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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통일 신라 하대의 사회 변화
1. 통일신라 중대의 붕괴
가. 진골 귀족의 내부 분열
삼국 통일후 제35대 경덕왕(742~765년)때에는 신라의 문화가 절정기에 도달했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전제주의를 타도를 위한 운동이 일어나 경덕왕은 이를 막기 위하여 한화정책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으나 혜공왕때 대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경덕왕 이후 사회발전은 진골 세역간의 유대를 이완시켜 분열을 가져왔다.
나. 왕위 쟁탈전 전개
중앙정부의 권위 실추로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력 상실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다. 왕위 계승 싸움에서 형통(신분)보다는 정치경제적 실력과 무장력이 중요시 되어 제36대 혜공왕이후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정치적 혼란은 혜공왕 4년 768년에 일어나 대공(大恭)의 난은 3년간 계속되어 전국 96각간이 서로 싸우고 혜공왕 10년 774년에 김양상(金良相)은 정권을 장악하고 실권을 쥐자 김은거(金隱居) 등이 몇 차레에 걸쳐서 왕권의 획복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그 과정에 혜공왕은 피살되고 내물왕 10대손인 김양상(金良相)이 37대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하였다. 선덕왕두에 내물왕 12대손 김경신(金敬信)이 제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했는데 이리하여 무열왕계가 끊어지고 원성왕계가 왕위를 차지하였다. 선덕왕 이후를 신라 하대라고 하고 집사부의 중시 대신에 상대등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시대적 흐름에 대한 반동이 있었다.
제41대 헌덕왕 13년 882년 3월 웅천주도독 김헌창(金憲昌)은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무역왕계의 김주원(金周元)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웅주(熊州, 공주)에서 국호 장안(長安). 연호 경운(慶雲)으로 하고 대규모의 난을 일으켜 한때 무진주(武珍州, 광주), 완산주(完山州, 전주), 청주(菁州, 진주), 사벌주(沙伐州, 상주)등이 호응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헌덕왕 16년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이 다시 한산(한산, 서울)에 도움을 정하고 반란을 계속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전제왕권을 타도한 귀족간에도 상호항쟁과 대립이 일어났다. 경덕왕 16년 757년 녹읍(祿邑) 부활에 성공한 귀족들은 정치력의 증대를 목적으로 문객(門客)을 모으고 사병(私兵)을 모집하고 지기 소유의 노동(奴僮)이나 유민(流民)을 모집하여 무장하여 왕위계승전을 전개하였다.
처음 제42대 흥덕왕(興德王)의 4촌동생 균정(均貞)이 궁에 들어 가서 와이 되었으나 균정의 조카인 제륭(悌隆)이 실력으로 균정을 내쫓고 836년 제43대 희강왕(僖康王)이 되었다. 2년뒤 868년 희강왕도 죽음을 당하고 6촌형제인 김명(金明)이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이 되었다. 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은 839년 청해진 대사 장보고(張保皐)의 군대 5000명을 빌려 민애왕을 축출하고 왕이 되니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이다. 이후 장보고는 문성왕에게 딸을 왕비로 보내려다 실패하자 문성왕 8년 846년 난을 일으켰으나 중앙귀족이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피살되고 문성왕 13년 851년 청해진도 폐쇄되었다.
