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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삼국의 인물
Ⅰ. 사국(四國)의 건국 시조
왕조 | 존속기간 | 건국자 | 실국자 | 수도 | |
고구려(高句麗) | BC 37~668 | 주몽(朱蒙): 동명성왕(東明聖王) | 보장왕(寶藏王) | ①환인(桓因. 졸본(卒本). 흘승골성(紇升骨城)) ② 국내성(國內城. 通溝. 유리왕 21년 3)+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위나암성(尉那巖城)) ③환도산성(丸都山城. 산상왕(山上王) 13년 209) ④평양성(平壤城.장수왕(長壽王) 15년 427) | |
백제(百濟) | BC 18~660 | 온조(溫祚) | 의자왕(義慈王) | ①직산위례성(BC 18)②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BC5) ③ 웅진(熊津. 곰나루성. 문주왕1년 475) ④ 사비(泗沘. 소부리성(所夫里城). 부소산성(扶蘇山城)성왕 16년 538) | |
신라(新羅) | BC 57~935 | 박혁거세(朴赫居世) | 경순왕(敬順王) | ①경주(慶州. 월성(월성))+(南山城, 明活城, 西兄山城, 北兄山城)) | |
가야 (伽耶. 駕洛) | 금관가야(金官伽倻.本伽倻) | 42~532 | 김수로(金首露) | 10대 구형왕(仇衡王) | 김해(구야국(狗倻國)에서 발전하여 532년 신랑 법흥왕에게 망함) |
대가야(大伽倻) | 42~562 | 이진아시(伊珍阿豉) | 16대 도설지왕(道設智王) | 고령(미오야마국(彌烏耶馬國)에서 발전하여 562년 신라 진흥왕에게 망함) | |
성산가야(星山伽倻. 碧珍伽倻) | 42~? | 성주(경산) | |||
아라伽倻(阿羅伽倻. 안락국) | 42~531 | 함안(531년 백제 성왕에게 멸망) | |||
고령가야(古寧伽倻) | 42~? | 진주 | |||
소가야(小伽倻) | 42~? | 고성 |
백제는 온조왕이 B.C. 18년 충남 직산 위례성에서 마려, 전섭 등십신(十臣)과 함께 건국하여 B.C. 5년(온조왕 13년)까지 13년간 직산에서 첫 도읍지로 있다가 국세(國勢) 팽창으로 한산(현,경기도 광주)으로 천도 후 475년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 하였고, 538년사비(현, 부여)로 천도하였다. 백제사 678년 기간중 위례성(직산)백제 13년, 한성(서울)백제 480년, 웅진(공주)백제 63년, 사비(부여)백제 122년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가. 건국
⑴ 연도 : B.C. 37년 5월
⑵ 국호 : 가우리(句麗. 高句麗는 한문식 이두문 표기)
⑶ 연호 : 다물(多勿, 옛 영토를 회복한다)
⑷ 도읍: 환인(桓因. 졸본(卒本). 흘승골성(紇升骨城): 눌현(訥見; 今 西豊縣, 지금의 常春(상춘:吉林省(길림성)의 長春(장춘)→B.C. 26년 3월 15일 朱家城(주가성)으로 이전.
나. 건국자(시조)
주몽(朱蒙, 본명 鄒牟(추모. 부여말로 활의 명인)
몽고에서는 지금도 궁수를 주무라고 하는데 주무가 이두문으로 주몽으로 읽혀져 고주몽(高朱蒙)이 되었다.
나. 주민
부여 유이민과 압록강 유역 토착민 집단의 결합
다. 협력자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동부여 탈출 신하] 및 부분노(扶芬奴), 부위압(扶尉壓), 극재사(克在思)[추종자]의 보좌로 고구려 건국.
오이(烏伊) : 동부여 출신의 고구려 초기의 장수.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할 때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과 주몽을 수행하고 동명성왕 6년 태백산 동남방에 위치한 幸人국(荇人國) 정벌하고 유리왕 3년 마리(摩離)와 함께 2만 대군으로 양맥국(梁貊國) 정벌.
朱蒙(주몽). 鄒牟(추모). 衆解(중해). 象解(상해). 中牟(중모). 都慕(도모).
⑵ 가계
하백(河伯): 비서갑(非西岬.斐西岬) | |||||
고두막루(高豆莫婁)(부)[해모수(解慕漱)?] | 류화(柳花)(모) | ||||
고무서(高無胥) | 주몽(朱蒙) | ||||
예시(禮氏)(모) | 소서노(召西奴) | 우태왕(優台王) | |||
유리왕(瑠璃王) | ① 비류(沸流) ② 온조(溫祚) |
비서갑(非西岬.斐西岬) : 큰 강이나 하천을 관리하는 장관(용왕).
소서노(召西奴) : 졸본부여에 살던 부호(富豪) 연타발(延陁潑)의 세 딸 가운데 둘째딸.
우태왕(優台王) : 북부여왕 해부루(解夫婁)왕의 서손(庶孫)
⑶ 성장과 건국 과정
① 7세 추모(鄒牟. 활의 명인)
② 10세때부여 동부여 10월 제천행사(+활쏘기. 말타기. 수렵대회) 연승하여 금와왕의 7 아들(帶素 등)의 시기와 질시의 대상
③ 19세때 갈사의 왕실 목마장에서 대회 우승으로 금와왕의 의심(養虎遺患) 시작.
