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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수도 : 멕시코시티
종족구성 : 메스티소(60%), 아메리카 원주민(30%), 백인(9%), 기타(1%)
공용어 : 스페인어
종교 : 로마가톨릭교(83%), 개신교(7.9%), 여호와의 증인(1.4%), 몰몬교(0.3%), 무교(4.7%), 기타(2.7%) 등
건국일 : 1810년 9월 16일(선언); 1821년 9월 27일(승인)
국가원수/국무총리 :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대통령 (2012.12.1 취임)
국제전화 : +52
정체 : 연방공화제
통화 : 멕시코 페소(Peso)
기후 : 건조성 기후, 열대성 기후, 온대성 기후
북아메리카 남서단에 있는 나라이다. 마야, 톨테크, 아스텍의 인디오 문명이 발생한 지역으로, 1521년부터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810년 9월 16일 독립 기운이 조성되어 1821년 코르도바 협정에 의해 독립이 성립되었다.
정식명칭은 멕시코 합중국(United Mexican States)이다. 중부아메리카 최대의 연방공화국으로, 국명은 아스텍족의 군신(軍神)인 멕시틀리(Mexictli)에서 유래한다. 북쪽은 미국, 남쪽은 과테말라·벨리즈와 접하고, 서쪽은 태평양, 동쪽은 멕시코만(灣)에 면한다. 북서 태평양 연안에는 본토와 병행해서 1,200km 길이로 돌출한 캘리포니아 반도(半島)가 있고, 남동 대서양 연안에는 북쪽을 향해 유카탄 반도가 멕시코만과 카리브해를 나눈다. 1846년 미국과의 전쟁으로 북부 지역 일부를 잃었고, 1910~1917년 혁명으로 봉건주의가 무너졌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출범과 함께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다 미국의 긴급 지원에 힘입어 회복세로 돌아서는 등 대미 의존도가 높다. 행정구역은 31개 주(estado)와 1개 연방 구(distrito federal)로 이루어져 있다.
멕시코 역사
멕시코에는 1521년 에스파냐인(人)에게 정복되기 훨씬 이전부터 원주민 인디언에 의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미 BC 2000년 경 옥수수 농사를 기반으로 한 촌락이 각지에 발달하였으며, 기원 전후에 이르러서는 멕시코 중앙고원의 테오티우아칸에 태양과 달의 거대한 피라미드가 구축되었고, 이것을 중심으로 도시가 건설되었다. 한편 남쪽에서는 멕시코만(灣) 기슭부터 오악사카계곡(溪谷)에 걸친 일대에 몬테알반의 사포텍문명, 유카탄반도에 마야문명이 꽃피고 있었고, 900년 경에는 군국주의적인 국가가 성립되었다.
멕시코 중앙고원의 톨텍, 마야에 뒤이은 치첸이차, 욱스말 등의 후기 고전문명이 융성하였으며, 멕시코분지 일대에서는 아스텍제국(帝國)이 일어나 1325~1521년까지 약 200년간 테스코코호(湖) 주변을 도읍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521년 8월 에스파냐 탐험대의 장군 코르테스에게 정복된 후 300년 동안, 에스파냐의 ‘누에바에스파냐’로서 에스파냐의 부왕(副王)이 통치한 식민지 시대가 전개되었다. 16세기는 식민과 포교(布敎)의 시기, 17세기는 혼혈화가 진전된 시기, 그리고 18세기는 고유의 혼혈문화를 형성하여 독립의 기운을 북돋운 시기이다.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은 1810년 9월 16일 혁명적 애국자인 미구엘 이달고의 유명한 ‘돌로레스의 부르짖음(Grito de Dolores)’을 계기로 기운이 일기 시작하여, 1821년 멕시코의 독립을 인정한 코르도바 협정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독립 이후 식민지시대가 끝나고 전제정치로부터 공화제로 이행하여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나, 중앙집권주의파와 연방주의파의 대립이 심하여 혼란에 빠졌다. 1846년의 실정(失政)은 미국과의 전쟁을 초래하여, 2년 후에는 영토의 북부를 상실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멕시코 주민
멕시코는 2006년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11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며, 1억 이상의 인구를 가진 인구대국에 포함된다. 또한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는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국토의 14%를 차지하는 중앙고원에는 전 인구의 45%가 거주하는 데 비해, 북부 태평양지역은 국토의 21%를 차지하는데도 거주민은 전 인구의 8%에 불과하다. 전 인구의 약 76%가 도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특히 수도인 멕시코시티에는 약 1,941만 명(2005년)이 거주하고 있어, 일본의 도쿄 대도시권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대도시권이 형성되어 있다.
인구 추계에 따르면 멕시코의 전체 인구는 2025년경에 1억 3천만 명, 2050년 경에는 1억 4천만 명에 도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006년을 기준으로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1.16%이며, 평균수명은 75.4세(남자 72.6세, 여자 78.3세)이고, 15세 미만 인구의 비중이 30.6%에 달해 피라미드형 인구구조를 보인다. 조출생률과 조사망률은 각각 인구 1,000명당 20.7명과 4.7명이고, 합계출산율은 2.4명이다.
주민은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족인 메스티소가 60%, 인디언이 30%, 에스파냐계(系) 백인이 9%이고, 그밖에 물라토, 삼보 등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다. 에스파냐어(語)가 국어이지만 인디언들은 아직 나우아틀·마야, 아스테카, 사포테카 등 그들 고유의 언어를 일상어로 사용한다. 전국민의 89%가 에스파냐 통치시대에 보급된 로마가톨릭교를 신봉하며 나머지는 기독교, 샤머니즘 등을 신봉한다.
멕시코인의 신앙
멕시코 시티의 상징은 소칼로에 있는 가톨릭 대성당이다. 모든 구역마다 성당이 있고, 하나 둘이 아니고 여러 개 있는 구역도 많다. 일요일이면 이 모든 교회에서 적어도 하루에 세 차례 이상 미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기는 하나 성당을 다니지는 않는다고 한다.
멕시코 시티가 아직 호수였을 때에는 테노치티틀란과 텍스코 호수가 나뉘어져 있었다. 두 곳을 육지로 연결하는 부분이 바로 틀랄텔롤코(Tlatelolco)였다. 여기서 가장 뚜렷이 보이는 곳이 작은 언덕인 테페약(Tepeyac)이었다. 이 곳에는 대지의 여신인 토난친(Tonantzin)의 신전이 있었다. 토난친은 대지의 여신이며, 생명과 죽음의 신이었고, 아버지 신인 토타흐친(Totahtzin)도 함께 표현되는 신으로, 아스테카 종교의 통합적인 존재로 볼 수 있다. 에스파냐가 아스테카를 정복하자 이 신전은 즉각적으로 허물어졌다.
