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나의 이웃들
김 정 례
며칠 만에 저녁 산책길에 나선다. 하늘은 낮은 구름이 드리워 있고 공기는 맑고 상쾌하다. 나의 산책코스는 봉현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국사봉 터널까지다. 두 번 왕복하는데 한 시간 걸린다. 유월의 가로수와 담쟁이 넝쿨이 마주보고 경쟁하듯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이곳은 이삼년 전까지만 해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던 삭막한 곳이었다. 지금은 가로수를 심고 담쟁이 넝쿨과 아이비를 올리고 그늘진 곳에 옥잠화, 비비추, 구절초를 심어서 제법 산책길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어깨를 펴고 전봇대를 터치한다. 그리고 나의 몸에게 시작 신호를 보낸다.
“래츠 고우!”
길을 걷다보면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첫 번째 만나는 사람은 통통한 아줌마와 딸인 듯한 아이다. 그들은 시시덕거리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이어폰을 한 짝 씩 나누어 귀에 꽂고 행진하듯 걷곤 한다. 딸과 사이가 좋아 보인다. 몇 년째 같은 시간대에 걷고 있는데 요즘 들어 눈에 띄게 배가 훌쭉해졌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모양이다.
‘축하합니다! 다시 찌지 않게 조심하세요!’
나는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낸다.
그들과 엇갈려 조금쯤 지나면 십중팔구 또 한 사람을 만나곤 한다. 마라토너다. 작은 체구에 군살이라곤 하나도 붙지 않은 서른 서넛쯤 되어 보이는 남자. 늘 개구쟁이처럼 야구 모자를 거꾸로 쓰고 달린다. 깃털처럼 가벼울 것 같은 이 남자는 한 발짝 뛸 때마다 일 미터씩 전진하는 것 같다. 그에게서는 늘 스킨 냄새가 난다. 바람결에 묻어오는 남성적 향기. 언젠가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나던 그 냄새 같다. 신선한 추억이란 이런 것일까?
한 십분 쯤 지나면 길 오른 쪽에 구암중학교가 나온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교문을 나서고 있다.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그들에게서는 비릿한 청춘의 냄새가 난다. 몇몇 아이들이 장난인지 싸움인지 서로 치고 박고 난리다. 한 쪽에선 아파트가 들썩 거리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유행가를 불러 재낀다.
“천년이 지나도오~~
난 너를 잊지 못해
사랑하기 때문에에~~”
‘녀석들, 니들이 사랑이 뭔지 알기나해?’
코웃음이 나오는 걸 참는다. 나도 한 때 저런 시절이 있었으니까.
이제부터는 약간 으슥한 오르막길이다. 야트막한 동산 곁을 지나가게 된다. 길가에 몇 대의 덤프트럭과 승용차들이 노숙하고 있다. 몇몇 승용차 안에서는 청춘남녀들이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고 후미진 곳에서는 택시 기사들이 잠시 눈을 붙이거나 생리현상을 해결하기도 한다. 이따금 구청에서 주차 단속을 나와 과태료 딱지를 붙여 놓고 바람같이 사라지곤 한다. 꼭 심술궂은 시누이 같다.
가까이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장마가 잠시 걷힌 뒤에도 자주 듣게 되는 소리다. 가까이 가니 옹벽에 꽂아 놓은 파이프에서 맑은 물이 쏟아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길이 물에 잠겨 건널 수가 없다. 마주 오던 사람이 먼저 보도 가장자리를 아슬아슬 건너온다. 잠시 기다렸다가 그가 오던 가장자리를 밟고 나도 건넌다. 발밑에 물이 두렵다.
‘빠지면 안 돼!
정신을 집중하고
균형을 잘 잡고
자, 건너라!’
어린 시절에는 일부러 물웅덩이에서 ‘잘박잘박’ 장난을 쳤었다. 잠시 비가 개면 비포장 도로 곳곳에 작은 웅덩이들이 생겼다. 흰 구름 한 조각이 떠있는 잔잔한 물웅덩이. 오른발을 살며시 들여 놓으면 고기비늘같이 반짝이는 작은 파문이 일었다. 이어서 버섯구름 같은 흙탕물 앙금이 솟아올랐다. 왼발을 마저 담근다. 흙물이 맑은 물 사이로 잉크처럼 퍼져 나갔다. 그리곤 두 발을 첨벙거려 웅덩이 전체를 흙탕물로 만들었다. 무슨 심보였을까? 까닭 없이 통쾌했다. 다른 웅덩이를 찾아 같은 장난을 또 쳤다. 집으로 돌아가면 영락없이 엄마한테 꾸지람을 들을 터인데도....
