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삼국 통일의 과정과 의의에 대하여 논하라.
Ⅰ. 서(序)
고구려(BC 57~668), 백제(BC 18~660)와 신라(BC 57`935)는 서로 협력과 항쟁을 하다가 마침내 신라가 중국의 당나라(618~907)와 연합하여 백제(660)와 고구려(668)를 멸망시키고 당과의 나당전쟁(671~676)을 거쳐서 불완전하나마 삼국을 통일(676)하게 되었다. 이하에서 삼국 통일의 과정과 의의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Ⅱ 삼국통일의 과정
1. 나당연합의 결성
가. 국제관계의 변화
642년 백제와 고구려는 여․제 동맹 결성하고 신라가 고립되자 신라는 수에 이어 당과 연결되어 있었다. 642년 8월 백제 윤충 1만의 군으로 신라 대야성 공격하여(금일의 내응으로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김품석과 그 아내 소랑 사망) 당항성, 대야성 등 40여성 함락하고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강 반환요구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압박이 있자 신라는 648년 김춘추 문왕, 거연자, 온군해 등 호위병사 120명을 포함한 200명의 사절단 장안성에 가서 당태종과 나당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국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하였다.
2. 백제의 멸망
가. 원인 : 655년 신라공격 30여성 함락
⑴ 의자왕의 주색탐닉 : 무당 금화(김유신 내통자 壬子)
⑵ 백제의 통치 질서 문란 : 병관좌평 부여성충(扶餘成忠)(상소후 28일 단식하다가 옥사), 중국 월주(越州) 총독 부여윤충(扶餘允忠) 형제를 투옥, 죄평 흥수(興首) 고마미지로 귀양, 福信 파면
⑶ 지배층의 사치, 향락, 백성들의 일체감 상실
나. 나당 연합군의 침입
⑴ 나당연합군(18만명)
당나라 : 13만군.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蘇定方, 우장군 金仁問,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자 인원)・,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 龎孝泰)
신라 : 5만 . 제1군 김법민(金法敏, 문무왕), 제2군 金庾信(선봉 김흠순(金欽殉. 반굴(盤屈)부) 1만, 좌익 김품일(金品日, 관창(官昌) 부) 1만, 우익 천존(天存)1만, 후군 金庾信 2만)
⑵ 신라 김유신의 황산벌 싸움 : 階伯과 아수라의 5천 결사대
⑶ 당군: 기벌포(금강 하류) 침입 : 제1진 의직(義直) 2만 결사대. 제2진 우소(于召), 제3진 자간(自簡), 제4진 무치(武治)군을 차례로 격파하며 왕성의 목을 조여 갔다.
⑷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함락과 義慈王과 태자 扶餘孝 항복(660년)
의자왕, 왕자들, 대신과 장군88명, 주민 12,807명 포로로 장안 압송
⑸ 熊津都督府 등 5도독부 설치 : 7주 관할
시비성과 웅진성은 유인원(劉仁願) 1만명, 신라왕자 인태, 사찬 일원, 금찬 길라 등 신라군 7000명과 함께 주둔
3. 고구려의 멸망
가. 배경
지배층의 분열, 국력 약화, 나․당 연합군의 침입 저지(연개소문)→ 지배층의 내분(657년 연개소문 사후)
나. 멸망
⑴ 보장왕 20년 661년 4월 소정방이 이끄는 27만명 평양성 포위 선도해(先道解) 평양성 사수. 8월 남생이 이끄는 요수방위군 설필하력(契苾何力) 격파
⑵ 보장왕 21년 662년 방효태(龐孝泰) 수군 패사시킴
⑶ 보장왕 25년 666년 男生이 대막리지가 되자 男建과 南山이 반란을 일으키고 싸움에 패한 남생은 당나라로 도주 투항
⑷ 男建이 대막리지가 되어 나라를 장악하자 연정토(淵淨土, 연개소문의 동생)는 3,543명(763호)를 이끌고 신라에 망명(고안승과연정토를 따라 신라로 찾아든 고구려의 유민들을 합산하면 23,100명이 넘는다)
⑸ 보장왕 26년 667년 당나라 이적(李勣) 군대가 공격 시작, 신라 金庾信 호응
⑹ 보장왕 27년 668년 9월 평양성 함락 고구려 보장왕 항복함.
연개소문의 가계
증조부 | 연광(淵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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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 연자유(淵子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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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 연태조(淵太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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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 연개소문(淵蓋蘇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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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정토(淵淨土) |
자 | 연남생(淵男生 634년~679년) | 연남건(淵男建) | 연남산(淵男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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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 연헌충(淵獻忠) 남건, 남산에 피살 | 연헌성(淵獻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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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손 |
| 연현은(淵玄隱) | 연현정(淵玄靜), | 연현일(淵玄逸) |
현손 | 연비(淵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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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9도독부와 안동도호부
9개 도독부와 평양에 安東都護府를 두고 살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삼아 평양총독으로 임명했다.