대신에 그들은 가톨릭의 신을 믿어야만 했다. 신부들에게 인신공양을 매일매일 하는 원주민들이 악마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에스파냐의 아스테카 정복의 표면적인 또 다른 목적은 가톨릭 복음의 전파였다. 그러나 뿌리 깊은 원주민의 종교관에 새로운 신을 심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정복자들은 우선 원주민 지배 계층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개종을 하면 지방의 지배자들이 누리던 권력과 부를 인정해주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이미 300년 가까이 내려오는 순환철학과 희생의식을 없애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복음화를 정복의 명분으로 세운 에스파냐로서는 어찌되었던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멕시코시티 [Mexico City ]
정식 명칭은 시우다드데메히코(Ciudad de Mexico)이다. 에스파냐어(語)로는 메히코라고 한다. 멕시코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멕시코고원 중앙부의 해발고도 2,240m에 있는 고지(高地)도시이다. 동쪽 교외에 테스코코호(湖)가 접하고, 남동쪽에는 포포카테페틀산(5,451m)·이스타시와틀산(5,286m)의 두 화산이, 서쪽에는 톨루카 화산(4,577m)이 솟아 있다.
열대에 위치하나 고지에 있기 때문에 월평균기온은 최고인 5월에도 17.4℃, 최저인 1월은 12.1℃, 연평균기온은 15.1℃이다. 연교차는 작으나 일교차가 커서 하루 중에 4계절이 있다고 할 정도이다. 연강수량은 726mm로 5∼9월이 우기, 10∼4월이 건기이다. 고원의 경작지와 목장, 계곡과 산록의 삼림에 둘러싸여, 열대 고원도시로서는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멕시코고원은 옛날부터 집단거주지로 이용되어 왔다.
거대한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로 알려진 테오티우아칸 문화가 7세기 중엽에 붕괴하자, 톨텍·아스텍 두 문명이 잇따라 테스코코 호반에 자리잡았다. 아스텍족(族)이 건설한 테노치티틀란은 ‘신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으로 인구 20만∼30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도시였다.
고대 도시 테오티우아칸이 폐허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멕시코시티 지역에 새로운 나라, 아스텍 제국이 세워졌다. 그리고 테노치티틀란과 틀라텔롤코 등의 도시가 들어섰다.
아스텍 제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은 부족의 지도자 테노치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테노치티틀란이 도시로서 틀을 갖춘 시기는 1324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은 아스텍 사람들이 남긴 그림을 통해서 밝혀졌다.
테노치티틀란이 세워질 당시의 자연환경은 지금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오늘날 멕시코시티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지만 당시에는 드넓은 호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호수의 크고 작은 섬에 도시를 건설했다. 테노치티틀란과 버금가는 도시 틀라텔롤코 역시 섬이었다.
아스텍 제국이 수도를 섬에 건설한 이유는 적의 침입을 쉽게 방어하기 위해서이며 도시를 건설한 아스텍 사람들은 주요 섬과 육지 사이에 둑길을 만든 다음 출입구를 단 세 곳만 만들었다. 이 역시 적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었다.
테노치티틀란을 중심으로 발전한 아스텍 제국은 에스파냐의 침략으로 멸망하기 전까지 약 200년 동안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수도인 테노치티틀란과 틀라텔롤코에 살았던 사람만도 20만 명이 넘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보다 많은 식량이 필요하게 되자 사람들은 호숫가에 갈대와 나무를 엮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흙을 채워 작은 농토들을 만들었으며,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호수는 차츰 육지로 바뀌었다. 현재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멕시코시티는 호수에 흙을 채워서 건설한 일종의 매립지이다.
1521년 에스파냐 장군 코르테스의 정복으로 이 도시는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고, 그 위에 에스파냐에 의해 멕시코시티가 건설되었다. 식민지 시대의 멕시코시티는 중세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아니라, 소칼로 광장을 중심으로 가로가 동서남북으로 정연하게 구획되고 광장과 공원이 배치된 근대적인 시가였는데, 이곳은 누에바 에스파냐(새로운 에스파냐)로서 에스파냐에 의해 통치되었다.
17세기가 되면서 남부의 푸에블라에서 만들어진 다채색 타일을 이용한 건물이 증가하고 인디언의 거주도 허락되었다. 시민은 정복자인 에스파냐인(人), 원주민인 인디언, 이들의 혼혈인 메스티소, 그리고 신대륙 태생의 에스파냐인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시내는 바로크식 건축이 늘고 18세기에는 에스파냐의 신고전주의가 도입되어 궁전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독립 이후 1917년에 헌법이 공포되어 일단 혁명의 목적이 달성되자,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예술 운동이 건축물에 반영되었다. 북부는 공업지역, 남부는 새 단지, 서부는 고급주택지이다. 남북으로 뻗은 인수르헨테스 대로는 남부의 개발을 촉진하여, 단지 외에 국립자치대학이 설립되어 있다.
근대 건축이 발전한 레포르마 대로에는 고급상점·영화관·각국 대사관·호텔 등이 넓은 가로의 양쪽을 메우고, 중심부인 알라메다·소칼로 주변에는 오래된 건물이 많다.
이 밖에 남부에는 코요아칸 교회, 수도원, 소치밀코의 수향(水鄕) 지대가 있어 주말을 즐기는 가족들로 붐빈다. 동부에는 국제공항이 있고, 이스타팔라파에는 아스텍 시대의 생활양식이 남아 있다. 서부의 일각, 차풀테펙 언덕에는 멕시코의 전망대 역할을 하는 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별장지이기도 하였다. 현재는 멕시코가 자랑하는 국립인류학박물관(1964년 준공)이 자리잡고 있다.
남쪽 15km의 지점에서는 피라미드가 용암 밑에서 발굴되었고, 45km 북쪽에는 아스텍 이전의 주민에 의해 건설된 도시의 유적이 있다. 이러한 특유한 역사와 풍물, 주위의 웅대한 경관은 편리한 교통과 더불어 멕시코시티를 관광도시로 크게 부각시켜,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 공업도시는 아니나, 모·면방적과 직물·제지·식품·도자기·은기·은세공 등 경공업 및 공예가 성하다.
