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교육학 비고츠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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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종사하는 사람 치고 비고츠키(Lev Semenovich Vygotsky, Лев Семенович Выготский, 1896년 11월 17일 ~ 1934년 6월 11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교사를 준비한 사람들은 교육심리학에서 피아제의 발달단계와 나란히 있는 그의 이름과 근접발달영역이라는 개념을 접했을 것이다. 그는 교육심리학 개론서에서 사회 구성주의 심리학자로 분류되곤 한다.
나 역시 비고츠키를 교육학 교재나 교육심리학 개론서에서 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최근에 진보적인 교육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비고츠키가 뜨고 있는 모양이다. 어느 교사 연수 홈페이지에 비고츠키와 관련된 직무연수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다. 강의는 비고츠키의 교육철학에 대한 전반적 접근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강의 개요는 특히 근접발달영역이나 비계 등의 개념을 제시한 사람 정도로 비고츠키를 아는 것은 피상적인 접근이며, 교육에 대해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인터넷으로 도서를 검색해보니 2010년대에, 그리고 지금도 비고츠키 선집이 꾸준히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다. 교육은 우리 사회에서 항시적인 골칫거리이고, 교육의 중심에 있는 교사도 올바른 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정립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고츠키는 그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비고츠키의 1차 자료는 배경지식 없이 접근하기에는 어렵다고 하여 '진보교육연구소 비고츠키교육학실천연구모임'에서 입문서를 출간하였다. 특정한 학문 영역에 들어가려면 입문서의 도움을 받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이라『관계의 교육학, 비고츠키』를 구입해서 읽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 긴 이름의 연구모임은 모두 현장에서 교육을 몸소 실천하는 교사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현장에 있는 교사들에게 어떤 이론적인 갈증은 상존한다. 매일 학생들 앞에서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이 정말 좋은 가르침인지 회의감이 몰려올 때가 많다. 어떤 교사가 페이스북에 '교육은 이론과 실천이 결합되어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교사에게는 이론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사는 언제나 실천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의 글을 올려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입문서를 쓴 교사들도 이론적 갈증에 고통받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이 책에서는 비고츠키를 사회 구성주의자가 아니라 문화역사적 심리학자로 규정한다. '문화역사적'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것처럼 비고츠키는 인간의 발달이 생물학적 성장과 문화사회적 환경의 변증법적 결합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는 기존의 행동주의 심리학이 인간을 자극에 반응하는 수동적 존재로 규정하거나, 피아제가 인간의 발달을 관찰한 연구에서 인간을 사회문화적 측면으로부터 고립된 존재로 가정한 것을 비판했다. 인간 발달에 대한 발생적 접근이 중요해졌으며, 문화와 환경의 영향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발달에 '협력'과 '관계'가 매우 중요함을 역설했다. "비고츠키의 인간관은 "동료 인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체적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다."라는 한마디로 요약됩니다."(22쪽) 인간의 발달에 사회적 상호작용이 필수적임이 강조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이다._『역사와 발달』"(293쪽) 필연적으로 협력과 관계 형성을 매개하는 도구, 즉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상징적 기호체계로서의 언어와 발달의 관계를 연구했다.
그는 인간 발달의 원천을 사회와 상호작용으로부터 찾고, 인간의 고등정신기능이 사회적인 국면에서 개인적인 국면으로 내면화되면서 발달한다고 보았다. 이 때 내면화의 대상은 이미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개념'이다. "내면화가 된다는 것은 충분한 숙달을 통해 체화된다는 것, 이제 자기 것이 되어 자신의 뜻에 따라 어떤 개념이나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내면화는 곧 주체성의 기초이며 의지적 실천, 창조적 행위의 토대가 됩니다. 어떤 것이 제대로 내면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실제적 상황에서 어떤 개념이나 기능을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37쪽) 인간의 정신 발달은 개념이나 기능을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를 향한다. 여기에서 교육의 목적이 분명해진다. 비고츠키의 교육은 '개념적 사고력에 입각한 주체적 인간 형성'(40쪽)을 목적으로 한다. 비고츠키가 교육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려고 했던 것은 '자유의지의 획득'이다. 동물적인 반응이나 관습적인 수동성, 합리적인 계획 수립과 문제해결이라는 도구적 이성을 넘어서 스스로 판단하고 실천하는 존재를 형성하고자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고등정신기능의 형성'이다. 고등정신기능은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보편적 정신기능이다. 이보다 하등의 정신기능을 기초정신기능이라고 하는데 수동적, 반응적인 특성이 있어서 '반응적 지각, 반응적 주의, 자연적 기억, 실행적 사고'를 하는 반면, 이를 토대로 발달하는 고등정신기능은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특성을 지녀 '범주적 지각, 자발적 주의, 논리적 기억, 개념적 사고'를 한다. 사고 기능만 예로 든다면 유인원은 '시각적 장'에 종속되어 열매를 따기 위한 도구가 눈에 띄어야만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반면에 인간은 시각적 장으로부터 자유롭게 사고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도구를 스스로 찾고 계획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등정신기능을 보유함으로써 인간은 동물과 차별화된 존재가 된다.