“또 적셔 왔냐? 장마철에 신발 말리기도 어려운데, 내일은 그냥 신어!”
어머니는 멀리 아르헨티나에 계신데 어깨너머로 어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국사봉 터널 위 반환점에 다다른다. 신호를 기다렸다가 길을 건넌다. 이곳부터는 아파트 담장을 끼고 걷게 된다. 갖가지 생활 소음들이 들려온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리도 달라진다. 어느 집 창문 너머 압력솥이 ‘칙칙’ 소리를 내며 밥을 짓고 있다. 식탁이 세팅되어 있고 방금 퇴근한 배고픈 가장이 젓가락으로 반찬 몇 가지를 집어 먹으며 밥이 빨리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집을 지나자 이번에는 샤워소리가 들린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여자로 가정하기로 한다. 방금 집에 돌아 온 젊은 여성이 샤워를 하고 있다. 머리에는 샤워 캡을 쓰고 새로 산 버디 크린저의 라벤더 향기를 음미하며 거품을 내고 있다. 파뿌리같이 가늘고 하얀 손가락 사이로 거품이 빠져 나온다. 늘씬한 키와 뽀얀 속살, 에스라인곡선이 아름답다. 천천히 샤워타올에 일어난 거품으로 몸을 닦는다. 하얀 거품이 면사포 망사처럼 그녀의 몸을 감싼다. 거품 마사지가 끝나고 샤워기 아래로 다가선다. 물에 씻긴 거품이 몸의 곡선을 타고 흘러내린다. 고단했던 하루도 물에 씻겨 나간다. 거울 앞으로 다가선 여자가 살짝 미소 지으며 찬찬히 자신의 얼굴을 뜯어본다. 콧날이 약간 낮은 것이 불만이다. 여름휴가를 이용해 콧대를 세워 볼까? 싱싱한 젊음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라는 걸 그녀는 아직 모르는가 보다. 노쇠의 길로 접어든 나의 모습이 거울 속에 오버 랩 된다. 탄력을 잃은 피부, 비대해진 몸매. 나에게도 젊고 싱싱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나는 ‘거울도 안 보는 여자’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저만치 송아지만한 흰 진돗개를 끌고 오는 아줌마가 보인다. 비로소 나는 상상에서 깨어난다. 가끔 만나는 저 큰개는 공포의 대상이다. 개를 끌고 나오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키며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걷는다. 어느 집에선가 아홉시 뉴스시간을 알리는 시그널 음악이 들려온다. 산책길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신호음이다. 쪽문 뒤 과일장수 아저씨는 비 때문에 나오지 않았나 보다. 낡은 과일차가 서있던 자리가 휑하다. 액자를 떼어 낸 자리처럼. 아니, 멀리 떠나버린 사람이 남기고 간 빈자리처럼. 존재가 떠난 공간은 언제나 허무를 남긴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이웃들.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생각도 삶의 방식도 다르겠지만 같은 시간대와 같은 공간에서 살다 가는 존재란 점은 다르지 않아서 일까? 막연한 친근감을 느낄 때가 많다. 나의 이웃들이여, 오늘도 파이팅!
첫댓글 산책 길에서 만난 이웃들에 대한 시선이 포근합니다. 상상력도 대단하구요, 묘사도 좋구요.
존재가 떠난 자리은 액자를 떼어 낸 자리처럼 휑하지요. 글의 밑바탕은 휴머니즘이라고 마지막 강의에서 들었습니다.
김정례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에 저도 덩달아 따뜻해 지는 기분입니다.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올라왔군요. 책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잘 읽었지요. 의외로 탄력 넘치는 글의 분위기에
새삼 다시 봤다요.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반갑게 읽었습니다. 이제 자주 만날 수 있겠습니다.
좋은 글 더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격려해 주시니 용기와 힘이 됩니다. 서로에게 독자가 되어주고 팬이되어주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죠... 감사합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파이팅! 파이팅! 나 누군지알지요??? 김선생은 친절한 사람, 따뜻한 사람. 그래서 이런글이 나오지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누구신지는....
일상의 이야기를 저녁 산책길에서 펼쳐준 따뜻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 곁의 이런 이웃들은 반찬에 들어가는 양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네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진심으로 등단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