시내에는 환상(環狀)도로가 2중으로 둘러 있고 지하철도 완비되어 있으며, 멕시코만(灣)에 면한 베라크루스를 외항으로 하여 그 사이 320km는 철도·도로 등이 정비되어 있다. 1950~1970년대에 급격한 인구 증가를 겪었다. 1968년 10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최초로 제19회 올림픽대회가 열렸다.
주교좌 성당
전쟁에서 승리한 에스파냐 사람들은 테노치티틀란과 틀라텔롤코를 하나둘씩 파괴했습니다. 거대한 아스텍 제국의 흔적들은 폐허가 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답니다. 에스파냐 침략자들은 아스텍 제국의 신전과 궁전을 파괴하고 그 위에 식민지를 다스릴 행정 기관과 사법 기관 등을 세웠다.
가장 먼저 건설한 것은 헌법 광장이었다. 헌법 광장은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드넓은 광장이며 에스파냐 사람들이 세운 주요 건축물은 헌법 광장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자리하고 있다.
코르테스는 아스텍 제국의 궁전을 부수고 그 위에 자신이 머물 궁전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헌법 광장 동쪽에 세워진 웅장한 국립 궁전이다. 코르테스가 에스파냐로 돌아간 후에는 에스파냐 국왕을 대신한 부왕 멘토사가 집무실로 사용했다.
이후 국립 궁전은 170년 동안 에스파냐의 권력자들이 머물렀던 식민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국립 궁전은 1692년에 화재로 사라진 것을 새롭게 지은 것이다.
국립 궁전 북쪽에는 에스파냐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최초로 세운 종교 건축물인 주교좌 대성당이 있다. 총 14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대성당은 공사를 시작한 지 약 250년이 지난 19세기 초반에 완공되었다. 건축 기간이 길어서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등 여러 양식이 섞여 있지만 전체적인 균형이 매우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성당은 아즈텍 원주민들의 신전을 허물고 연못을 매립하여 만든 성당이다.
대성당 옆에는 1768년에 완공된 사그라리오 성당이 있다. 섬세한 조각이 돋보이는 사그라리오 성당은 멕시코에서만 볼 수 있는 멕시코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성당 마당에는 지하 신전터를 볼 수 있게 유리판을 얹어 놓았다.
과달루페 성당
과달루페 성모님
1. 발현 사건
1531년 12월 9일 이른 아침, 이제 막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통해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된 후안 디에고(Juan Diego)는 아침 미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에서 수 킬로 떨어진 수도회 성당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후안 디에고(이후 후안)가 테페약(Tepeyac)언덕(현재 수도인 멕시코시티)의 고개 길을 넘어가고 있을 때, 성모님께서 그의 앞에 나타나셨다. 찬란한 빛이 무릎 위를 비추고 있었으며 천상의 음악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부인' 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 부인은 후안의 이름을 부르며 후안이 사용하던 인디언 언어인 나후탈(Nahuatl)어로 말하였다.
“잘 들어라. 나는 하늘과 땅의 참된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동정 성모 마리아이다. 너는 나의 작은 아들이다. 나는 이곳(테페약 산)에 성당을 세우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성당에서 나의 사랑, 나의 자비 나의 도움과 보호를 모두에게 베풀겠다.”
“나의 아들아, 나는 평생 동정녀이며, 아니 계신 곳이 없이 곳곳에 계신 천상천하의 주인이시며 만물의 창조주로서 생명의 창조주이신 참 하느님의 어머니로 알려지기를 원한다. 또 나는 너와 네 모든 민족에게 자애로운 내 사랑을 베풀어주며, 나에게 정성을 다하며 어려울 때에 나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나의 따뜻한 동정심을 보여 줄 수 있도록 이 자리에 성당을 짓기를 바란다. 그러니 주교를 찾아가 내가 너에게 말한 바를 주교에게 알려라. 이 자리에 나를 공경하기 위한 성당을 짓기를 원하는 나의 소망을 전하여라.”
후안은 성모님과의 만남이 한편 놀라왔지만, 성모님으로 부터 받은 메시지를 당시 이 지역의 주교였던 주마라가(Zumarraga) 주교에게 찾아가 그대로 전했다. 주마라가 주교는 인디언인 그의 말을 모두 듣기는 하였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후안은 주교관을 나오며 주교가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교의 반응에 실망한 후안은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던 언덕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자 성모님이 그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후안은 성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지극히 사랑하올 여왕이시며, 존귀하올 부인이시여, 당신이 명하신 대로 모두 전했습니다. 하지만 주교는 저를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교는 저에게 돌아가 있으면 시간을 갖고 이 문제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검토해 볼 수 있도록 하자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교는 성모님께서 성당을 짓기를 원하신 다는 것이 제가 꾸며낸 말이거나 환상에 의한 것이며,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 청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좀 더 고귀하고 훌륭한 사람을 보내셔야겠습니다. 저는 너무나 천하고 가난한 촌사람이며 이런 일에 합당한 자가 아닙니다. 여왕이신 성모님, 저의 경솔함과 거칠음을 용서하십시오. 만일 어떤 면에서 제가 성모님의 위대함에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저는 저의 잘못으로 성모님께 실망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성모님께 호소 하였다. 하지만 성모님은 당신의 대리자로 다른 누구보다 후안이 적임자라고 설명하시며 내일 다시 주교에게 찾아가도록 후안을 설득하셨다.
다음 날, 후안은 다시 주교 앞에서 성모님의 메세지를 그대로 전하였다. 주마라가 주교는 후안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 나서 "그럼 너의 말이 모두 사실이고 성모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면 그것에 대한 증거로 어떤 증표를 가져 오라"고 하자, 후안은 앞 뒤 생각해보지 않은 채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주교관을 나왔다.
한편 후안이 떠나자 갑자기 의심이든 주마라가 주교는 하인 두 명을 시켜 후안의 뒤를 따라가도록 하였다. 하지만 테페약 언덕에 이르렀을 때 그들의 시야에서 더 이상 후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성모님께서 안개를 풀어 그들로부터 후안을 가려 주신 것이다. 후안을 놓친 두 하인은 주교에게 돌아가 그가 자신들에게 속임수를 썼다고 불평을 터트리며 그를 모함하였다.