사건 | 내용 |
대공(大恭)의 난. 36대 혜공왕 4년 768년) | 수도 및 5道 주군(州郡)의 전국 96명 각간(角干)이 서로 싸워 김대공이 피살되고 대란으로 확대되어 3년간 계속되었다. |
김지정반란(36대 혜공왕 16년 780년)과 37대 선덕왕 즉위 |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이찬 김경신(金敬信)이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혜공왕이 살해되어 김양상이 내물마립간 10대손으로서 37대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하였다. |
38대 원성왕(785년) 즉위 | 내물마립간 12대손 김경신이 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하였다. |
39대 소성왕(昭聖王) | |
40대 애장왕(哀莊王) | |
42대 헌덕왕(憲德王) | 김헌창(金憲昌)의 난(헌덕왕 14년 822년)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김주원(金周元)의 아들로서 웅주(공주)를 근거로 국호 장안(長安), 연호 경운(慶雲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겼으나 실패하였다. 범문(梵文)의 난(헌덕왕 17년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한산(서울)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
42대 흥덕왕(興德王) | |
43대 희강왕(僖康王, 836~838년) | 흥덕왕의 사후 4촌동생 균정(均貞)과 조카 제륭(悌隆)이 싸워 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 |
4대 민애왕(閔哀王, 838~839년) | 6촌 김명(金明)이 희강왕을 죽이고 민애왕으로 즉위 |
45대 신무왕(神武王, 839~839년) | 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이 민애왕을 축출하고 신무왕으로 즉위 |
46대 문성왕(文聖王) | 8년 846년 장보고난(張保皐難) |
47대 헌안왕(憲安王) | |
48대 경문왕(景文王) | |
49대 헌강왕(憲康王) | |
50대 정강왕(定康王) | |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나. 골품제도의 붕괴
성골은 통일전에 없어졌으며 통일 이후 1~3품이 소멸하고 4두품도 거의 평민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했다.
2. 6두품과 호족 세력의 성장
가. 6두품 세력의 대두
⑴ 학문적 식견에 의한 정계 진출
6두품(得難, 득난)은 중대에는 행정 실무를 담당하고 왕권을 뒷받침했으나 진골 중심의 골품제도와 이를 옹호하는 불교에 대항하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 6두품은 신분적 제약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학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학문적 식견에 의하여 정치적 참여의 길을 밟게 되었다. 임나출신의 6두품으로 외교문서의 작성에 공이 크고 불교를 세외교(世外敎)라고 비판하고 도덕을 사회적 출세보다 더 중요시한 강수(强首)와 원효(元曉)의 아들로서 6두품으로써 구결(口訣)로써 경서를 읽는 법을 만들고 풍왕서(諷王書, 花王戒(화왕계). 花王 : 모란, 白頭翁(할미꽃, 장부): 충신, 장미 : 간신)에서 국왕도 향락을 배격하고 도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설총(薛聰)과 같이 왕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유학자를 비롯하여 원성왕의 꿈해몽을 잘 해준 여삼(餘三), 상대등 충공(忠恭)의 인사고민을 적절한 충고로 풀어준 녹진(祿眞),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린 최치원(崔致遠), 후백제에서 벼슬을 한 최승우(崔承祐), 고려 왕건의 신하가 된 최인연(崔仁渷, 崔彦撝)이 모두 6두품 출신이었다.
⑵ 신라의 골품제도 비판
6두품은 신라의 골품제도를 비판하고 반신라적 경향도 띄었다. 도당유학생(宿衛學生)으로서 김운경(金雲卿)은 도당유학생으로서 헌덕왕 13년 821년 최초로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우감문위수부병조참군(右監門衛率府兵曹參軍)・연주도독부사마(渷州都督府司馬)를 지냈다. 최치원(崔致遠)의 10여조의 시무책에는 과거제도에 의한 인재등용을 주장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외에도 최승우(崔承祐)는 후백제에서 벼슬을 하고 최인연(崔仁渷, 崔彦撝, 최언위)는 고려의 신하가 되었다.
나. 호족의 대두
⑴ 해상무역의 발달과 해외에의 관심
골품제에 중앙정치의 참여의 길이 막히자 지방세력들은 해외로 눈을 돌려 해상무역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조공(朝貢) 형식의 공무역외 당과 일본, 대만에 민간무역을 하게 되었다. 중국 산동반도나 대운하, 회수유역에 신란인의 거류지인 신라방(新羅坊), 거류민 관할 행정기관인 신라소(新羅所), 거류민의 안전을 기원하는 사원(寺院)이 세워졌고 사원중에는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이 가장 유명하였다.
해상무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사람은 청해진(靑海鎭, 완도)의 장보고(張保皐)였으며 그 외에도 강주(康州, 진주)의 왕봉규(王逢圭), 송악(松岳, 개성)의 작제건(作帝建, 왕건의 조부) 등이 있었다.