④ 왕실 목마장 파견
⑤ 대소와 왕비의 주몽 제거 작전
⑥ 야밤에 천황검과 반쪽 사냥칼을 들과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동부여 탈출
⑦ 엄사수(淹㴲水. 淹利大水. 엄리대수)의 수백 마리 자라 다리(魚鼈成橋. 어별성교)
⑧ BC 37년흘승골(紇升骨) 도착 고구려 건국
⑨ BC 36년 비류국의 송양왕 북부여의 우태왕 정벌
⑩ 22세 때 37세 소서노(召西奴)와 혼인
⑪ BC 19년 소서노(召西奴)와 비류(沸流) 온조(溫祚) 눌현성 떠나고 9월 주몽 서거.
2. 백제
가. 건국
⑴ 연도 : B.C. 18년 5월
⑵ 국호 : 백제(백제)
⑶ 연호 :
⑷ 도읍: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나. 건국자(시조)
온조(溫祚)
나. 주민
북방 유이민과 한강 유역 토착민 집단의 결합
다. 협력자
⑵ 가계
주몽(朱蒙) | 연타발(延陀勃) | 해부루(解扶婁) |
소서노(召西奴) | 우태왕(優台王) | |
유리왕(瑠璃王) | ① 비류(沸流) ② 온조(溫祚) |
⑶ 성장과 건국 과정
① 召西奴(소서노)는 졸본인(卒本人) 연타발(延陀勃)의 딸로서 처음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와 혼인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출산
② 주몽의 북부여 정벌로 召西奴(소서노) 남편 살해.
③ 소서노(召西奴) 37세때 22세 주몽(朱蒙)과 혼인
④ BC 19년 召西奴(소서노)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와 오간(烏干), 마려(馬藜.목천 마씨),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우(紇于),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笵昌),조성(趙成. 직산 조씨) 전섭(全懾. 천안 전씨) 등 십팔(十八)인을 데리고 낙랑국을 지나 마한으로 들어가 십제국(十濟國. 후 백제)건국(조선상고사)
[다른 견해]
⑤ 소서노 백제
召西奴(소서노)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북한산 주변)에 백제를 세우고 13년 동안 왕으로 직접 통치하다 61세로 훙서(薨逝. 온조 부하들의 시해)(BC 18~BC 6).
⑥ 온조 백제 분립
BC 18년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고구려를 떠나 미추홀(충남 아산 인주)에서 함께 있다거 온조가 BC 14년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직산위례성(위례산성. 직산 성거산)으로 분리 독립하여 온조의 백제를 정식으로 출범
⑦ 삼국사기]가 기록한 ‘오호입성(五虎入城)’사건
BC 6년 온조의 분립을 안타깝게 여긴 소서노가 비류와의 재결합을 설득하기 위해 온조를 찾아왔다가 뜻하지 않게 온조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위례성우물설화)
소서노가 훙서 후 비류와 온조가 의견이 엇갈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인천)로 가서 비류백제를 세우고 온조는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해 위례백제로 독립했다.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에 염분이 많아 백성이 살 수 없어 많은 수가 흩어지자 비류는 울분을 참지 못해 병사했다. 그 신민들이 위례백제로 와서 다시 합쳐졌다. (조선상고사).
⑧ 하남위례성 천도
소서노의 죽음을 알게 된 온조는 형 비류의 문책이 두려워 급히 한산으로 천도한다. 한산은 지금의 경기 광주(하남)의 하남위례성(남한산성)이다.
위례성의 정리
직산 위례성(BC 14~BC 6)
한산(하남 위례성. 광주 하남의 남한산성. BC 6~475)
하남위례성(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풍납토성,몽촌토성). 8대 고이왕때의 위례성)
하북위례성(13대 근초고왕이 천도한 ‘한산’으로 북한산 주변일대의 위례성)
연도 | BC 18 | BC7 | BC5 | 16 |
국명 | 백제 | 백제 | 백제 | 백제 |
수도 | 미추홀(彌鄒忽) | 거발성 | ||
국명 | 십제국 | 십제국 | 백제 | |
수도 | 하남위례성 | 직산위례성 | ||
국명 | 외백제 | |||
수도 | 패대(浿帶) | 패대(浿帶) |
3. 신라
신라는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하여 박,석,김의 세부족 연맹을 거쳐 6부족 연맹체로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경주를 중심으로 건국하였다. 신라는 토착 세력이 강하여 유이민 집단을 흡수, 동화하였다.
6촌
방향 | 마을 | 촌장 |
동쪽 | 양산마을 | 알평 |
남족 | 고허마을 | 소벌도리 |
서쪽 | 대수마을 | 구례마 |
동남쪽 | 진지마을 | 지백호 |
동북쪽 | 가리마을 | 지타 |
더 동북쪽 | 고야마을 | 호진 |
4. 가야의 성립
가. 가야 연맹의 성립 : 2, 3세기경 김해의 구양국은 김수로를 주축으로 건국(42)하여 본가야로 발전
나. 본가야(금관가야) 연맹 : 3세기경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영토 확장, 통치 조직 정비 → 고구려의 낙동강 유역 진출로 세력 약화 → 신라에 병합(532년, 법흥왕)
다. 대가야 연맹 : 5세기 후반 후기가 야연맹의 맹주로서 미오야마국은 이진아시를 시조로 5세기 이후 고령 중심의 연맹 세력권 재편→ 중국 남조에 사신 파견, 신라,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 → 멸망(562, 진흥왕)
라. 한계 :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 →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 하지 못함
마. 경제적 번영 : 농경문화, 철 생산과 중계 역할(한 군현, 왜)
바. 문화
⑴ 유적 : 고령 지산동 고분, 부산 복천동 고분, 김해 대성동 고분
⑵ 유물 : 금동관, 철제 무기, 갑옷, 토기(일본 스에키에 영향)
6가야 그림
Ⅱ. 삼국의 개혁 군주들
1. 고대국가의 등장
가. 고대국가의 등장 배경
국가는 군장국가(성읍국가. 부여 사출도, 고구려 나집단), 연맹왕국(고조선, 초기 고구려, 부여, 삼한, 가야연맹)을 거쳐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고구려, 백제, 신라)로 성장하였다.