지금까지의 설명에 의하면 고등정신기능은 생물학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 같지만 비고츠키는 문화적 영향에 의해서 비로소 고등정신능력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역사적으로 어떤 행동패턴을 발생시켜왔다는 것이다. "고등정신기능 발달에서 생물학적 진화는 '토대'가 되며 문화적 발달은 '원천'이 됩니다. 두 과정 모두 필요합니다."(54쪽) 인간은 계통발생적으로 고등정신기능을 보유할 수 있는 종이 되었지만 각 개인은 개체발생적으로 각자의 발달 역사를 갖게 된다. 어린이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말을 배우고, 사회적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54쪽) 고등정신기능이 발달한다. 이는 개별 학생의 학습부진이나 발달 지연 현상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여로부터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비고츠키는 이를 신체적 장애와 다른 '문화적 원시성'이라고 지칭하였다.
고등정신기능의 발달을 매개하는 도구가 언어(말)이다. 기호를 통해서 인간은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자극과 반응을 매개하는 보조 자극을 도입하여 기초정신기능을 넘어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과 말은 그 뿌리가 다르지만 둘의 교차가 발생하면서 점차 긴밀히 연관되기 시작한다. 말 발달은 외적 말(의사소통을 위한 말)에서 혼잣말로, 다시 내적 말로 이어지게 된다. 3~4세 경에 나타나는 혼잣말은 말과 생각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 포인트이다. 아이가 혼잣말을 하는 이유는 언어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왜 혼잣말을 하는 것일까요? 혼잣말은 이 아이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요? 그것은 아직 스스로 화장실 가기를 익히지 못한 어린이가 혼잣말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화장실 가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잣말을 통해 어린이는 자기의 생각을 한곳에 집중하고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즉 아이들은 아직 익숙하게 혼자 하지 못하는 일에서 혼잣말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은 어린이에게 어려운 상황이 도래할 때 혼잣말이 증가하는 것을 보면 분명해집니다."(93쪽) 혼잣말은 언어와 사고가 연결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내적 말은 '생각인 동시에 말, 말로 하는 생각'이다. 생각과 말은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에 내적 말은 '생각과 말의 역동적 상호 이주'의 결과이면서 "'생각에서 말'로 '말에서 생각'으로 상호 전환되는 과정"(95쪽)이다. 어린이의 혼잣말이 학령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내면화된 것이 내적말인 것이다.
한편, 생각 발달 단계는 혼합체적 사고-복합체적 사고-의사 개념-진개념으로 나아가는데, 이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의사 개념'이다. 의사 개념은 어떤 개념을 사용하기는 하되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사용하는 개념이다. "어린아이가 '회사'의 의미를 잘 몰라도 '아빠 어디 갔니?'라는 물음에 얼마든지 '아빠 회사 갔어요'라는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86쪽) 그러니까 의사 개념은 의사소통의 맥락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다. 실제로 중학생의 언어에서도 의사 개념이 많이 발견된다. 그들이 사용하는 비속어만 봐도 그렇다. 중학생들은 '씨발', '존나'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면서 친구들에게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들에게 그러한 단어는 의사 개념이어서 실제 뜻과는 상관없이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과격한 감정을 표현하는 상황에서 '사용'한다.