한편 성모님은 후안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그의 마음을 이미 읽으시고, 주교에게 보일 징표는 다음 날 아침에 주겠노라며 말씀하셨다. 후안은 성모님의 말씀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간 후안은 자신의 삼촌인 후안 베르난디노(Juan Bernardino)를 찾아갔다. 그의 삼촌은 오래도록 병을 앓고 있었고 그런 그를 후안이 돌보고 있었다. 후안의 삼촌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기에, 후안에게 다음 날까지 신부님을 모시고 와서 자신에게 병자성사를 받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12월 12일 아침, 후안은 성모님과의 약속을 떠 올렸지만 삼촌의 상태가 더 위중하다는 생각이 들어 병자성사를 해 주실 신부님을 모시러 집을 나섰다. 후안은 테페약 언덕에 이르자 그 길에서 성모님을 만나게 되면 제 시간에 신부님을 못 모시고 가게 될까 봐 걱정이 들어 다른 길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모님이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나셨고 당황한 후안은 성모님께 자신의 삼촌이 위급하니 지금 신부님을 모시러 가게 해 달라고 간청 하였다.
그러자 성모님께서는 “나의 아들아, 지금은 나의 말을 들어라. 걱정하지 말고 다른 일로 조금도 마음이 혼란해지지 않도록 하여라. 병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말고 또 다른 어떤 슬픈 일이 일어날까, 어떤 고통이 생길 까 두려워 말아라. 왜? 너는 나의 그늘 밑에, 내 보호 아래 있으려 하지 않느냐? 내가 생명과 건강이 되어 주지 않느냐? 걱정하지 마라. 네 삼촌의 병도 걱정하지 마라. 네 삼촌은 지금의 병으로 죽지 않을 것이며, 그의 건강은 회복되고 있다 (후에 후안의 삼촌의 병이 성모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완쾌되었음을 확인함) 하시며 그를 위로해 주셨다.
성모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지금 바로 저 언덕 위로 올라가거라. 너는 거기에서 장미꽃이 만발하게 피어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너의 틸마(망토) 위에 담을 수 있는 대로 장미를 모아 가지고 내게로 가지고 오너라.”
그 언덕은 메마르고 돌무더기와 가시 돋친 선인장만 무성한 곳이었기에, 후안은 성모님의 말씀에 의아했지만 시키는 대로 바위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 곳엔 이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장미꽃들이 후안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후안은 성모님의 지시대로 자신의 망토를 벗어 그 위에 장미꽃을 한 가득 담아 성모님께 돌아왔다. 성모님은 후안이 꺽어온 꽃들을 가지런히 옷자락에 놓아주시고는 주교에게 가지고 가라고 말씀을 하셨다. 성모님으로 부터 증표를 얻은 후안은 기쁨에 겨워 망토를 감싸 안고 주교관으로 달려갔다.
한편 주마라가 주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성모님께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무엇인가 가슴에 가득 안고 뛰어 들어온 후안이 자신 앞에 다가와서 들고 온 틸마의 장미꽃들을 마루 위에 쏟아 부었다. 주교는 후안이 멕시코 지방에서 볼 수 없는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주교의 고향)에서 나는 특별한 장미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장미를 담아온 후안의 틸마(망토)에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로 그의 망토에 성모님의 모습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멕시코에는 인쇄 기술이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더 더욱 신기한 것은 후안의 망토는 선인장 풀에서 뽑아낸 실로 짠 것이어서 섬세하게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없을 정도로 표면이 거칠다고 한다).
틸마에 박힌 성모님의 모습을 본 주교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천상의 선물에 감사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올렸다.
한편 성모님의 치유로 건강을 회복한 후안의 삼촌은 성모님의 방문을 받았다. 성모님께서는 "나는 과달루페의 성모라고 불리기를 원한다."라고 하시며 후안의 삼촌에게 메시지를 주셨다. 이 명칭은 아즈텍 인디언 말인 나후탈어 전하여 진 것인데 “뱀의 머리를 짓밟은 분”이라는 뜻이다. 사실 성모님은 인디언들을 위해 뱀을 짓밟으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인디언들은 세 가지 모양의 뱀의 형상과 조각들을 숭배하고 온갖 잡신들을 섬겼으며 그 신들에게 사람을 산 제물로 바치고 있었다.
마침내 테페약 언덕에는 성당이 세워졌고, 디에고의 망토는 그 성당 안에 보관되어 모셔졌다. 이후 순례객들이 찾아오면서 성모님의 과달루페 발현 이후 10년도 안되어 팔백만 명 이상의 원주민들이 가톨릭으로 입교했다. 성모님의 발현사건과 함께 후안의 틸마에 새겨진 성모님의 모습에서 주는 인디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상징적 의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개종했으며 개종의 물결은 멕시코가 속한 북미 외에 , 중미, 남미까지 전 미주 지역으로 확산 되었다.
초기, 정착에 어려움을 겪던 스페인 사람들은 이 후 계속 남아 교회의 가르침을 펼쳐 나갈 수 있었으며, 과달루페 성모님은 멕시코인들에게 정신적 요람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전 미주 대륙의 보호자이며 '천주의 모친'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2. 발현 목격자
성 후안 디에고(St. Juan Diego)는 1474년에 쿠아토아친(인디언 이름으로 '말하는 독수리' 라는 뜻) 이름으로 쿠아우틀리트란(Cuautlitlán,현재 멕시코시티 일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치치메카인으로 아나후악 계곡(Anáhuac Valley)에 모여 살던 문화적으로 진보된 인디언 원주민의 일원이었다.
그는 그의 나이 50살이 되던 해,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초기에 파견한 신부였던 피터 다간드(Peter da Gand) 신부로 부터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된다. 그는 1531년 12월 9일에 현재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 끝자락에 있는 테페약 언덕(Tepeyac Hill)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했다.
발현 이후, 후안 디에고는 주교의 승인으로 성모님의 모습이 담겨진 기적의 망토가 전시되어 있는 성당 근처에 있던 작은 오두막에서 평생을 보냈으며, 교회를 관리하고 틸마에 새겨진 성모님의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수많은 초기 순례객들을 돌보는 일로 생을 마쳤다.
후안 디에고는 1555년에 1차로 멕시코의 두 번째 추기경이었던 알론소 데 몬투발 추기경과 대교구 주교단에 의해 기적 사건이 인정되어 비공식적으로 시복되었고, 2차로 1666년 2월 18일 부터 3월 22일 까지 그리고 다시 1723년 란지에고 이 이퀼라스(Lanziego y Eguilaz ) 추기경의 정식 조사와 연구를 통해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으며, 마침내 2002년 7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3. 대립과 갈등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된 후, 1519년 7월,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차빨라빤 (Itztapalapan)에 도착했다. 1520년 스페인은 무력을 앞세워 멕시코 및 신대륙의 일부를 점령하고 신대륙을 식민지화 시켜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원주민들을 노예화시켰고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원주민들로 부터 많은 반감을 사고 있었다. 1521년 페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가 마딴사 데 똑스까뜰(Matanza de Texcatl)에서 수많은 멕시코 원주민들을 공격하여 살해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에게 극도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반면에 스페인은 원주민을 유화시키고 새 식민지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정책으로 프란치스꼬회 수도회를 파견했다. 당시 스페인에서 선교에 중추적 역할을 하던 후안 데 주마라가(Juan de Zumarraga)주교를 파견하여 신대륙에 교회를 세우는 일을 시작하였다.