나. 고대국가의 특징
왕권이 강화되면서 지방의 군장세력을 국왕권력 밑으로 편입하고 왕위를 부자상속하고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며 활발한 정복사업을 전개하여 공대한 영토국가를 이루었다.
구분 | 고구려 | 백제 | 신라 |
고대국가형성 | 6대 태조왕 2C | 8대 고이왕 3C | 17대 내물왕 4C |
부자상속 | 9대 고국천왕 | 13대 근초고왕 | 19대 눌지왕 |
불교공인 | 17대 소수림왕 372년 | 15대 침류왕 384년 | 23대 법흥왕 535년 |
율령반포 | 17대 소수림왕 373년 | 8대 고이왕 | 법흥왕 |
역사편찬 | 국초에 유기(留記), 26대 영양왕 11년 660년 이문진(李文眞) 신집(新集) 5권 | 13대 근초고왕 30년 375년 고흥(高興) 서기(書記) | 24대 진흥왕 6년 545년 거칠부)居柒夫) 국사(國史) |
전성기 | 19대광개토왕 20대장수왕 5C | 13대 근초고왕 4C | 24대 진흥왕 6C |
2. 고구려
⑴ 6대 태조왕(53~146)
① 대외 팽창 : 옥저(沃沮) 정복, 만주 지방으로 세력 확대, 낙랑 압력
② 중앙 집권 체제로의 진전 : 계루부 고씨에 의한 형제왕위 계승권 확립
⑵ 9대 고국천왕(179~197) : 왕권의 강화와 통치체제의 중앙집권화 진전
① 5족을 5부(동서남북중)로 개편
② 왕위계승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
③ 연나부(掾那部, 絶奴部) 명림씨(明臨氏)에서 왕비를 맞는 관례
④ 진대법(賑貸法) 시행 :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여 진대법(糶糴法, 조적법) 시행
형수와 결혼한 10대 산상왕(山上王) : 산상왕(山上王)의 형사취수(兄死取嫂)
아들 | 부인 | ||
8대 신대왕(新大王. 88~179) | ① 발기(拔奇) | ||
② 남무(南武);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179~197) | 우씨(于氏)(于素의 딸) | ||
③ 발기(發岐) |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의 3만의 군사 빌려 고구려 공격 | 배천(배천)에서 자살 | |
④ 연우(延優. 이이모(伊夷模)) : 10대 산상왕(山上王) 197~227) | 우씨(于氏~234)(于素의 딸 | 형사취수(兄死取嫂. levirate) | |
주통총인(酒桶村人) | 교체(郊彘):11대 동천왕(東川王) | ||
⑤ 계수(罽須) | 발기(發岐) 격퇴 |
⑶ 15대 미천왕(300∼331)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하며 을불(乙弗), 을불리(乙弗利) 또는 우불(憂弗)로서 서천왕의 손자이며, 고추가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봉상왕 2년 293년 반역 혐의로 죽은 후 어릴 때 수실촌의 호민 음모(陰牟)의 집에서 용작하였으며 미천왕 14년 313년 낙랑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대동강 유역 차지하였다.
⑷ 17대 소수림왕(371~384)
왕 2년 372년 보편적인 종교로서 전진(前秦)의 순도(順道)로부터 불교를 수용하고 국립대학격인 대학(太學)을 설립하고 373년 율령을 반포하였다.
⑸ 19대 광개토왕(391~413)
활발한 정복사업을 전개하여 요동지역에서 후연, 숙신 등을 복속시키고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399년 임진강가에 이르렀다. 신라 내물마립간의 요청으로 400년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낙동강 유역에서 섬멸하였고 일생동안 64개 성과 1400개 촌을 공략했다고 한다.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최초로 사용하였고 사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崗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⑹ 20대 장수왕(413~491)
78년간 재위하면서 부왕의 정복사업을 계승하여 고구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427년 수도를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인 평양성으로 옮겼고 중국의 남북조시대(439~589)의 분열된 정세를 이용하여 남북조와 등거리외교를 하고 남하정책을 사용하여 475년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 21대 개로왕을 전사케했다.
⑺ 21대 문자왕(491~519)
494년 부여를 완전 병합하여 고구려 영토를 확보하였다.
나. 백제
⑴ 8대 고이왕(234~286)
① 방계로서 7대 사반왕(沙伴王. 234)을 폐위 하고 즉위
② 대외 팽창 : 중국의 한 군현과 항쟁.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弓遵) 전사시킴. 목지국 병합
③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 마련 : 27년(260년) 6좌평 및 16관등 관제정비, 관리의 복색 제정, 29년(262년) 율령 반포
⑵ 13대 근초고왕(346~375)
① 정복군주로서 24년 369년 마한 대부분을 차지하고 목라근자(木羅斤資)가 가야 7국을 통합하는데도 성공하였다.
