亥에 典獄承으로 成均司馬에 入格하고 世宗 丙午에 敎導官으로 文科 丙科에 올라 獻納을 지내고 吏曹正郞에 이르러서 朝廷에 直言을 하여 諫諍하여 時獘를 救濟하고 물러나 江湖에 居處하니 韻致의 格調가 높고 枕碧樓 次韻과 鳳停寺韻 數首의 題詠은 足히 公의 淸儉한 雅懷를 想像할 수가 있다. 兄弟 四人이 모두 文雅로 世上에 稱贊되었으며 華麗한 要職을 두루 거처 名聲이 一國에 가득하였으며 性品 또한 孝誠이 至極하여 考妣의 喪을 當하여 哀毁하며 廬墓함에 三年의 禮制를 마치고 山下에 樓를 짓고 孝思菴이라 懸板을 걸고 霜露의 時期에 追遠의 感懷로 四韻을 지어내서 兄弟間 壎塤가 서로 和合하여 終身토록 思慕하는 誠心을 붙였고 著述한 詩文이 많이 남지는 아니 했으나 五百年 歲月을 지내오면서 㥘火를 몇 번이나 겪었지마는 鳳停寺韻은 退溪先生의 次韻이 있고 枕碧樓韻은 臨淵齋先生의 記文이 있으니 文獻이 無徵함을 恨하리요.
墓所가 金溪村 勺將洞 坤坐등이다. 配는 一直孫氏니 監務벼슬한 禴의 따님이다. 一男二女를 두니 男은 承源이요 사위는 崔淵과 司勇인 權自謙이다.
承源의 一男은 輔雲이요 崔淵의 二男은 仲泉과 季泉이요 사위는 安有義와 金崇義이고 司勇의 三男은 哲仝과 哲終과 哲經이요 四女는 權塔과 南八凱와 司直 琴徽와 牧使 秦澹이다. 그 밖은 다 記錄하지 못한다. 오호라. 公의 世代가 이제 멀어졌으나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자세히 살펴보아도 徵憑이 없고 오직 公의 墓所도 傳하지 아니하여 孝孫들의 답답한 懷抱를 가진지 오래 되었는지라 지낸 甲戌에 公의 後孫인 善瓚이 그의 從姪 永元等으로 더불어 여러 차례 金溪에 와서 慵菴金公이 著述한 金溪洞誌를 보고 비로소 公의 墓所를 찾아서 기쁘고 感動되어 널리 宗族에 議論하고 바야흐로 竪碣할 것을 謀議하고 不侫에게 碣銘을 請하거늘 不侫이 아는게 얕다고 사양을 再三했으나 敢히 固辭를 못할새 大畧 始末을 밝히고 이어서 銘을 하노니
장하도다 우리 님이여 郢땅의 줄기옵고 藍田의 玉이로세. 文科에 올라 그 優雅함으로 또한 行實이 篤實한데 어찌하여 壽를 얻지 못했고 勺將의 山등성이에 섰던 옛 碑石이 부서졌는고. 다시 글을 야문 돌에 새겨서 後孫들에게 길이 보게 하노니 敢히 다치지 말게 하라. 天理가 매우 밝음이니라.
通政大夫 前行弘文館侍講兼知制敎 聞韶 金鴻洛 謹撰
公의 墓所를 언제 失傳했는지 알 수 없지만 後孫들이 옛날 살던 마을 뒤에 設壇하고 祭享을 한지도 또한 여러 代일러니 몇해 전에 金溪洞 山谷 봉분이 무너진 곳에서 墓所를 찾았으나 或是라도 다른 患亂이나 없을가하여 十二年 지난 乙酉年(1945) 겨울에 淑人墓所와 合窆한 곳이 곧 醴泉의 篤陽里 乾坐 등이다. 五百年의 歲月을 겪었으나 巾舃이 아직까지 宛然하니 異常하도다. 二年을 건너 丁亥年(1947)에 竪碣을 하면서 搜墓할 때에 지은 碑銘에 移墓한 事蹟과 그 緣由를 다 記錄하지 않을 수 없어서 敢히 右와 如히 大畧을 記錄한다.
從後孫 漢根은 삼가 追記하고
從後孫 東煥은 삼가 글씨를 썼다
四二八○年丁亥 十月 日 立
출저: 유교넷 (http://www.ugyo.net) - 유교문화관 > 유교관련도서 > 문화유산 > 예천의 금석문 1 > 普 門 面 > 吏曹正郞 興海裵公(杠) 墓碣銘
아래는 AI를 이용한 번역 문입니다. 오류가 다소 보이지만 한자가 어려우신 분들 한해 첨부 합니다.