'개념'은 인간의 발달 국면에서 도달해야 할 최종적인 사고 형식이므로 중요하다. 비고츠키는 개념을 '분석과 종합의 통일'로 보았으며, '체계적 사고'를 매개하면서 현상과 개념 간 혹은 개념과 개념 간 연관관계에 대한 이해를 낳으므로 현상과 상황에 대한 총체적 이해, 주체적 이해의 기반이 된다고 주장했다. 중요한 지점은 비고츠키가 진정한 개념의 획득은 개념의 숙달을 통한 내면화로서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개념의 언어적 암기와 이해는 개념 이해의 시작일 뿐 진정한 개념 형성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실천적 사용을 통한 숙달과 주체적 체화(내면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는 단순한 언어적 암기와 이해를 넘어서서 토론과 발표, 글쓰기, 실천적 적용 경험 등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진개념, 즉 진짜 개념은 형식적인 뜻 이해를 넘어서서 체계화된 개념으로 구체적 현실을 이해하는 것, 과학적 이론으로 일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이해하는 것, 이론적으로 배운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을 결합해나가는 것에 의해 형성됩니다. 다시 말해 변증법에서 말하는 추상/구체, 일상/과학, 이론/경험의 결합, 통일에 의해 형성되는 것입니다."(88쪽)
개념의 발달은 근접발달영역과 긴밀히 연결된다. "근접발달영역은 실제적 발달 수준과 잠재적 발달 수준 사이의 거리이다. 실제적 발달 수준은 독립적 문제 해결에 의해 결정되고, 잠재적 발달 수준은 성인의 안내 혹은 더 능력 있는 또래들과의 협동을 통한 문제 해결에 의해 결정된다."_『마인드 인 소사이어티』(134쪽) (책 108쪽) 근접발달영역은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의 만남을 통해서 창출된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습득된 단어가 학문의 체계 속에서 더 엄밀한 의미를 가진 개념으로 교육의 대상이 되면서 학생은 개념을 의식적으로 파악하고, 의지적으로 숙달하게 된다. 근접발달영역에 있는 학생은 이미 개념을 습득한 교사의 개념 사용 시범이나 동료 학생의 시범을 모방하면서 잠재적 발달 수준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교수-학습 과정에서 교사의 사고활동이 중요한 모범이 되며, 교사-학생 간 학생-학생 간 협력이 발달을 이끄는 최적의 환경을 조성한다.
과학적 개념을 제공하는 것은 학교 교과이다. 교과는 학문적 개념들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비고츠키는 교과 학습을 통해서 과학적 개념에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심리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의식이 고양된다고 주장했다. 분과의 다양한 개념들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고등정신기능이 총체적으로 발달된다고 보았다. "비고츠키가 전이가 일어나는 영역으로 주로 본 것은 고등정신기능입니다. 왜냐하면 총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고등정신기능 영역에서는 기능들의 전환과 위치 바꿈, 즉 '전이'를 통해 발달이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각 기능들의 관계의 '체계'라는 고등정신기능의 '총체성'이 전제되어야 체계 내에서 기능의 전환, 위치 바꿈과 그를 통해 기능 체계의 질적 변화가 비롯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이'가 가능한 것이고, 전이를 통해 '질적 변화'가 일어납니다."(132쪽)
과학적 개념이 학문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학교 교육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어린아이가 자연발생적으로 습득한 일상적 개념을 토대로 과학적 개념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어린이와 어른(교사)의 체계적 협력"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물건'이라는 낱말을 의식 없이 사용하던 아이가 과학시간에 '물체'와 '물질'이라는 과학적 개념을 배움으로써 '물체'와 '물질'이라는 개념어에 견중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례를 예로 들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고도로 추상화된 개념이 학생들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과 만나면서 근접발달영역이 창출된다. "일상적 개념은 과학적 개념과 만나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발달의 다음 영역을 창출합니다. 일상적 개념은 과학적 개념을 통해 의식적 파악의 대상이 되며 추상적으로 상승하고, 과학적 개념은 일상적 개념과의 연결을 통해 구체적으로 상승합니다."(143쪽) 비고츠키가 글말과 입말의 질적 차이를 언급하면서 글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의 특성 차이에 상응한다.