⑵ 군진세력의 대두
북진(北鎭, 삼척), 패강진(浿江鎭, 平山) 등 신라의 군진은 변경수비를 위해 육지에 설치했다. 그러나 해상에서 해적들의 활동이 심해지자 청해진(靑海鎭, 완도), 당성진(唐城鎭, 남양), 혈구진(穴口鎭, 강화) 등과 같이 해안요지에도 차례로 군진을 설치하게 되었고 가장 유명한 것이 패강진(浿江鎭)과 청해진(靑海鎭)이다.
북진(北鎭, 삼척)은 태종무열왕 5년 658년, 패강진(浿江鎭, 平山)은 선덕왕 3년 782년, 패강진(浿江鎭)은 선덕왕 3년 782년에 세워진 것으로 예성강(禮成江) 이북과 대동강(大同江) 이남을 광범한 지역을 담당하는 군진이었다. 청해진(靑海鎭)은 흥덕왕 3년 828년에 장보고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당성진(唐城鎭, 남양)은 흥덕왕 4년 829년, 혈구진(穴口鎭, 강화)은 문성왕 6년 844년에 설치되었다.
장보고(張保皐, 弓福, 弓巴)
제42대 흥덕왕 3년 828년 장보고의 청에 따라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淸海鎭, 莞島, 828~851)을 설치하였다. 당에 가서 군인으로 출세하여 해적이 성행하여 신라인을 잡아다가 노비를 매매하는 일에 분개한 그는 본국에 돌아와서 흥덕왕에게 청하여 남해의 요해지인 완도에 청해진을 두고 청해진 대사에 임명되어 사병적 성격의 1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해안지대를 경비하여 해적을 제압하고 당 및 일본과도 활발히 무역을 하여 황해의 해상왕이 되었다.
해상왕 외에도 중앙정치에도 간여하여 김우징(金祐徵)을 도와 44대 민애왕(閔哀王)을 축출하고 45대 신무왕(神武王)에 오르게 하였다. 46대 문성왕(文聖王) 5년 846년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는 문제를 계기로 하여 중앙귀족이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암살되고 문성왕 13년 851년 청해진은 폐지되고 그 군대 1만명은 벽골군으로 옮겨 재생이 억제되었다.
⑶ 성주의 자립
지방의 호족이나 진골, 성골, 6두품 출신의 몰락한 중앙귀족, 촌주들은 일정한 지역에 성을 쌓고 성주 또는 장군으로서 칭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군현의 장관을 대신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지방민에게 조세(租稅)와 역역(力役)을 부과하고 농법도 전하면서 촌락민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되어 신라의 중앙정부의 경제력을 잠식하고 있었다.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 약화를 틈탄 지방 호족들이 독자적 세력 형성하고 중앙 정부에 항거하기에 이르렀다.
3. 농민 봉기와 후삼국의 성립
가. 농민의 봉기
지방 성주들의 지방민에게 조세(租稅)와 역역(力役) 부과로 중앙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중앙정부는 주・군에 대하여 조세를 독촉항기에 이르렀고 중앙정부와 지방성주들로부터 이중으로 부담을 지게되어 농민들은 반란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농민반란은 정치의 부패, 지배층의 불법적인 농토 확대, 가혹한 수탈, 부패․무능한 신라 왕실에 대한 불만 고조의 결과로서 반란의 첫 봉화는 진성여왕 3년 889년 사벌주(沙伐州, 상주)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였고 이어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사벌주(沙伐州, 상주)의 원종(元宗)・애노(哀奴)의 난 진성여왕 3년 889년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
죽주(竹州, 안성 죽산)의 기훤(箕萱)
완산주(完山主, 전주)의 견훤(甄萱)
철원의 양길의 부하 궁예(弓裔)
궁예(弓裔)는 891년 죽주(竹州, 죽산)에 웅거한 기훤(箕萱) 밑으로 들어가 892년 양길에게 의탁하여 899년(효공왕 3년) 국원(國原, 충주)을 비롯한 30여 성(城)의 강병(强兵)을 이끈 양길과 회전에서 선제공격으로 양길을 제압하여 이후 충청도 지역은 대부분 궁예의 세력권이 되었고 901년 창업.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궁예의 아버지가 신라 제47대 왕 헌안왕(재위 857~860년) 또는 제48대 왕 경문왕(861~875년)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나. 후삼국의 성립
⑴ 후백제(後百濟)의 건국(900)
견훤(甄萱, 867~936)은 진성여왕 3년 889년 무진주 점령하고 진성여왕 6년 892년 왕을 자칭했으며 효공왕 4년 900년 완산주(전주) 점령하고 자신이 거느린 군사와 전라도 지역의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全州)에서 후백제를 세웠다. 견훤은 군인세력을 배경으로 호족세력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워서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부분 지역 차지하고 있었다. 견훤은 미륵신앙에 근거한 전제군로서 행세하였다.