4.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
가. 백제의 부흥운동
⑴ 복신의 진현성 탈환(661년)
⑵ 백제부흥(재건)운동
복신(福信) 재건 총사령관 | 12,000명. 주류성(周留城) 서천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서천군 한사면 지현리 산3, 사적 제60호 |
도침(道琛) 좌장군 | 10,000명. 임존성(任存城) :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산8. 봉수산성(鳳首山城).국가지정문화재 사적90호 |
흑지상지(黑齒常之) | 10,000명. 眞峴城, 오늘날 黑石東山城, 密巖山城, 흑대전광역시 서구 봉곡동(鳳谷洞) 山 26-1. 대전광역시기념물 제15호 |
상여(相如) | 3000명 이례성(尒禮城), 충남 논산군 노성 |
지수신(遲受信) | 3000명 가림성(加林城) 성흥산성(聖興山城) 충남 부여군 임천면과 장암면에 걸쳐 세워진 산성. 사적 제4호 |
좌평 정무(正武) | 두시원악(豆尸原嶽). 충남 청양군 정산면 두릉윤성(豆陵尹城)추정 |
달솔 여자긴(餘自進) |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웅진(熊津 공주)의 한글 발음인 ‘고마(곰)나루’를 한자로 표현한 것 |
왕자 부여풍(扶餘豐) | 왕. 中大兄. 제명천황(보황녀)의 아들 |
⑶ 반목
내분으로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은 복신를 죽였다.
⑷ 부여 융(隆)과 흑치상지의 항복
⑸ 부흥운동 실패;
나. 고구려의 부흥운동
⑴ 한성(漢城. 재령)
검모잠(劍牟岑)이 궁모성(窮牟城)에서 패수(浿水, 대동강) 남쪽으로 근거를 옮겨 한성(漢城:황해도 재령)에서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고 당의 장군 고간(高侃)이 대군을 끌고 쳐들어오자 대처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의견대립을 보인 끝에 674년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4,000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로 망명해 버렸다.
나. 오골성(烏骨城)
670년에도 고구려 장군 고연무(高延武)와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가 연합하여 오골성 일대에서 당나라의 말갈군를 격파한 바 있다.
연도 | 인물 | 내용 |
677 | 보장왕 | 조선군왕 임명. 부흥운동. 소환~682년 사망 |
685 | 보원(寶元) | 보장왕 손자. 태자 복남의 아들. 조선군왕.부흥운동 |
686 | 보원(寶元) | 충성군왕. 부흥운동 |
698 | 보덕(報德) | 조선군왕.부흥운동 |
699 | 덕무(德武) | 보장왕의 아들. 안동도독.부흥운동 |
698 | 大祚榮 | 대진(大震). 발해(渤海)~926 |
5. 나당전쟁과 삼국통일
가. 여․제 유민과 연합 ↔ 당은 거란, 말갈과 연합
나.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
백제-웅진 도독부 등 5 도독부, 신라-계림 도독부, 고구려-안동 도호부
다. 나당전쟁
문무왕 11년 671년 웅진 도독부 공격(所夫里州) 실치, 마전, 적성 전투
문문왕 15년 675년 매소성(買肖城) 전투
문무왕 16년 676년 기벌포(伎伐浦,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瓦草里, 기와풀 즉 기벌) 부근) 전투로 안동도호부 요동으로 축출
676년 통일 완성
Ⅲ. 삼국통일의 의의
1. 의의
당나라의 지배 야욕을 분쇄하고 어느 정도 자주성을 회복하였으며 오늘날 민족 문화의 기틀 마련의 추발점이 되었다(삼국의 문화적 전통, 경제력 확충). 한민족의 민족 문화와 통일은 그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단계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한계
외세(당)의 협조로 이루어지고 대부분의 고구려의 강역을 제외한 대동강 이남의 통일의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고구려가 3국을 통일했다면 더 많은 강역을 차지하고 있을 것인데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698~926)가 오래 가지 못해 발해까지는 몰라도 그 후 만주 땅은 이제는 우리 역사에서 주류로 편입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Ⅳ. 결어
역사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신라가 3국을 통일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고 단언할 수 없지만 적어도 동강난 통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백제는 의자왕의 실정 때문에 고구려는 지배층의 권력 다툼 때문에 멸망한 것이기 때문에 정치지도자들은 이를 잘 새겨 보아야 할 것이며 신라의 통일은 외세에 의존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형제의 국가들을 치기 위하야 외세의 힘을 빌린 점은 권력정치 외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의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는 되풀이한다(History repeats itself)는 말이 있으므로 앞으로라도 이런 불행한 역사와 행위가 반복되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