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교육헌장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1]
이것과 이걸 풀이한 책도 나왔다.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정권 당시 발표된 "잘 모르겠지만 일단 외워야 하는 것." 1960년대~70년대에 학생 시절을 보낸 중장년 층에서는 지금도 이 전문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전부 기억하지는 못해도 처음의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정도는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잘 모르겠다면 1950년대 후반~60년대 사이에 태어난 주변 어른[2]께 물어보자. 다는 못 외워도 앞부분 정도는 외우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기초위원 26명과 심사위원 48명이 모여서 초안 작성 후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헌장으로, 박정희 정권때 새마을운동만큼이나 많이 보급된 것 중 하나. 말 그대로 외워야 하는 것이다. 5차 교육과정 때까지는 교과서 앞부분에 가장 먼저 인쇄되어 나왔으며[3] 어떠한 의문도 질문도 가지지 않고 닥치고 외워야 했다. 당연히 교육과정 고시문에도 가장 앞에 위치했다. 외우지 못하는 학생에겐 일반적으로 선생들의 물리치료(?) 처방이 더해졌다. 당연히 학생들은 예나 지금이나 외우길 싫어하기 때문에 이걸 외우라는 선생과 외우기 싫어하는 학생들의 실랑이도 자주 일어났다. 80년대 중반에는 노래도 나왔다.
이 헌장 자체가 메이지 유신때 발표된 군국주의, 국수주의적 내용의 헌장(교육에 관한 칙어, 혹은 교육칙어[4])과 비슷하다는 지적이나[5] 극단적인 민족주의만 더해주고 도움은 안되는 내용이라는 비판이 있긴 했는데, 당연히 그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전면적인 비판은 못했다. 몇번 한 적은 있었는데, 바로 구속수감조치되었다(1978년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덤으로 "왜 충만 강조하고 효(孝)는 없느냐" 라고 문제제기한 교사도 있었는데 역시 구속….
국민교육헌장 발표일인 12월 5일은 당시 국민교육헌장 선포 기념일로 암송 대회같은게 열리기도 했다. 이후 "시민정신헌장" 이라는 이름으로 약간 내용이 개정되기도 했고 몇번 내용수정을 거쳤는데 결국 1994년에 국민교육헌장 자체가 아예 폐기되었고, 2003년에는 12월 5일 이었던 국민교육헌장 선포 기념일도 없어졌다. 사실 뭐 국경일도 아니었고 공휴일도 아니었으니 별로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국민 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이와 같은 '모범 시민 의식의 강요'는 자주 있는 일이다(물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과오라는 것이지 잘했다는 건 아니다). 국민교육헌장의 약점을 비집고 들어가고자 한다면 이러한 국민 국가 형성 과정의 폭력성을 짚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폐지된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흔적은 남아있다. 오래된 초등학교에 가보면 화단 한 켠을 장식하고 있는 이순신 동상이나 책읽는 소녀 동상 사이에 뭔가 빼곡히 적힌 바위나 콘크리트 비석 따위가 있다면 열에 아홉은 국민교육헌장을 새긴 물건이다.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은 세대는 이게 뭔지 나이가 들어서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 어릴적에 장난치는 곳이나 장식용 돌덩이 정도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풍자 버전으로는 입시위주 교육을 비꼰 고교교육헌장[6] 등이 있고, 게임파워 창간 7주년 특별부록으로 DDR 공략집을 교과서를 모방하여 제작하면서국기에 대한 경례와 함께 국민교육헌장 을 실은 적도 있다. 여기. 故 신해철은 비트겐슈타인 1집의 the pressure에서 국민 교육 헌장의 시작 부분을 인용하여 개개인에게 과도한 짐을 얹는 한국의 세태를 신랄하게 까는데 활용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박수동 화백의 만화 <5학년 5반 삼총사>에서도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연히 주인공 삼총사는 외우지 못해 반 친구 하나를 매수해 눈감고 외우는 척 하다가, 눈치를 챈 담임 선생님에 걸려 벌을 받는 장면이다. 지금 기준으로는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독재정권 시대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것도 하필이면 윤리-도덕시간때 의무적으로 암송해야한다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대였다.[7]
만화 검정 고무신에서는 이기철과 그 친구들이 말썽을 피우다가 걸려서 교무실에서 손을 들고 벌을 받는데, 선생님들이 '안그래도 평소 말썽을 피우는 이 놈들을 어떻게 혼낼까'하고 고민(?)하다가 국민교육헌장 낭독 행사에 학교 대표로 보내버린다. 국민교육헌장을 들으면서 학생의 본분을 되새기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고, 마침 선포 기념일이 한겨울인12월 5일로 대단히 추운 날씨라 다른 학생들도 가기 꺼려했기 때문. 행사장을 묘사한 모습을 보면 학생들도 추워서 발을 동동 구르고, 헌장을 낭독하는 분은 말 그대로 몸이 꽁꽁 언 동태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