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배삼익 《조천록》의 내용
1) 일기
배삼익은 사행 출발일인 선조 20년(1587년) 3월 13일부터 9월 13일 복명(復命)하기까지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남겼다. 원본에는 본래 일진(日辰)만 쓰고 날짜를 쓰지 않았으나, 이 번역본에서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날짜와 일진을 병기(倂記)했다. 조선시대 다른 일기처럼 날짜와 일진 다음에 날씨를 표기했으며, 그 뒤에 해당 날짜에 있었던 일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조선 시대 《조천록》과 《연행록》에는 대개 노정의 이수(里數)를 밝혀놓았지만, 배삼익의 사행 일기에는 노정의 이수를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사행 일기와 달리 거쳐 간 곳의 소지명(小地名)까지 자세하게 명기해두었는데, 이는 아마도 뒤에 올 사신단을 위한 참고자료로 제공하기 위한 의도인 듯하다. 즉 사행 길의 노정 이수를 기록한 일기는 매우 많으므로, 굳이 밝히지 않아도 참고할 자료가 많지만, 노정의 작은 지명들을 기록한 일기는 상당히 드문 편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사신 업무를 완수하기 위한 다짐, 사행의 객고(客苦), 고국을 그리는 마음, 노정과 그 주변의 풍경, 사신단을 영접하고 환송하는 조선 관리들과의 만남, 명나라 관리와 문인들과의 교유, 명나라 관리의 횡포, 명승고적 탐방기, 구체적인 사신 업무 등 다양한 일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내용은 기존의 《조천록》에도 예외 없이 등장하므로, 여기에서 따로 예를 들지는 않겠다. 다만 다른 《조천록》에 자주 등장하지 않고, 또 이 사행의 실질을 잘 보여주는 몇 가지 기록을 인용하여 배삼익 사신단의 특징을 드러내고자 한다.
① 역병으로 다수의 사망자 발생
배삼익은 선조 20년(1587) 9월 1일에 압록강을 건너 그동안 자신의 사행 활동을 장계로 조정에 보고했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당초에 일행이 동팔참(東八站)에 있을 때 통사(通事) 및 하인 등 3명이 일시에 병에 걸렸는데, 증세가 마치 역질[癘疫]과 비슷하였고, 오래도록 차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도에 또 3명이 서로 감염되어 고통을 받았습니다. 옥하관에 도착해서도 혹은 5, 6명이, 혹은 7, 8명이 연이어 병석에 눕는 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통사 곽지원(郭之元), 김해(金海), 권후(權詡), 임춘기(林春起) 및 서장관 원사안(元士安)의 노예 풍년(豐年)이 계속 사망하여 지극히 딱하고 참담하였습니다.
《조천록》이나 《연행록》을 흔히 낭만적인 중국 여행기로 인식해온 사람들에게 위의 기록은 당혹감을 안겨준다. 한 차례의 사행 길에서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아닌 역병으로 사행 인원이 무려 5명이나 사망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 바다를 경유하여 사행 길에 나선 사신단 중에서 심한 폭풍우로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는 있었지만, 육로 사행에서 이처럼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당시 사신단은 어명을 받고 사행 업무를 수행해야 했으므로,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일정을 중도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또 사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망자의 시신을 대동할 수 없었으므로, 당시 사망자는 모두 이국 타향에 묻을 수 밖에 없었다. 위의 장계에서 배삼익이 “지극히 딱하고 참담하였습니다.[極爲矜慘.]”라는 말로 당시의 상황을 진술한 바와 같이, 이국 타향에 동료의 시신을 묻고 돌아서는 사신단의 심정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참담함에 젖었을 것이다.
《국역 배삼익 조천록》 p26 ~ 27, 김영문(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