주마라가 주교는 아즈텍 인디언들의 수도 중심에 교회를 건설하고 신대륙을 성모님께 봉헌했다. 하지만 스페인이 멕시코를 점령하고 식민지화 하면서 이곳에 거주하던 원주민인 인디언들과 스페인 사람들과의 갈등은 점점 커갔다. 이런 대립 상태가 지속되며 긴장이 고조되자 교회는 자신들이 처한 극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선교와 기도에 매달렸고 그 기도의 응답은 성모님의 발현으로 꼭 10년 만에 테페야크 언덕에서 인디언 원주민을 통해 이루어졌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새 민족이 형성되는 초기에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정착하기 위해 뿌리를 내리던 시점에 일어난 것으로 그 의미가 중요하다. 이 발현 사건은 후안에게 내린 메시지로써 완성되었는데 스페인 사람이 아닌 원주민을 통해 그들을 이해시키고 그들에게 하느님을 알도록 만든 큰 사건이었다.
4. 발현의 의미
1531년 12월 9일 멕시코 과달루페에 성모님께서 처음으로 발현을 하셨다. 포르투칼의 파티마 발현보다 327년 전에, 프랑스 루르드 발현 때 보다 무려 386년 전에 발현하셨다. 과달루페 성모마리아께서는 쿠아우틀리트란(Cuautlitlen) 출신 인디안이었던 후안 디에고에게 나타나셔서 테페약 산에 성당을 지으면, 멕시코 땅의 모든 백성들의 안고 있던 아픔과 불안, 슬픔을 위로해주고 사랑과 자비를 베풀겠다고 메세지를 전하셨다. 이후 성모 마리아께서는 다섯 번이나 후안 디에고와 그의 삼촌에게 발현하셨다.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는 자신의 모습을 후안 디에고의 틸마(인디언 남자들이 어깨 위에 걸쳤던 망토 모양의 선인장 줄기로 짠 모포)에 남겼다. 성화 속 마리아의 모습은 거무스름한 갈색 피부에 인디오식 치마를 입고 있다. 또한 하늘을 상징하는 청록색 망토를 걸치고 있는데, 망토에는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날짜와 별자리를 상징하는 총 46개의 별들이 수 놓아져 있었다. 아즈텍 인디언들은 천체의 별자리를 보고 해석할 수 있을 정도의 천문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틸마에 새겨진 별자리 만 보고도 그 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틸마에 새겨진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의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 성화는 신기하게도 48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 후 멕시코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후안 디에고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인디오들이 세례를 청하였고 많은 병자들이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치유를 얻었다. 특히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는 육체적 치유의 기적보다는 영적 치유의 기적을 많이 일으키셨다. 많은 순례자들이 성모 마리아에게 위로를 받아 삶의 희망을 얻었고 죄인들이 회개했으며, 냉담자들은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 긴 줄을 섰다. 이런 일은 헤아릴 수없이 많았으며, 아직 까지도 치유의 기적이 계속 이뤄지고 있다.
발현사건이 새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멕시코인들의 발현의 의미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과달루페 성모발현은 멕시코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하게 되었고 국가 역사의 중요한 단계마다 성모님은 당신 백성들을 보살펴 주셨다.
과달루페 성모님은 멕시코의 정신적 요람이며 보배다. 이에 관하여 크리스토퍼 렌저 신부는 "후안 디에고의 외투에 기적적으로 새겨진 성상을 보면, 마리아께서는 당신이 임신했음을 보여주는 띠를 두르고 계신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이것을 마리아가 아직 낳지 않은 아들과 함께 그들에게 오셨다는 표시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 틸마가 바로 모든 의미를 보여주는 책으로 생각한다. 선교사들은 성상의 도움으로 믿음의 진리를 가르칠 수 있었고, 원주민들은 교회로 인도하였다."
"성모 마리아가 선택하신 장소인 테페약 언덕은 당시 인디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 이었다. 테페약은 이교신의 모친을 위해 신전을 세웠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성모님이 바라셨던 것은 이교신이 아닌 참 천주의 성전을 그 곳에 세우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그녀가 참 천주의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마리아를 '토난친' 즉 '우리 어머니' 라고 부르는데, 때로는 '천주의 모친' 이란 의미로 '테오토난친'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는 1737년 교황의 정식 승인 이전에 멕시코 주교들에 의해 멕시코시티의 주보성인으로 모셔졌으며, 1754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를 당시의 멕시코(현재 미국 서부 아리조나 주 부터 중미의 코스타리카까지)의 주보성인으로 승인했다. 1910년에는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남미 주보성인으로 또한 교황 비오 11세는 1935년 신자들의 요청에 따라 필리핀의 주보성인으로 선언했다.
5. 현재의 상황
오늘날 과달루페 성모발현 장소는 연간 1,000만 명이 순례하는 성지로 사랑받고 있다. 테페약 언덕에는 170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지침에 따라 두 번째로 세운 현대식 대성전이 옛 성전 옆에 나란히 건립됐고 이 후 과달루페 성모님은 멕시코의 수호자로 선포됐다.
과달루페는 모든 멕시코인들의 집이라고 할 정도로 그들은 이곳에서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위하여 전구하시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만나 뵙는다. 많은 멕시코인들은 가능하면 자주 이곳을 순례 한다고 한다. 과달루페에 테페약 언덕에는 세계 각지에서 순례를 온 순례자들을 돌보는 사목 활동도 활발하다.