② 26년 371년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왕자(후에 14대 근구수왕(近仇首王)) 고구려 16대왕 고국원왕(故國原王. 斯由) 전사케 하였다.
③ 현재의 경기, 충청 및 전라의 전부와 강원・황해의 일부 차지,
④ 중국 요서지방에 진출하여 요서군을 설치하고 중국 동진(東晉. 317~420)의 무역 기지로 이용했으며 산동 지방에도 상인들이 진출했고 남쪽 왜와 통교
⑤ 부자상속 왕위계승 확립, 진씨 왕비 시대 시작
⑥ 왕 30년 375년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국사 「書記」 편찬 시킴
⑦ 일존 나라의 덴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보관중인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왕이 일본 제후에게 기사년(己巳年)에 하사란 칼로 되어 있는데 근초고왕 24년 369년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어 왕자에게 왜왕에게 하사하도록 했다.
⑧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아직기(阿直岐)가 4세기 중엽 근초고왕 27년 372년 일본 태자에게 한자 가르쳤다
⑶ 침류왕 원년(384년)
동진(東晋)의 마라난타(摩羅難陀)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새로운 관념체계를 수립하였다. .
⑷ 22대 문주왕(475~477)
475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자 웅진(熊津. 공주)으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백제는 왕비족들의 발호로 내부적 혼란이 심했다.
⑸ 24대 동성왕(479~501)
493년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
⑹ 25대 무령왕(501~523)
중국 남조의 양과 통교하면서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국에 22담로(檐魯)를 두어 왕족을 보내 다스리게 하였다.
⑺ 26대 성왕(523~554)
왕 16년 538년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泗沘, 부여)로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南夫餘)로 바꾸었다. 중앙관서를 22부(내관 12부, 외관 10부)를 나누었고 수도는 5부, 지방은 5방으로 나누었다. 미륵사 등 대규모 사찰을 건축하고 겸익(謙益)을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고 정신적 토대를 삼았으며 노리사치계(奴唎斯致契)를 통하여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었다. 중국 양나라와는 화친을 강화하였고 한때 신라 진흥왕과 연합하여 한때 한강 유역을 회복했으나(551년) 553년 신라가 배신하여 그 땅을 탈취하여 탈취당하자 분격한 성왕은 일본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에서 전사하였다.
다. 신라
⑴ 17대 내물마립간(356~402)
① 대외 팽창 :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 확장
② 중앙 집권 국가로의 발전: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 확립, 마립간 왕호 사용
③ 왜구 격퇴 : 광개토대왕 도움(호우명 그릇)→ 고구려 간섭→ 배제 노력
⑵ 19대 눌지마립간(417~458)
왕위 부자상속이 확립되었으며 왕 17년 433년 백제 20대 비유왕(毘有王)과 나제동맹을 맺었다. 이 무렵 고구려의 아도(阿道) 또는 묵호자(墨胡子)에 의하여 불교가 전래되었다.
⑶ 21대 소지마립간(479~500)
수도에 시장(市肆)을 설치하고 우역도 설치했다. 그리고 15년 493년 3월 이벌찬 비지의 달과 백제 동성왕과 혼인으로 제2차 나제동맹을 맺었다.
⑷ 22대 지증왕(500~514)
신로, 사라, 서라, 서벌로 불리는 것을 신라(新羅)라고 하고 마립간(麻立干)을 중국식 왕(王)으로 바꾸고 우경(牛耕)을 시작하고 동시전(東市廛)을 설치하고 순장(旬葬)을 금하였다. 512년에는 이사부(異斯夫)를 시켜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했다.
⑸ 23대 법흥왕(514~540)
병부를 설치하여 왕이 군권을 장악하고 상대등을 설치하여 재상의 지위를 부여하고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했다. 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535년 불교를 공인하고 532년 금관가야를 정복하고 536년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⑹ 24대 진흥왕(540~576)
정복군주로서 신라의 정성기를 맞이했다. 화랑도를 조직하여 한강유역(551년), 대가야(562년) 및 함경도지역(568년)을 정복했다.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단양적성비(551년), 북한산비(555년), 창녕비(561년), 마운령비(568년) 및 황초령비(568년) 등 순수비(巡狩碑)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거칠부에게 국사(國史. 545년)를 저술케 하였다.
Ⅲ. 삼국의 문화와 예술가들
1. 글씨, 그림, 음악
가. 글씨
고구려의 광개토왕비, 중원고구려비, 모두류묘지명(牟頭婁墓誌銘. 고구려 광개토왕 때 북부여 수사(守事)인 모두루의 묘지. 1935년 10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하양어두(下羊魚頭)에서 발견), 백제의 부여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신라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성덕왕 37년 732년)이 있다.
나. 그림
고구려 | 영양왕 21년 610년 담징(曇徵)이 일본 호오류사(法隆寺) 금당벽화 그림.물방앗간 전래. |
백제 | 위덕왕 44년 597년 아좌태자(阿佐太子)는 일본의 쇼토쿠태자(聖德太子)상 그림 |
신라 | 솔거(率居)는 황룡사벽화(老松圖), 분황사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斷俗寺)의 유마상(維摩像)을 그렸다고 하고 전하지 않는다. 천마총의 마구의 다래(障泥, 장니)에 그린 천마도는 신라 그림의 패기에 찬 수준을 보여준다. |
다. 시가와 음악
⑴ 시가(詩歌)
고구려와 백제에는 어떠한 형식의 시가가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가야에는 원시적인 전통을 이은 주가(呪歌)로서 구지가(龜旨歌. 迎神君歌. 가락국의 추장들이 구지봉에 모여서 김수로왕을 맞이 하기 위해 불렀다는 노래)가 전해오고 있다.