학교가 시대에 뒤떨어진 지식을 가르치고 있다는 비판적 담론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이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학교는 소위 정보화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최신 데이터와 정보를 습득하는 공간이 아니다. 인류 문화의 정수를 습득하는 훈련을 통해 '사고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발달하는 도장이다. 인류 문화의 정수가 학교에서 '교과'라는 체계적 형식으로 제시되며, 학생은 이미 교과에 통달한 교사의 지적 활동을 모방하면서 인류 문화 형성에 동참하는 주체로 성장한다. 인터넷으로 지식을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으니 학교가 필요 없다는 주장이 실현된다면 비고츠키의 관점에 따르면 학생의 근접발달영역 창출이 어려워지고, 궁극적으로 학생의 주체적 지성과 인격 형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될 것이다. 학교는 자본주의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하부기구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유교육의 전통이 살아숨쉬는 곳이다. 사회의 인적자원을 생산한다는 이데올로그를 실현하는 한편, 학생 개개인의 '자유'를 형성한다. 자본가는 학교가 전자의 기능에 충실하기 바라며, 교사는 학교가 후자이기를 원한다. 그러고 보면 현대의 학교는 모순된 공간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이상에서 전개된 '개념'에 대한 비고츠키의 논의는 타당하다. 일례로, 국어의 읽기와 쓰기에서는 '통일성'(coherence) 개념을 가르친다. 일상적 개념으로서의 통일성은 다양한 개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지만 국어 교과에서의 '통일성'은 글의 부분이 하나의 주제를 향해야 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통일성'이라는 과학적 개념은 일상적 개념의 의미를 일정 부분 공유하면서 엄밀하게 구분되기도 한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통일성이란 글의 각 부분이 하나의 주제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거야.'라고 조작정 정의를 일러주고, 학생들이 통일성의 뜻이 시험에 나오므로 교사의 말을 달달 외웠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이 통일성의 개념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개념이란 다양한 현상의 어떤 공통적인 측면을 추상한 것이므로, 개념들은 다양한 사례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실제로 통일성을 갖춘 다양한 글을 읽으면서 통일성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또, 통일성을 지키지 못한 텍스트를 읽어보고 주제와 맞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거나, 자신이나 친구가 쓴 글을 퇴고하면서 주제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고치거나 삭제하는 경험도 해 봐야 한다. 그래야만 통일성이라는 개념을 체득할 수 있다. 내가 '체득'이라고 표현한 것이 비고츠키에 의하면 '전이'이며, '내면화'이다. 어쩌면 학생들은 부지불식간에 통일성의 개념을 내면화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에 의지적이고 의도적인 주의를 기울여서 숙달(통제)하는 것은 학교에서의 교수-학습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교과의 지식에 의한 체계적인 교수-학습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숙달은 양적으로 누적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깨달음처럼 돌연히 도약한다. 의식의 고양이다. 그래서 비고츠키는 '아하 경험'을 강조하고, "낱말의 의미는 변한다"고 말했다. 교사가 그 날 교실에 들어가 가르친 개념을 그 시간 안에 모두 소화할 수는 없다. 명사의 개념과 그 사례들을 한 번 가르쳤다고 해서 학생들이 신문기사에서 명사들만 쏙쏙 뽑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명사란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언어적 정의를 달달 외웠다고 하더라도 실제 글이나 말에서 명사를 찾아낼 수 없다면 그 학생은 여전히 의사 개념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학생은 명사의 개념을 유념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언어 자료에서 그 사례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실제로 명사를 찾아내는 능력을 갖게 되었을 때, 안목이 형성되었을 때, 그는 한차례 도약하게 된다. 학생은 혼자만의 힘으로 개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어렵다. 방법을 알려면 이미 그 방법에 숙달된 사람의 사고활동을 보고 모방해야 한다. 줄넘기를 잘 하려면 줄넘기 잘 하는 사람의 시범을 봐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교사의 교수활동이 중요하다. 교사는 명사의 개념적 정의만 알려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언어자료에서 명사를 찾아내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학생의 사고활동을 잘 관찰하여 학생의 상황을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 근접발달영역이 '창출'된다.
이 책의 중반부까지를 요약하면서 나의 의견을 덧붙여 보았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의 발달적 특징이 정리되어 있고, 마지막 장에서는 비고츠키의 교육관에 비추어 세계와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진단하고 분석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책의 각 장마다 돌출되어 있기는 하지만.