6.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1월을 기하여 당신의 첫 번째 사목방문을 "믿음의 순례"라고 하시면서 과달루페 성모님의 모성적 보호와 도움을 간구하기 위하여 이곳을 찾으셨다. 그리고 마리아께 새롭고도 완전한 순종을 약속하시고, "나는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고 하면서, 라틴 아메리카 복음화의 장래를 당신의 손에 맡겨 드린다고 말씀하셨다(1979년 1월 25일,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또 과달루페 성모 대성전에 드린 미사 강론에서(1월 27일), 교황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후안 디에고가 당신을 일컬어 '테페약의 사랑스런 부인'이라 부른 이래, 당신은 과달루페의 어머니가 되셨고, 멕시코 주민들을 크리스천 생활로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1979년 1월 28일, 푸에블라에서 개최된 제3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 총회" 개막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들의 이 집회는 멕시코를 비롯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나라가 교회의 어머니로 섬기고 있는 과달루페의 성모님이 영적으로 함께하시는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성모님께서 '복음화의 별'이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을 시작으로 1990년, 1999년, 2002년 등 네 번이나 과달루페 성모성지를 순례했으며, 마지막 순례 때인 2002년 7월 31일에는 발현을 목격한 후안 디에고(1474~1548)를 시성했다.
틸마에 새겨진 성모님의 모습이 주는 상징적 의미들(Symbolism)
세계의 3대 성모 발현지 중 하나인, 멕시코의 과달루페는 프랑스 루드르나, 포르투갈의 파티마 보다 훨씬 이전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 발현사건으로 인하여 변화되었지만 원주민인 인디언들에게 발현하신 점, 유럽에 비해 잘 안 알려진 신대륙에서의 사건, 자료부족 등으로 인해 다른 발현지보다 정보가 적습니다.
틸마에 새겨진 성모님의 모습은 멕시코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 었던 인디오들만이 그림이 주고자하는 의미를 해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모습이 새겨진 후안 디에고의 틸마(망토)는 48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믿기 어려울 만큼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당시 상형문자를 사용하고 모든 것을 그림을 통해 소통했던 인디오들에게 틸마에 새겨진 성모님의 모습은 단순한 그림의 수준을 넘어 하늘에서 주는 완벽한 메세지였기 때문에 그로 인해 수많은 원주민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됩니다.
미국 영화배우 멜깁슨(Mel Gibson)은 영화배우이자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2004년에 영화 "예수의 고난(Passion of Christ)"을 제작하여 화제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의 최근작 인 "어포칼립토(Apocalypto, 2008)"라는 영화를 보면 당시 아즈테카(Azteca)인디언들이 사람들을 자신들의 신에게 산 재물로 바치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나오는데 태양신과 뱀의 신을 숭배했던 아즈테카나 잉카 인디오들은 북미와 중미 그리고 남미에 걸쳐 광활한 지역에 걸쳐 생활하고 있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곤 했습니다.
구라파 지역에서는 이미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분리되는 사건까지 있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은 당시까지도 거의 개척이 되지않은 상태였고 군인들을 앞 세워 황금을 찾아 신대륙에 도착한 유럽인들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원주민들과의 마찰이 많았기에 함께 유럽에서 건너 온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와 신대륙 교회 존립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후안 디에고를 통해 원주민들에게 발현하신 성모님은 오직 인디언들만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발현하시어 북, 중, 남아메리카 전체에 걸쳐 생활하던 인디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계기를 마련하십니다.
후안 디에고의 틸마에 새겨진 성모님의 모습을 세부적으로 관찰해보고 인디언들의 시각적 측면에서 풀이해 보았습니다.
1. 눈
틸마에 새겨진 성모님의 눈은 아래를 보고 있는데 이 모습은 그녀는 신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신보다 더 크신 분임을 겸손의 모습으로 알려주고 있다. 인디언 신들의 눈은 절대 아래를 향하고 있지 않으며 앞만을 바라보고 있다.
2. 얼굴
여인의 얼굴은 큰 동정심을 보이고 있는데 인디언들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내적인 면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행동을 보일지... 등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좋은 여자는 여성스러움이 얼굴에 잘 나타나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성모님의 얼굴은 검은 피부와 검은 머리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으로 인디언들은 그녀가 자신들과 같은 동족이라고 믿었다.
3. 손
그녀의 손은 전통적으로 유럽인들이 기도할 때 보여주던 모습이 아니고 인디언들이 제사 지낼 때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습은 인디언들로 하여금 무엇인가가 앞으로 바쳐질 것이며 그것은 그녀로 부터 올 것임을 뜻하고 있다.
4. 복대
그녀의 허리에 둘러진 복대는 그녀가 임신한 여인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징후는 인디언들에게 그녀는 아직 오지 않은 어떤 분을 곧 출산할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5. 별 문양
그녀가 두른 망토에 새겨진 별들의 모습은 앞으로 새로운 문명이나 시기가 곧 다가올 것이라는 표시로 보여지고 있다. 인디언들은 다른 여러 시대를 거치는 동안 시대의 시작과 끝을 전통적인 방법이나 표징을 통해 예측했는데, 어떤 문명이나 시대가 끝나거나 멸망할 때 반드시 별이나 혜성 등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6. 태양 광선
인디언들에게 태양은 자신들의 문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 태양을 가리우고 오직 태양광선만이 빛나는 이 여인의 모습은 그들에게 이 분은 태양보다 더 위대한 분이심을 말해준다. 여인은 태양을 막고 있지만 그 빛만은 허락하고 있다
7. 망토
망토의 주 색(色)은 터키색인 청록색이다. 이 청록색은 가장 높은 신(神)인 오메시후아달(Omecihuatl)의 색이다. 인디언들은 여러 계급의 신들을 섬겼지만 오메시후아달은 이런 모든 신들위에 군림하는 신중의 신, 최고의 신이였다. 또한 오메시후아달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여성 혹은 남성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화합하게 하는 원천이라고 믿었다.