신라에는 회소곡(會蘇曲. 가사가 전해지지 않은 신라가요로 팔월 대보름의 가배(嘉俳)때 길쌈 내기에서 진 여자가 회소, 회소해서 회소곡이라함)이 있었고 이것은 향가(鄕歌)로 발전하였다. 향가는 주로 화랑이나 승려들이 지은 주원적(呪願的) 의미를 지닌 것으로써 원시적 주가에 대치되는 불교적인 것으로써 도솔가(兜率歌)및 사뇌가(詞腦歌)를 포함한 이 시기의 모든 시가를 총칭하는 말로 신라가요・신라시가・사뇌가라고도 하며 중국의 시(詩)나 불교의 범패(梵唄)에 대해 '우리 고유의 시가', '시골노래'라는 개념으로 향가라고 했다. 통일신라시대말 진성여왕대에 향가집 각간 위홍과 대구화상이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했으나 전하지 않고 현재 가사가 전하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14수, 균여전(均如傳)에 11수로, 모두 25수이다. 보통 향찰로 기록되었으며 문헌상의 최초의 작품은 진평왕대(579~631)의 서동요(薯童謠)와 혜성가(彗星歌)에서부터 마지막 작품은 고려 광종(917~973) 때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이다.
[참고] 향가 25수
향가(鄕歌) 향가(鄕歌)는 신라시대로부터 고려 전기까지 창작되었으며, 도솔가(兜率歌)와 사뇌가(詞腦歌)도 포함한다. 향가의 하위 장르로는 월명사의 도솔가 같은 주술계 향가, 유리왕대의 도솔가, 회소곡(會蘇曲), 사내악, 돌아악 같은 차사(嗟辭) 사뇌계 향가(詞腦系鄕歌), 헌화가(獻花歌), 양산가(陽山歌), 해론가(奚論歌) 같은 민요계 향가, 이른바 10구체 향가라 불리는 사뇌가 등의 네 종류를 든다.
여기에 도솔가를 향가의 하위 장르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사뇌가는 모죽지랑가, 혜성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같은 화랑집단 중심의 풍월계 향가와 원왕생가, 도천수대비가, 우적가 같은 불교신앙 중심의 화청계 향가로 그 성격을 나누기도 한다. 현재 전하는 향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14수, 균여전(均如傳)에 11수로 모두 25수이다. 다음과 같다.
1. 삼국유사 14수
향가 | 지은이 | 내용 |
1. 혜성가(彗星歌) | 융천사(融天師) | 신라 진평왕 때 융천사(融天師)가 지은 10구체 향가. 혜성이 심대성(心大星)을 범하였으므로 이 노래로써 물리쳤다는 설화가 전한다. |
2. 서동요(薯童謠) | 서동(백제 武王의 아명) | 서동요에 관한 설화 나오는 향가로, 설화에는 서동(백제 무왕의 아명)이 신라 진평왕의 선화공주와 인연을 맺기 위해 일부러 퍼뜨린 노래라고 나와 있다. |
3. 풍요(風謠) | 미상 |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4구체 향가로서 지은이를 알 수 없다. 양지(良志)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 때 부역 온 성내 남녀가 불렀다는 민요. 양지사석가(良志使錫歌). |
4. 헌화가(獻花歌) | 실명 노옹(失名老翁) | 삼국유사에는 “소를 끌고 가던 늙은이가 수로부인에게 절벽의 철쭉꽃을 꺾어다 드릴 때에 부른 노래”라고 하여 “노인헌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헌화가라고 부른다고 한다. 신라 성덕왕 때에 지어진 4구체 향가이다. “수로(水路)부인”이 한국어로 지은 이름을 한자로 뜻을 옮겨 만든 것인지, 바다를 끼고 곧 물을 따라가는 부인이라는 뜻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
5. 도솔가(兜率歌) | 월명사(月明師) | 삼국유사 권5에 신라 경덕왕 때(760년) 월명사가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4구체 향가이다. 해 2개가 나란히 나타나매 왕이 월명사로 하여금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어 재앙을 물리치게 하였다는 설화가 전한다. |
6. 제망매가(祭亡妹歌) | 월명사(月明師) | 신라의 승려 월명사가 지은 것으로, 《삼국유사》 권5 “월명사 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에 “월명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부처에게 공양하는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제천의 〈월명〉(月明)은 〈제망매가〉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작품으로, 나뭇잎을 통해 깨달은 인생의 본질을 노래하고 있다. 나무를 떠나야만 하는 수많은 나뭇잎들을 통해 죽음의 세계로 떠나야 하는 인간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
7.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 충담사(忠談師) |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 때의 승려 충담사(忠談師)가 화랑 기파랑(耆婆郞)을 추모하여 지은 십구체(十句體) 향가(鄕歌). |
8. 안민가(安民歌) | 충담사(忠談師) | 삼국유사 권2 “경덕왕, 충담스님, 표훈대덕 편”에 실려 있다. 경덕왕이 충담 스님에게 “나를 위하여 편안하게 다스리도록 하는 노래를 지으라.”라고 명령을 내려서 지은 노래이다. 10구체 향가. |