⑵ 후고구려(後高句麗)의 건국(901)
일찍이 기훤(箕萱)에 투신한 궁예(弓裔)는 뒤에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가 다시 양길을 타도하고 고구려 부흥을 기치로 효공왕 5년 901년 송악에서 후고구려국을 건설하였다. 이후 국호를 904년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 성책(聖冊)으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고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라고 하면서 반신라 정책 강화와 통일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평성, 대룡부, 수춘부 등 관부를 두고 정광을 비롯한 9관등을 설정하여 국가면모를 갖추었다.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아들은 보살(菩薩)이라 하면서 폭군행세를 하다가 신하들에게서 내쫒겨났다.
⑶ 신라의 위축
신라는 후3국의 정립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제2절 남북국 시대의 경제
Ⅰ. 통일신라의 경제정책
1. 수취제도
가. 조세
1/10세를 수취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였다.
나. 공물
특산물(삼베, 명주실, 과실류 등)
다. 역
16~60세까지 군역(軍役)과 요역(徭役, 繇役, 賦役)을 담당하였다.
2. 토지제도
가. 녹읍(祿邑), 식읍(食邑)
귀족은 자신의 녹읍에 가신을 보내 수취했으며 지방관이 이를 감독했다.
나. 녹읍(祿邑)의 혁파와 부활
관료전 지급(신문왕 7년 687년) | 신문왕 7년 687년 5월 고나료전을 지급하되 차등을 두었다. |
녹읍 폐지(신문왕 9년 689년) | 신문왕 9년 689년 1월 내외관의 녹읍을 폐지하고 매년 세조(歲租)로서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
정전 지급(성덕왕 21년 722년) | 성덕왕 21년 722년 8월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
녹읍 부활(경덕왕 16년 757년) | 경덕왕 16년 757년 3워 내외 월봉(관료전과 세조)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지급하였다. |
국학생 녹읍 지급(소성왕 원년 799년) | 소성왕 원년 799년년 3월 청주 거노현을 학생들의 녹읍으로 삼았다. |
다. 정전의 지급
왕토사상에 따라 성덕왕 21년 722년 8월 처음으로 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고 조를 바치게 하였다. 신라 민정문서에 등장하는 연수유답(烟受有畓)은 정전으로 보인다.
3. 민정문서
가. 발견
1933년 일본 도다이사(東大寺) 쇼소인(正倉院0에서 유물 정리 도중에 제35대 경덕왕 14년 755년 또는 제41대 헌덕왕 4년 815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서원경(西原京, 청주) 및 그 부근 4개 촌의 장적이 발견되었다.
나. 내용
⑴ 작성
3년마다 작성한 것으로 보이며 변동사항을 기록하였다.
⑶ 내용
촌의 호수, 인구수, 우마수, 토지면적, 뽕나무(桑)・잣나무(柏)・호두나무(楸)의 수, 호구, 우마의 감소 등이 기입되어 있다.