ChatGPT o1 버전 번역문
번역문 1) 서두 및 가계(家系)
공(公)의 휘(諱)는 **강(杠)**이며, 성(姓)은 **배(裵)**이고, 본관(本貫)은 **흥해(興海)**이다. 고려의 태사(太師)로 시호(諡號)가 무열(武烈)이고 휘가 현경(玄慶)인 분이 (공의) 윗대 조상이다. 이후 대대로 공경(公卿: 높은 벼슬)을 역임하였으니, 삼세(三世) 조상 중 휘가 **원(轅)**인 분은 태자사부(太子師傅)이고, 호는 **연당(蓮塘)**이며, (그의 아들로) 휘가 **사호(斯祜)**인 분은 문하시중(門下侍中), (그의 아들로) 휘가 **오룡(五龍)**인 분은 벼슬이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였는데, 바로 공의 팔세조(八世祖)가 된다.
고조(高祖)의 휘는 **유손(裕孫)**이니, 자문보마(紫門步馬) 좌우위(左右衛)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냈다. 증조(曾祖)의 휘는 **영지(榮至)**인데, 봉익대부(奉翊大夫) 행전리판서(行典理判書)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조부(祖)의 휘는 **천(詮)**으로 군부판서(軍簿判書) 삼중대광(三重大匡)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다. 아버지(考)의 휘는 **상지(尙志)**인데, 공민왕(恭愍王) 때 판사복寺사(判司僕寺事)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조정을) 섬기지 않으며 절의(節義)를 지켰다. 이후 안동 김계촌(金溪村)으로 은거하여 집 주변에 잣나무와 대나무를 둘러 심고 그 사이에 집을 짓고는, 이와 연유하여 호를 **백죽당(栢竹堂)**이라 하였다. 숭정(崇禎) 이후 계묘년(1662)에 거울 같이 빛나는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증직(贈職)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어머니(妣)는 영가군부인 권씨(永嘉郡夫人 權氏)인데, 증 영의정(贈領議政) 희정(希正)의 따님이다.
아버지께서는 네 아들을 두셨다. 장남은 휘가 **권(權)**으로 지평(持平)을 지냈고, 차남은 휘가 **환(桓)**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냈으며, 삼남은 휘가 **남(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그 다음 넷째가 곧 공(公)이니, (공께서는) 김계리(金溪里)에서 태어났다.
공의 재지(才智)는 특별히 뛰어났고 문예(文藝)가 일찍부터 성취되었다. 자라면서 조문정공(趙文貞公) **용(庸)**을 찾아가 학문과 의문점을 물었다. 문정공은 공양왕(恭讓王) 시절의 현인(賢人)으로, 조정에서 미움을 받아 예천(醴泉)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후학(後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때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그 문하에서 배출되었는데, 별동 윤상(別洞 尹祥)과 강호 김숙자(江湖 金淑滋)가 모두 같은 문하의 두터운 계의(契誼)를 맺고 함께 도의(道義)를 강론하며 서로 닦았다.
2) 공(公)의 관력(官歷)과 행적
태종(太宗) 기해년(己亥)에 전옥승(典獄承)으로 있으면서 성균 사마(成均司馬)에 입격(入格)하였고, 세종(世宗) 병오년(丙午)에 교도관(敎導官)으로 있다가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그때 조정에 직언(直言)하여 간쟁(諫諍)하며 시폐(時弊)를 구제하고는 물러나 강호(江湖)에 거처하였다.
그 풍류와 격조가 높고, 침벽루(枕碧樓) 차운(次韻)과 봉정사(鳳停寺) 운(韻) 등 몇 수의 제영(題詠)은 공의 청검(淸儉)한 아취(雅懷)를 짐작하기에 넉넉하다. 형제 네 사람이 모두 문雅(文雅)하여 세상에 칭찬이 자자하였고, 화려하고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쳐 명성이 온 나라에 가득하였다.