9. 처용가(處容歌) | 처용(處容) | 삼국유사 기이편 “처용랑과 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란 인물이 지었다고 하며 역신이 그의 아내를 흠모하여 동침하고 같이 잠자리에 있는 것을 돌아와서 보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러자 역신은 처용이 노하지 않은 것에 감동하여 그 앞에 나타나 꿇어앉았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역신을 쫓았다고 한다. 고려 가요 중에도 처용가가 악학궤범에 전해 후에 향가 해독에 도움을 주었다.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兮隱吾下於叱古 二兮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
10. 우적가(遇賊歌) | 영재(永才) | 삼국유사의 권5 “도적을 만나다”에 이 노래를 짓게 된 이유 등이 실려 있으며, 이 노래의 내용을 칭송하여 지은 한시 한 편이 있다. 8세기 중엽에 지어진 노래이다. |
11. 원왕생가(願往生歌) | 광덕(廣德)의 처 | 노래의 원문에 “願往生”이란 말이 겹쳐서 나와서 불교에서는 이를 “극락에 가고 싶다”라는 말로 풀이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극락노래”라고 한다. “일찍이 노래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며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문무왕 때 또는 효소왕 때에 지어졌다고 추정되며, 광덕(廣德)의 처가 지은 10구체 향가라고 하는데, 광덕이 죽자 그의 친구 엄장(嚴莊)이 그 처에게 동침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했다는 설화만 전해 온다. 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鄕言云報言也) 多可支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 兩手集刀花乎白良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 阿邪此身遺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 달하 이제 서방까지 가십니까? 무량수불전에 일러다가 사뢰고 싶습니다 다짐 깊으신 부처님께 우러러 두 손 모두어 사뢰어 원왕생 원왕생 그릴 사람 있다 사뢰고 싶습니다 야으, 이몸 남겨 두고 사십팔대만 이루실까. |
12.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 득오곡(得烏谷) | 신라 효소왕 때에 만들어진 8구체 향가로서, 화랑가이다. 화랑 죽지랑의 낭도였던 득오곡(得烏谷, 또는 득오랑)이, 그의 스승 죽지랑을 사모하고 찬양하여 지은 8구체 향가로서, 노래의 주인공은 화랑 죽지랑이므로 노래의 이름이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이며, 일명 득오곡모랑가(得烏谷慕郞歌)라고도 부른다. 죽지랑은 김유신(金庾信)의 부원수로서 삼국 통일에 공이 컸다. 득오곡은 그의 낭도로서 풍류와 도술로 이름이 높았다. 노래는 이두문으로 되어 있다. |
13. 원가(怨歌) | 신충(信忠) | 원가(怨歌)는 신라 효성왕 때 신충(信忠)이 지은 8구체 향가로서, 연군가(戀君歌)이다. 효성왕이 등극 전 신충과 잣나무를 두고 후일을 언약하였으나, 등극 후 그 일을 잊으매 이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니 그 나무가 말랐다. |
14.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 희명(希明) | 신라 경덕왕 때 희명(希明)이 지은 향가. 한기리(漢岐里)의 여인 희명(希明)은 다섯 날 난 제 아이 눈이 멀자 분황사 좌전(左殿)에 있는 천수관음(千手觀音) 벽화 앞에 데려서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를 불렀더니 기적적으로 눈이 틔었다는 한다. |
2. 균여전에 실린 향가 11수
가.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고려 초 균여대사(923~973)가 지은 11수의 10구체 향가다. 균여대사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화엄경의 보현보살 열 가지 행원에다 낱낱이 향가 한 수씩을 짓고, 11장은 그 결론으로 된 사뇌가이다. 고려 제4대 고려 광종 연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글은 해인사 장경판으로 전하는 균여전에 향찰로 기록되어 있다
나. 그 외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 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 참회업장가(懺悔業障歌), 수희공덕가(隨喜功德歌), 청전법륜가(請轉法輪歌), 청불왕생가(請佛王生歌), 상수불학가(常隨佛學歌), 항순중생가(恒順衆生歌), 보현회향가(普賢廻向歌), 총결무진가(總結无盡歌)
3. 기타
화랑세기 6세 세종 장에 미실(美室, 546/548 ~ 612년 이후)이 사다함(斯多含, 생몰년 미상, 풍월주 562년 ~ 564년, 신라의 화랑으로 진흥왕의 대가야 정복에서 활약하였다. 성은 김, 급찬 구리지의 아들로서 내물 마립간의 7세손)이 출정할 때 지었다는 풍랑가(哀願歌)가 기록되어 있다. 진위에 대해 논란이 많다. 고려 16대 예종 15년 1120년 예종이 서경에서 열린 팔관회(八關會)에서 태조 왕건이 927년 공산 동수회전(桐藪會戰)에서 견훤과 싸우다 궁지에 몰렸을 때 왕건을 대신해 죽은 공신인 김락(金洛)과 신숭겸(申崇謙)의 가면극을 보고 그 둘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8구체의 향찰표기(鄕札表記)의 가요인 도이장가(悼二將歌)를 향가로 보는 이도 있다.
⑵ 음악
음악과 무용은 종교적 성격을 지녔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어느 나라나 음악이 성하였고 악기로는 관(管)・현(絃)・타(打)악기 합하여 수십 종이 있었는데 서역에서 들어온 것도 있었다.