『관계의 교육학, 비고츠키』의 미덕은 비고츠키의 교육학의 핵심 내용을 알기 쉬운 사례와 함께 제시하면서, 현재의 한국 교육을 비고츠키 교육관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고등사고기능, 근접발달영역, 사고와 말의 상관관계, 개념적 사고에 기반한 주체 형성이라는 교육의 목적 등 비고츠키의 핵심적인 개념이나 아이디어, 사상을 현장 교사의 눈높이에 맞게 서술하고 있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 책에는 비고츠키에 대한 비판적 서술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고츠키의 교육관을 절대적 진리로 상정하고 교육의 현실을 지탄하고 있다. 반면 비고츠키 교육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핀란드 교육과정에 대해서는 상찬 일색이다. 물론 배움의 공동체, 혁신학교, '공교육 개편안'과 같은 진보적 교육과 비고츠키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면서는 그 한계도 같이 언급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들이 비교적 균형잡힌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비고츠키의 이론 역시 한계를 내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 아쉽다. 이론의 지나친 숭배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비고츠키 교육학의 한계는 비고츠키 교육철학의 원류인 헤겔의 한계와 맥을 같이 한다. 아도르노의 비판을 빌리자면 헤겔의 '개념' 중심 철학은 변증법적 운동에도 불구하고 비변증법적이다. 개념적 사고는 그 자체로 동일성의 근대적 사유 운동을 담지하고 있으며, 개별자의 구체성을 사상하고 개념의 추상성으로 편입시킨다. 그래서 개념적 사유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이 책대로라면 비고츠키는 발달적 측면에서 개념적 사고를 최고의 발달 수준으로 상정했다. 비고츠키가 살던 시대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최고의 이념으로 군림하던 시대였으며, 비고츠키의 교육철학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그 근원인 헤겔의 흔적이 엿보인다. 개념의 분석과 종합의 결합이라는 모순적 특성이나 고등정신능력의 총체적 특성은 변증법적 사유를 반영한다. 그런데 정말 개념적 사유만으로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과학을 최고의 학문으로 규정하고 인간과 사회를 과학 개념으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과학주의의 경도가 비인간화를 초래하고 있으며, 질적 특성을 양적으로 환원하는 양적 연구가 진리로 군림하면서 모든 개별적 예외 사례들을 비진리로 제거해버리는 상황도 개념적 사유에 근본적 책임이 있다. 개념과 정반대 사유를 펼치는 예술의 교육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책은 이와 같은 의문에 해답을 주지 못한다. 비고츠키의 교육학이 지나친 이성주의, 계몽주의라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비고츠키의 한계라기보다는 시대의 한계라고 보아야 옳다. 개념의 폭력적 동일성 운동과 근대적 주체의 타자 지배에 대한 성찰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가능했다.
비고츠키 교육관에 비추어 본 한국 교육의 문제점 분석이 그렇게 새롭지는 않다. 입시제도에 따른 서열화 평가의 비인간성, 지나친 경쟁으로 인한 협력적 기능 발달의 부재, 교육제도의 모순에 따른 교사-학생 간 관계 악화 등은 예전부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핀란드식 교육과정의 지향, 발달 단계에 따른 교사의 진단 및 협력 활동의 접촉면 증대, 피드백을 위한 평가 도입은 그 자체로 환영할 만한 것이지만 역시 새로운 것이 아니며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깊숙이 편입되어 버린 사회적 모순이 학교 제도에 반영된 것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교육 현장에 한정해서 추상적 해결책을 도출하고 있다. 급진적으로 서열화 평가를 철폐한다면 대학 입시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대학 서열화를 철폐하자고 할 것이다. 대학 서열화를 철폐한다면 적절한 인재 선발은 어떻게 할 것인가? 능력과 역량을 보자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능력과 역량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이후의 대답은 다시 진보적 교육운동이 비판하고자 하는 비인간화된 평가 시스템으로 귀결된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나는 서열화를 찬성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핀란드식 교육을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결코 아니다. 유행하고 있는 혁신학교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교육 제도 안에서 혁신의 기치를 내건다고 하더라도 입시 제도의 구조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교육의 개혁은 사회 개혁이 선행되어야 가능해진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인 힘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비판적인 서술을 말미에 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제외한다면 나는 비고츠키 입문을 위한 큰 도움을 받았다고 힘주어 강조하고 싶다. 저자들은 아마도 모순된 교육현장 속에서 올바른 길을 찾는 과정에서 비고츠키를 발견했고 어떤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나의 교육 실천에서 이론은 교사로서의 실존과, 타자와의 관계를 반성하기 위한 틀로서 기능한다. 이 책으로 근대적 사회구조 속에서 체제 유지를 위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하지 않겠다는 내 개인적 의지를 재차 확인했다. 비고츠키가 제시한 개념과 발달단계를 유념하여 학생을 지도한다면 나와 학생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확인하는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도 한 줄기 희미한 희망을 이 책으로 엿본 셈이다. 동료 교사를 위해 책을 저술하고 출판하기로 결심한 선생님들께 아낌 없는 박수와 성원을 보내는 바이다. 비고츠키에 대한 개괄적인 연구서 한 권을 읽은 후에 1차 자료를 들춰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