또한 성품이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부모님의 상(喪)을 당하여 애훼(哀毀)하고 여묘(廬墓)하며 삼년상(三年喪)의 예제를 마쳤다. 산 아래에 누(樓)를 짓고 ‘효사암(孝思菴)’이라 편액을 걸었는데, 서릿발과 이슬 내리는 시절마다 조상들을 그리는 감회를 시(詩) 네 수로 지어내어 형제간에 훈훈한 정(壎塤)을 서로 화합하였다. 평생토록 사모(思慕)하는 정성을 두었고, 저술한 시문이 많지는 않으나 오백 년의 세월 속에 전란(㥘火)을 몇 차례 겪는 가운데서도, **봉정사 운(鳳停寺韻)**은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차운(次韻)이 남아 있고, **침벽루 운(枕碧樓韻)**은 임연재 선생(臨淵齋先生)의 기문(記文)이 함께 있으니, 문헌에 징거(徵據)할 것이 전혀 없음을 어찌 한탄하겠는가.
3) 묘소(墓所)와 후손
묘소는 김계촌(金溪村) 작장동(勺將洞) 곤좌(坤坐) 언덕이었다. 배필(配)은 일직(一直) 손씨(孫氏)로, 감무(監務)를 지낸 손약(孫禴)의 따님이다. 공께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승원(承源), 사위는 최연(崔淵)과 사용(司勇) 권자겸(權自謙)이다.
승원(承源)은 아들 **보운(輔雲)**을 두었다. 최연(崔淵)은 두 아들 **중천(仲泉)**과 **계천(季泉)**을 두었고, 그 사위로 안유의(安有義)와 김숭의(金崇義)가 있다. 사용 권자겸은 세 아들 철동(哲仝), 철종(哲終), **철경(哲經)**을 두었고, 네 딸은 권탑(權塔), 남팔개(南八凱), 사직(司直) 금휘(琴徽), 목사(牧使) 진담(秦澹)에게 각각 시집갔다. 그 밖의 일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의 대(代)가 이제 멀어졌으나 그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아도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없고, 오직 공의 묘소 또한 전하지 않아 효손(孝孫)들이 갑갑한 마음을 가진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갑술(甲戌)년에 공의 후손인 선찬(善瓚)이 그의 종질(從姪) 영원(永元) 등과 함께 여러 차례 김계 땅에 와서, 게으른 암자(慵菴) 김공(金公)이 지은 「금계동지(金溪洞誌)」를 보고서야 비로소 공의 묘소를 찾아내었으니, 기쁘고 감동하여 종족(宗族)에 널리 의논하고 비로소 비석을 세울 일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불초(不侫)한 내가 비명(碑銘)을 청해왔으나, 내 아는 바가 얕다 하여 여러 번 사양했음에도 감히 끝내 물리치지 못하고 대략 시말(始末)을 밝히고 이어서 명(銘)을 지으니:
통정대부(通政大夫), 전(前) 홍문관 시강(弘文館侍講) 겸 지제교(知制敎) 문소(聞韶) 김홍락(金鴻洛) 근찬(謹撰)
4) 부록(附錄): 묘소의 이전(移轉) 경위
공의 묘소가 언제 실전(失傳)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후손들이 옛날 살던 마을 뒤에 단(壇)을 마련하고 제향(祭享)을 한 지도 또한 여러 대가 지났다. 몇 해 전 금계동 산곡(山谷)에 무너진 봉분이 있어 그곳에서 묘소를 찾았으나 ‘혹시라도 다른 화란(患亂)이 없을까’ 하여 12년이 지난 을유년(乙酉, 1945) 겨울에 숙인(淑人)의 묘소와 합변(合窆)한 자리가 곧 예천(醴泉)의 독양리(篤陽里) 건좌(乾坐) 언덕이다. 오백 년의 세월을 지냈으나 수의(巾舃)가 아직도 온전히 남아 있으니 실로 이상(異常)하다.
이로부터 2년 뒤 정해년(丁亥, 1947)에 비석을 세우면서, 수묘(搜墓)할 때 지은 비명에 이장(移葬)한 사적과 그 인연을 다 기록하지 않을 수 없어서, 감히 위와 같이 대략을 기록한다.
이 비명(碑銘)은 배공(裵公) 강(杠) 선생의 선대(先代)와 행적을 기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실전(失傳)되었던 묘소를 후손들이 어렵게 찾아내고, 다시 합장(合窆)하고 비를 세워 그 내력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 전란(戰亂)과 세월 속에서 전하지 못할 뻔한 가문의 역사를 후손들이 다시금 발굴하여 묘소를 찾고, 지극한 효심으로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려 했음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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