고구려 | 왕산악(王山岳)이 진(晋)의 7현금(七絃琴)을 개량하여 현학금(玄鶴琴)을 만들고 100곡을 지었다고 한다. |
백제 | 음악에 관하여 상세한 기록이 없으나 일본에 악공(樂工)・악사(樂師)・악기(樂器)기)를 전한 사실로 보아 고구려나 신라 못지 않게 음악이 발달하였을 것이다. |
신라 | 자비마립간때 백결선생(百結先生)은 방아타령(碓樂. 대악)으로 유명하며 고구려 현악금은 신라에 전해져 경덕왕때 옥보고(玉寶高)같은 대가를 낳았다. |
가야 | 우륵(于勒)은 가야금(伽倻琴)으로 12악곡을 짓고 신라에 가야금을 전했으며 계고(階古)에게 가야금, 법지(法知)에게 노래, 만덕(萬德)에게 춤을 가르쳤다고 한다. |
Ⅳ. 삼국과 가야의 문물 전파
삼국 중 백제가 지리적, 정치적으로 일본과 가장 가까웠으며 백제의 학문과 기술을 일본의 야마토 정권(야마토 시대(大和時代, 250년 ~ 710년)는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현재 나라 현의 아스카촌을 중심으로 일본을 다스리던 국가 형성, 확립의 시대) 수립과 아스카문화(飛鳥文化, 7세기 전반 스이코 천황(推古天皇)때, 아스카 지역(현재의 나라 지역)에서 발달한 문화)를 대개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6세기 중엽부터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645년)이 행해지기 이전인 7세기 중엽까지. 593~645)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백제 | 아직기(阿直岐) | 4세기 중엽 372년 근초고왕때 일본태자에게 한자 가르쳤다 |
칠지도(七支刀) | 근초고왕 24년 369년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어 왕자에게 왜왕에게 하사하도록 했다. | |
왕인(王仁) 박사 | 285년 ㅠ근수구왕때 천자문(1권)과 논어(10권)를 전하고 경학과 역사를 가르쳤다. | |
인사라아(因斯羅我), 정안나금(定安那錦) | 5세기 중반 개로왕때 463년 화가 인사라아(因斯羅我)는 회하 발전에 기여했고 정안나금(定安那錦)은 비단짜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 |
단양이(段楊爾), 고안무(高安茂) | 6세기초 무령왕때 513년 단양이(段楊爾), 516년 고안무(高安茂)가 유학을 전해 주었다. | |
마정안, 문휴마나, 동성자언, 동성자막고, 류귀(柳貴), 노리사치계, 왕보손 | 6세기 전반 성왕때 531년 마정안(馬丁安), 544년 문휴마나(汶休麻那), 547년 동성자언(同城子言), 554년 동성자막고(同城子莫古), 554년 류귀(柳貴)등이 유학, 552년 노리사치계(奴唎斯致契)가 불교, 위덕왕 원년 554년 역박사(曆博士) 고덕(固德) 왕보손(王保孫)이 천문과 역법을 전해 주었다. | |
위덕왕 | 6세기 후반 위덕왕때인 554년 2월 4명의 악인(樂人) 시덕 삼근(三斤), 계덕(季德) 기마차(己麻次)・・진노(進奴), 대덕(對德) 진타(進陀)), 577년 불교서적, 율사, 선사, 조불사(造佛師), 조사공(造寺工), 584년 불상, 588년 승려, 사공(건축기술자), 노반박사, 기와박사, 화가를 보냈으며 위덕왕 44년 597년 아좌태자(阿佐太子)는 일본의 쇼토쿠태자(聖德太子)상 그렸다. | |
혜총(惠聰, 慧聰) | 의덕왕 3년 588년 영근(令斤)・혜식(惠寔)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불사리(佛舍利)와 계율종을 전하였고, 595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머물렀다.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상신(相臣) 소가(蘇我馬子)가 호코사(法興寺)가 낙성되자 고구려의 승려 혜자(惠慈)와 더불어 그 사찰에 있으면서 포교에 힘썼다. | |
관륵(觀勒) | 무왕 3년 602년 관륵(觀勒)은 역서, 천문, 지리, 둔갑, 방술에 관한 책을 전해주고 성왕 32년(위덕왕 원년) 554년 2월 역박사(易博士) 시덕(施德) 왕도량(王道良), 의박사(醫博士) 나솔(奈率) 왕유릉타(王有㥄陀), 채약사(採藥師) 시덕 반량풍(潘量豊), 고덕 정유타(丁有陀), 악인(樂人) 시덕 삼근(三斤), 계덕(季德) 기마차(己麻次)・진노(進奴), 대덕(對德) 진타(進陀) 등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다. | |
미마지(味摩之) | 백제(百濟)의 음악가・무용가로서 중국 오(吳)나라에서 기악무(伎樂舞)를 배우고 돌아온 후 무왕 13년 612년 일본에 귀화(歸化)하여 사쿠라이(櫻井)에서 학교를 세우고 소년들에게 음악과 춤(기악무)를 가르쳤다. | |
도장(道藏) | 640년경에 귀족으로 태어나 출가한 뒤 백제가 망한 뒤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이며 성실론소(成實論疏) 16권을 지었다. | |
고구려 | 담징(曇徵) | 영양왕 21년 610년 일본 호오류지(法隆寺) 금당벽화를 그리고 5경과 종이, 먹, 멧돌 제조기술도 가르쳐 주었다. |
가서일(加西溢) | 영류왕 5년 622년 일본 最古의 수예품인 나라(奈良)의 추구사(中宮寺)가 소장해 전시하고 있는 자수작품 천수국수장(天壽國繡帳, 가로 8m, 세로 2m)의 원화를 그려 주었다. | |
혜자(惠慈, ?∼623・일본명 에지) | 영양왕 6년 595년 일본에 건너가 섭정(攝政)이었던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사부(師傅)가 되고 이듬해 대신(大臣)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세운 호코사(法興寺)가 낙성되자 백제의 승려 혜총(惠聰)과 더불어 그 사찰에 있으면서 포교에 힘쓰다가, 615년 쇼토쿠태자가 지은 소(疏)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 |