8. 초승달
여인은 초승달을 밟고 서있다. 이것은 이 여인이 2번째 신, 밤의 신(神)인 달의 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9. 천사
그림의 제일 아래에 성모님을 받치고 있는 천사를 인디언들은 중간 계급의 신으로 보았다. 이 중간 계급의 신은 최고신을 대신하여 새로운 시대를 이끈다고 믿었다. 그들은 새로운 문명이 생겨났다가 사라질 때 함께 죽었다가 다시 또 다른 문명이 생겨날 때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
신기하게도 성모님의 망토에 새겨진 별들은 실제 별들의 위치와 동일하게 맞아 떨어지며 아마도 인디언들은 이미 천체에 관하여 알고 있었기에 망토의 별을 보고 확신을 가졌을 것으로 본다. 이 별자리들의 위치는 후에 천문학자들에 의해 성모님이 발현하시던 날의 별자리의 위치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과학도 놀란 과달루페 성모님의 눈
톤스만 박사에 의하면 왼쪽에서 부터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은 "인디언" "수마라가 주교" "번역가" "틸마를 보여주는 후앙 디에고" 그리고 아래는 가족이 하나 보인다. 성모님 이미지의 눈을 확대한 것을 보면 그 안에 수염 난 사람이 보인다
한 마디로 성모님 눈은 즉석 사진처럼 주교 앞에서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신 성모님의 모습, 그때의 사건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동공의 중앙부분에는 또 하나의 훨씬 축소된 다른 장면을 알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원래 발견되었던 첫번째 반영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반영이라고 과학자들은 논쟁하고 있다. 이 두 번째 반영에는 아기를 업고 있는 여자와 몇몇 아이들로 구성된 한 가족의 모습이 있다. 돈스만은 성모님이 자신의 발현을 증명하기 위해 기적의 성화를 남겨주신 것 뿐 아니라 몇 가지 중요한 메시지들도 남기셨다고 말하며 이 두 번째 반영은 이를 발견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현시대를 위해 동정 마리아의 눈이 ‘숨겨놓은 메시지’라고 설명한다.
돈스만은 “어떤 기술로도 처리되지 않은 직물 위의 색상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유지되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색채가 광채를 유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라고 반문했다. 돈스만은 보는 각도에 따라 약간씩 성화의 색상이 변했는데 이 현상은 무지개 빛과 같으며 사람의 손으로는 재현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돈스만은 과달루페 성모님의 오른쪽 눈에는 성모님 발현 당시 주교 앞에서 자신의 외투를 펼치는 후안디에고와 주교의 시중을 들고 있는 흑인 여종, 한 손으로 턱수염을 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는 스페인계 남자 한 사람 등이 있다고 말한다.
그 모습이 사람의 손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8세기에도 그런 직물에 어떤 상을 그린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과학자들은 입증했었다. 사실 원주민들의 의복에 사용되는 아야테(ayate)라는 직물은 20년 정도면 손상이 되는데 이 직물과 그 위에 그려진 성화는 거의 470년간 유지되고 있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Richard Kuhn은 이 과달루페 성모님 성화에서는 천연적인 또는 동물이나 광물성 채색이 전혀 없음을 발견했다 한다. 1979년 미국 항공우주국 (NASA)박사들인 Philip S. Callahan과 Jody Brant Smith는 적외선 광선을 이용하여 이 과달루페 성모님 성화를 조사했는데 역시 그림으로 그린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과 이 직물이 어떤 기술적인 처리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디지털화된 영상에서 잡영상을 제거하자 양쪽 눈에 사람의 모습이 분명하게 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모습도 반영되어 보였던 것이다. 지난 주 로마의 교황청 학술원에서는 호세 아스테 돈스만 박사에 의해 성모성화의 연구 결과가 논의되었다. 그 크기가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정도로 매우 미세한 것이긴 하였지만 2,500배 확대하여 성모님의 홍채와 동공에서 최소 13명의 사람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돈스만은 말했다. 돈스만은 영상 정보를 전달하는 인공위성과 우주 탐측기에 이용되는 디지털 방식을 사용하였다
디지털 기술은 과달루페 성모님 성화의 신비스러운 눈의 수수께끼를 푸는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그동안 성화를 조사해온 많은 과학자들에 따르면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눈에 어떤 형체가 반영되듯이 성모님의 양쪽 눈에 사람의 모습이 반영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 중 새롭고 흥미로운 연구는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아이비엠(IBM)회사에 근무하던 호세 아스테 돈스만 박사가 원래의 성화에서 고화질 영상을 스캐닝하면서 시작되었다(1979).
470년 된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는 단순한 그림 이상이다. 그것은 성모께서 후안 디에고를 통하여 멕시코의 인디언들과 아메리카 대륙 전역의 인간들에게 전달한 메시지의 일부를 드러내는 상징들을 담고 있어 어떤 의미에서 상형문자 해독학이나 그림으로 전달된 이야기라 할만하다. 이 상징들은 인디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가 성화상의 기호를 해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발현 후 변화
발현 당시 수마라가 주교는 테페약 언덕에 1531년 12월 26일 대성당을 짓고 성화가 새겨진 후안 디에고의 틸마를 모시게 되었다.
육체의 치유
발현 후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병자들이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여 건강을 회복했고, 위험에 빠진 이들이 성모님의 도움으로 곤경에서 벗어났다. 자살과 낙태를 그만두고 혼혈 아이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성모님의 발현 이후 478년 동안 성모님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증언과 감사와 기적의 내용을 담은 액자들이 대성전 박물관에 비치되었다.
인디오들의 개종
후안 디에고는 고향 사람들의 도움으로 소성당 옆에 작은 집을 지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 곳을 방문한 모든 순례자들에게 성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이 깊은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인디오들이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를 보며 감탄했고 또 후안 디에고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아 새로운 종교에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청하였다. 인디오들은 믿는 마음으로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를 보고 후안 디에고의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쉽게 자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 명의 순교자 없이 8년 만에 9백만 명이나 세례를 받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영혼의 치유
육체적 치유의 기적보다 영적 치유의 기적이 더 많이 일어났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성모님께 위로를 받아 삶의 힘을 얻었고 죄인들이 회개 했으며 냉담자들이 고백성사를 봤다. 성모님의 성화를 보고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았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성화 앞에서 영혼의 치유를 받고 있다.
성모님의 발현
1. 1531년 멕시코의 과달루페 성모님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성모님은 발현하고 계시다. 그 발현에는 항상 이유와 메세지가 있습니다. 많은 발현들이 객관적이고, 복잡한 단계들을 거처 교회의 인정을 받는다.
2. 1830 파리 기적의 메달 성당의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님에게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으며, 이때 보여주신 환시를 통해 만들어진 '기적의 메달'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은총을 받게 됩니다. 이 발현을 통해 '원죄 없는 잉태'가 믿을 교리로 선포되는데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3, 1858 프랑스 루르드에서 베르나데트 성녀에게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원죄없는 잉태(임마꿀라타)에 대해 재차 확인해주시고, 우리들의 회개와 죄인들에 대한 보속, 기도를 당부하셨습니다. 또한 기적의 샘물이 있어 수많은 병자들이 이를 통해 나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4. 1917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세 목동 아이들에게 발현하셨던 성모님이 발현을 통해 많은 신앙의 지침 메세지를 주셨다. 성모님 자신을 '로사리오의 여왕 이라 칭하시며 묵주기도를 당부하셨으며, 첫 토요일을 성모님께 봉헌하는 첫토요 신심이 생겨났고, 러시아의 회개, 세계평화를 위한 끊임없는 기도, 희생, 보속을 요청하셨습니다.