인구는 연령에 의하여 정(丁, 丁女), 조자(助자, 助女子), 추자(追子, 追女子), 소자(小子, 小女子), 제공(除公, 除母), 노공(老公, 老母)의 6등급으로 나뉘어 있었고 공연(孔烟, 戶)은 상상호(上上戶)에서 하하호(下下戶)까지 9등급으로 나누었다. 공연의 정(丁)의 수를 합계하여 일년마다 1계연(一計烟)으로 계산하여 촌에서 역역을 징수할 정수를 파악하였다(최근에는 공연의 9등급은 종아 수가 아니라 재산의 정도에 있었다는 새로운 설이 제기되었다). 촌에는 관모답・전, 내시령답, 마전 등이 할당되어서 촌민이 경작하였다.
토지 | 내용 |
관모답・전(官謨畓・田) | 국가의 수입 |
내시령답(內視令畓) | 내시령(內視令)의 수입 |
마전(麻田) | 국가의 수입 |
촌주위답(村主位畓) | 촌주의 수입 |
연수유답(烟受有畓) | 농민의 수입 |
신라에는 촌만이 아니라 향, 부곡도 존재했다. 군・현・촌이 양민 거주지역이고 향・부곡은 천민 거주지로 생각했으나 향・부곡도 군・현・촌주민과 같이 인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Ⅱ. 통일신라의 경제활동
1. 통일이후의 경제성장
가. 서시(西市)와 남시(男市) 설치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경주의 인구 증가로 기존의 시사(市肆, 소지마립간 12년 490년)과 동시전(東市廛. 지증왕 10년 509년)만으로는 상품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32대 4년 695년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했다.
나. 수공업
각 물품마다 생산을 관리하는 행정부서거 있었고 왕궁내에 설치한 공장에서 장인과 노비를 통해 공급했다.
2. 대외통상
가. 당
조공형태의 공무역과 사절단이나 사신들에 의한 사무역이 있었다. 통일 이후 문물교류의 확대와 더불어 점차 활발해졌다. 당이 혼란기에 접어 들면서 사무역이 공무역을 압도했고 산동반도, 강소성 등지에 신라방(新羅坊. 신라촌(新羅村, 신라인 거주지), 신라소(新羅所, 관청), 신라관(新羅館, 여관), 신라원(新羅院, 절) 등이 설치되었다. 장보고가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이 유명했다,
나. 일본
처음에는 적대관계에서 무역이 성행하지 못했으나 8세기 이후 교류가 활발해졌다.
다. 아라비아(大食國)
울산에 까지 와서 무역을 하였다. 주로 양탄자, 유리그릇, 향신료 등 귀족의 사치품이 애용되었다.
라. 장보고의 활동
장보고(張保皐, 張弓福, 張弓巴)는 42대 흥덕왕(興德王) 3년 828년 완도에 해군기지 및 무역기지로서 청해진(靑海鎭)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고 일본과 당과 국제통상을 전개하였다. 장보고는 청해진대사, 감의군사, 진해장군으로서 김우징(金祐徵)을 도와 45대 신무왕(神武王)으로 즉위하게 하여 중앙정계에 개입하고 딸을 문성왕비로 보내려다 귀족의 반대에 직면하여 46대 문성왕(文聖王) 8년 846년 난을 일으켰으나 염장(閻長)에게 암살되어 청해진은 문성왕 1년 861년 폐지되고 1만 군대는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되어 재생이 억제되었다.
3. 생활 모습
가. 귀족
귀족은 녹읍(祿邑), 식읍(食邑), 사전(賜田), 마거(馬阹, 목마장), 조(租, 곡물)를 통해 농민을 지배했다. 귀족은 서민을 상대로 한 고리대금업도 수입원이었고 금입택(金入宅)이라고 하는 호화주택에서 살았다. 당시 주경(主京) 금성(金城, 경주)에는 178,936호(戶), 1,360방(坊), 55리(里), 35 금입택(金入宅), 4 절유택(節遊宅)이 있었다.
나. 평민
시비술(施肥術)이 발달하지 못해 농업생산력에 한계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을 경우 생산물의 절반을 지주에게 주어야 했다. 전세는 생산량의 1/10 정도였으며 공물(貢物, 삼베, 명주실, 과일류 등 특산물)과 요역(徭役, 繇役, 부역)을 부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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