혜관(慧灌) | 젊었을 때 수(隋)나라로 들어가서 가상사(嘉祥寺)에서 길장(吉藏)에게 삼론종과 성실종을 배우고 영류왕 8년 625년 일본에 삼론종(三論宗)을 전하였다. 그외 도일승려로서 혜편(惠便), 승륭(僧隆), 도현(道顯) 등이 있고 의학, 약학 기술도 전해주었다. | |
도징(道澄), | 당에 들어가 길장대사(吉藏大師)에게 삼론(三論)을 익힌 뒤 영류왕 11년 628년 일본으로 건너가 공(空)사상을 전했다 | |
신라 | 조선술, 축제술, 도자기 제조법, 의약, 불상 | 왜와 사이가 좋지 않아 상대적으로 교류가 적었으나 조선술, 축제술, 도자기 제조법, 의약, 불상을 음악을 전해 주었다. |
가야 | 스에키(須惠器) 토기 | 가야의 토기는 일본 스에키(須惠器) 토기의 원류가 되고 있다. |
Ⅴ. 통일신라
1.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유학자
6두품 출신이 많았고 유학은 골품제를 비판하고 사회모순을 개혁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김대문(金大問) | 계림잡전(鷄林雜傳),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紀),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 등 역사와 지리에 관한 저술을 하였다. |
김장청(金長淸) |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 |
강수(强首) | 임나출신의 6두품으로 외교문서의 작성에 공이 크고 불교를 세외교(世外敎)라고 비판하고 도덕을 사회적 출세보다 더 중요시하고 “김인문을 놓아주기를 청하는 글(請放仁問書)”을 당고종에게 바쳤다. |
설총(薛聰) | 원효(元曉)의 아들로서 6두품으로써 유교경전에 밝았으며 구결(口訣)로써 경서를 읽는 법을 만들고 신문왕에게 풍왕서(諷王書, 花王戒(화왕계)를 올리고 감산산조상기(甘山寺造像記)를 씀. 홍유후(弘儒侯) 칭호 |
최치원(崔致遠, 857~) | 도당유학생으로 당의 빈공과에 합격하였으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짓기도 했다. 귀국하여 제51대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조를 건의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계원필경(桂苑筆耕), 사륙집(四六集), 제왕연대록(帝王年代曆), 향약잡영(鄕樂雜詠), 사산비명(四山碑銘). 문창후(文昌侯) 칭호 |
김필오(金弼奧) |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鐘銘) : 무게 있는 탁월한 문장력 |
기타 | 제문(帝文), 수진(守眞), 양도(良圖), 풍훈(風訓) 등 유학자와 김운경(金雲卿, 최초 빈공과 합격자), 김가기(金可紀) 등 숙위학생 |
2. 불교사상의 발달
가. 불교의 사상적 체계화
원측(圓測) | 당의 현장(玄奬)에게서 불법을 배워 역경(譯經)과 저술에 종사하였으며 Tibet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원효(元曉, 617~686) | 각 종파의 사상적 대립을 일심사상(一心思想)을 통해 해결하였다. 화쟁국사(和諍國師). 유심안락도(游心安樂道, 淨土信仰) :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으로 南無阿彌陀佛만 염불하면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중국의 화엄종 성립에 큰 영향을 미침),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산스크리트어(梵語)로 번역되어 인도의 불교계에 영향), 열반종요(涅槃宗要),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
의상(義湘. 625~702) | 지엄(智儼)의 제자로 중국 화엄종을 들여와 신라 화엄종을 창시했다. 부석사를 건립했으며 원융사상(圓融思想, 一卽多 多卽一. 一心에 의하여 만물을 통섭하는 것. 一體不離).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관음신앙 |
혜초(慧超, 704~) | 성덕왕 18년 719년 당에 가서 다시 인도와 페르시아, 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성덕왕 26년 727년 당에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3권을 남겼다. |
진표(眞表) | 백제 유민으로서 경덕왕때 김제 금산사(金山寺)를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통하여 백제유민과 고구려유민 사이에 크게 환영받았다. |
김교각(金喬覺, 696~794) | 신라 왕손 출신 승려로 성덕왕 18년 719년 당에 가서 중국 안휘성 구화산(九華山)에서 75년간 고행과 포교활동을 전개하다가 지장보살의 화신이 되었다. |
나. 불교의 대중화
원효는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으로 南無阿彌陀佛만 염불하면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고 하여 불교의 대중화의 길을 열었고 의상은 아미타신앙과 더불어 관음신앙을 이끌었다.
다. 선종(禪宗)의 등장
⑴ 교종(敎宗)
교종은 경전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했고 5교로 성립되었다.
⑵ 선종(禪宗)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표방하며 개인의 실존과 자각을 강조하는 실천수행을 통한 개달음을 추구하며 중국의 달마(達磨)대사가 개창하여 3국 통일 이전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신라 말기에 지방호족, 6두품의 호응으로 크게 유행했고 9산문(山門)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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