테오티와칸
테오티와칸 도시 유적
중미 해발 2,300m 멕시코 고원에 위치한 거대한 고대 도시이다. 기원전 2세기경 건설되어, 기원후 4세기부터 7세기 사이에 가장 융성했다. 융성 시기의 인구는 약 12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며, 당시 광범위한 교역을 통해 경제력을 축적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해 중미 전역에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규모의 계획 도시로 건설 초기부터 완벽한 구상 하에 건설되었으며, 종교적인 상징성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넓은 길이 있는데, '죽은 자의 길'이라고 불리는 이 길은 폭이 40~100m, 길이가 5.5km였으며 오늘날 2.5km가 복원되어 있다. 이 길 좌우로 석조 구조물, 피라미드와 사원, 광장, 주택 등이 건설되었고 그 끝에 사람의 심장과 피를 바쳤던 달의 피라미드가 있다. 이곳 피라미드들도 중남미 전역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이 커다란 계단식이다. 가장 큰 것은 태양의 피라미드로 바닥 한 변의 길이가 230m, 높이가 66m이며, 248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죽은 자의 길' 끝에 있는 달의 피라미드는 바닥 한 변 길이 15m, 높이 46m로 해의 피라미드보다 작지만, 다량의 유해가 발견되어 인신공희(人身供犧)가 이루어진 곳으로 추정된다. 16세기 스페인이 점령한 후 인신공희 의식은 사라졌다.
당시 테오티와칸의 사람들은 전성기로 추정되는 7세기 무렵 홀연히 자취를 감췄으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이들이 어떤 언어를 썼는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피라미드 축조술을 비롯한 문화적 전통은 마야인에게 전해져 사라지지 않았다. ‘신들의 도시’를 의미하는 테오티와칸이라는 도시 이름, ‘죽은 자의 길’, ‘해의 피라미드’ 등의 명칭은 폐허가 된 이곳을 찾아 정착한 아스테크인들이 붙인 것이다.
‘신들의 집합장소’란 뜻을 지닌 테오티와칸에는 ‘태양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 ‘사자(死者)의 거리’ ‘깃털이 난 뱀의 신전’ 등 유명한 유적들이 있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아메리카 대륙 최대의 고대건축 중 하나로 ‘사자(死者)의 거리’ 동쪽에 위치하는 피라미드인데, 정사각형의 돌로 쌓은 한 변의 길이가 220m, 높이가 65m이고, 체적은 100만m3이며, 들어간 돌과 흙의 무게는 도합 500만 톤에 달한다. 4단계로 쌓아올린 이 피라미드의 정면에는 252개의 계단이 정상까지 나 있다. 전문가들은 이 피라미드를 짓는 데 하루에 3,000명이 동원되었다 해도 30년은 족히 걸렸을 것이라고 계산한다. 이 ‘태양의 피라미드’는 춘분과 추분을 알려주는 신기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춘분과 추분 날 한낮이 되면 태양이 피라미드 바로 위에 오고 피라미드 서쪽 면 아랫단에 완벽한 직선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태양의 그림자와 피라미드 그림자의 길이가 66.6초 동안 똑같아진다.
‘달의 피라미드’는 중앙을 가로지르는 ‘죽은 자의 길’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으며 달에 대한 제사를 목적으로 건축하였다. 건축 양식은 태양 피라미드와 같은데, 규모가 더 작고 태양 피라미드보다 약 200년 후인 BC 2세기 후반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46m, 한 변 길이 146m이며 태양피라미드보다 경사가 완만하다. 이곳의 사람들은 세상을 지속하려면 인간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신앙이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의 길’을 지나와 이곳에서 심장과 피를 바치는 제물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20t이 넘는 거대한 조각상이 있었다고 하며, 피라미드 앞에는 가로 130m, 세로 130m 규모의 광장이 펼쳐져 있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사자의 길’은 테오티우야칸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약 4Km의 대로를 지칭한다. 그 옛날 신에게 제물로 바쳐질 산 자들이 지나갔던 길로 추정되는데,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서 달의 피라미드에 도착해서 죽임을 당했고, 한 차례 종교의식이 행해진 뒤 심장은 신에게 바쳐졌다. 지금은 여행자들이 다니는 중앙 통로가 되었다.
깃털 달린 뱀, 케찰코아틀 신전은 테오티우아칸 입구를 통과하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신전이며, 케찰코아틀은 하늘과 창조의 신으로 불린다. 당시 사람들은 태양신을 숭배하면서 인신 공양을 했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뱀신을 모셨을 것이다.
멕시코시티 국립인류학박물관 [National Museum of Anthropology ]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박물관은 멕시코에서 가장 큰 박물관입니다. 피라미드 문명인 테오티우아칸, 마야 문명, 사포텍 문명 등 주요 멕시코 유적들을 한곳에서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1963년 바스케스(Pedro Ramirez Vasquez)에 의해 설계된 국립인류학박물관은 빨렌케 유적에 있는 생명의 나무를 토대로 만든 분수 기둥이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은 각기 다른 문명에 관한 유물이 전시된 12개의 전시실과 멕시코 각 지방의 민속과 풍물을 엿볼 수 있는 민속관으로 구성되어, 멕시코에서 탄생하고 발전한 문명과 문화의 흔적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곳으로는 테오티우아칸 유물이 전시된 제5 전시실과 아스텍 문명의 흔적이 가득한 제7 전시실, 그리고 마야 유물이 전시된 제10 전시실을 꼽을 수 있습니다.
테오티우아칸 전시실에서 돋보이는 것은 케찰코아틀 신전 일부를 복원한 유물입니다. 원래 6층으로 이루어진 케찰코아틀 신전 가운데 3층 부분을 복원해 놓았는데, 신전에 새겨진 깃털 달린 뱀 형상이 인상적입니다.
박물관 중앙에 있는 아스텍 전시실에는 유명한 태양의 돌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가득합니다. 이곳에는 에스파냐 군대가 파괴하기 전 아스텍 제국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을 축소한 모형도가 있어, 당시 테노치티틀란이 얼마나 크고 화려한 곳이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야 전시실은 기원전 600년 전부터 싹트기 시작한 여러 지역의 마야 문명에 관한 유물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또한 박물관 바깥에는 테오티우아칸의 정원을 축소한 공간과 신전과 벽화 등 다양한 문명의 흔적을 복원한 유물이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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