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함께 하는 삶
전도서 4:9-12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9절)
만약
부부싸움을 했는데, 남편이 이겼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이 승자일까요? 반대로 아내가 이겼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이 패배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둘다 마귀에게 진 패배자입니다. 그러나 서로 져주면서 섬겨주는 부부관계는 두 사람 모두를 승리자로 만듭니다.
"양쪽이
모두 승리하는 전략"(win-win strategy)이 새롭게 대두되면서 '윈윈'이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도서에서
"해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라는 말씀대로 이미 몇 천년 전에 성경에 기록된 원리입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라는 말씀대로 친구이건, 부부이건 함께 살거나 함께
일하거나 함께 무엇을 하는 관계에 있어서 한쪽만 사랑하고, 한쪽만 수고한다면 그 관계는 결코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고'는
고통을 동반한 행위를 말합니다.
인간은
어차피 홀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부모나 배우자의 신앙을 따라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만들어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나 자신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해 나갈 때, 좋은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10절)
오늘
본문은 팔레스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사막과 광야지대라서 잘못하다가는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을 지나갈 때에
혹시 발을 잘못 디뎠을 때 옆에 누가 있으면 붙들어줄 수 있지만, 만약 혼자일 경우에는 구덩이에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혹시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넘어져 보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들은 넘어지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넘어져 본 기억이 없다고 해도 우리의 어린 시절에는 넘어지는 것이 일이었고, 넘어진 어린 우리를 일으켜주는 것이
부모님이나 어른, 형들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어른이 된 우리는 우리의 자녀나 동생이나 어린아이들 또는 노인들에게 예전에 받았던
도움을 주며 살고있을 것입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복이 있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더 복된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11절)
팔레스틴의
사막기후는 낮에는 덥고 밤에는 몹시 춥습니다. 일교차가 매우 심한데, 옛날에 모세가 출애굽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더운 낮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구름기둥으로, 또 추운 밤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불기둥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며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불도 없는 추운 밤이 되었을 때에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옆에 있는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길 수 있지만, 혼자서는 추위를 견디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도 가끔 제 딸이 몸의 컨디션이 안 좋을 때에는 옆에서 같이 자줍니다. 가끔 춥다고 할 때에는 꼭 껴안고 딸의 몸이 풀릴 때까지
있어줍니다. 그러면 조금 뒤에 몸이 더워진다면서 저보러 나가도 된다고 합니다. 혼자서는 몸의 한기를 어쩔 수 없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면 한기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을 말해줍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12절)
이
구절을 표준어성경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당시에는 강도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혼자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나면 이길 수 없지만, 만약 둘이
있으면 함께 싸울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이 있다면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둘'은 꼭 두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가 아닌
여럿을 말하는 것이며 '3'은 완전한 숫자를 말하는 것으로 '삼겹줄'은 완벽하게 단결된 힘을 말합니다.
우리는
'삼겹줄'의 원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항상 한 뜻을 갖고 합력하여 일을 행하십니다. 예수님도
성부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행하시고 그분의 뜻대로만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일심동체하고
하는 부부사이가 정말 항상 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섬기고 있습니까? 서로 사랑하라고 주신 가족끼리 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까? 함께
제자된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습니까? 혹시 내 옆에 있는 누군가로 인해 실망하고 불만족스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나 때문에 옆에 있는 누군가가 힘들어하고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혼자
있으면, 충고해줄 사람도, 챙겨줄 사람도 없는데 함께 있으니까 내가 잘못될 때에 잘 되라고 충고해주니 고맙고, 내가 아플 때 나 대신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감사하고... 생각해보니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일입니다.
동화
중에 한 부분이 없는 동그라미가 그 빠진 조각을 찾으러 여행을 떠난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한쪽
구석이 없으니까 동그라미는 굴러가다가 이가 빠진 부분에서 항상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그라미는 "빠진 부분을 찾기만 하면, 쉬지않고
잘 굴러갈텐데"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빠진 조각과 비슷하게 생긴 조각을 발견했는데, 맞추어보니 너무 컸습니다. 또
세월이 지나 비슷한 것을 찾아서 맞추어보니 이번엔 너무 작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빠진 부분에 딱 맞는 조각을 찾게 되었습니다. 어찌나
반갑던지... 동그라미는 그 빠진 부분을 끼워넣자 완전한 원이 되었습니다. 이젠 완전한 동그라미가 되어 쉬지않고 굴러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이젠 가다가 걸려서 쉬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행복한 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동안 빠진 부분 때문에 굴러가다가 쉴 수 있었는데, 이젠 완전한 동그라미가 되어서 쉬지않고 굴러가게
되어 너무나 피곤했습니다. 쉬지않고 굴러가면(항상 원하는대로 되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쉬지않고 굴러감으로, 가끔 문제로
인해 쉼을 가졌던 순간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동그라미는 "차라리 완전하지 못했을 때가 좋았는데"라며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
동화는 완벽을 추구하는 이들이 비록 완벽해졌을 지라도 만족하지 못함은 말해줍니다. 내 만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인생에서 만족감을 누릴
수 없습니다. 무언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면, 잠깐 행복할 뿐, 또다시 불만족을 느끼며 그 마음의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마음이 바로 '사랑'이므로 내가 힘들어 죽을 것 같아도 내 수고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만족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이며, "사랑의 수고"입니다.
사람들은
완벽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자기 자신은 부족해도 상대방은 나에게 완벽하게 잘 해주기를 원합니다. 도둑놈 심보지요? 그러다보니, 상대방이 완벽하게
잘 해주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방에게 거는 기대감은 열등감에 비례해서 큽니다.
따라서 만족한 삶을 결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살아도 되도록 완벽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죄로 인해 우리는 더욱 많은 부족함을 갖고 태어납니다. 부모가, 조상이
누구냐에 따라, 또는 환경에 따라 더 많이 부족하기도 하고 덜 부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많이 부족하게 태어났다고 불행하게 사는 것도
아니며, 거의 완벽하게 태어났다고 해서 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부족함과 상대방의 부족함을 어떻게 잘 어울려서 넉넉하게 살아가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인간은 결코 혼자는 살 수 없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시
133:1에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하였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뒤에 하와를 만들어서
함께 살게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함께 협력하며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오래
전에 개와 개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개벼룩에 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개가 되어서 자기의 피를 주는
희생을 하려는 사랑보다는 개벼룩이 되어서 개의 피를 빨아먹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개벼룩은 많은 데, 개가 없으니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정과 교회는 희생의 댓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가정은 태초에 아담의 피를 흘려 그의 갈비뼈를 빼내어 만들어졌고, 교회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려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는 나의 목숨을 바쳐서 희생을 치를 정도가 되어야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떻습니까? 내 목숨을 바칠 정도로
내 몸을 희생하면서 가족과 교회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옆 사람이 나를 위해 희생하며 수고하기만을 바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도우며 덕을 세우며 살기 위해 은사(gift)를 주셨습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밖에 모르며, 사랑도 메말라가고 믿음이 있는
자도 거의 볼 수 없고, 하나님보다 물질과 세상을 더욱 사랑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믿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는 은사를 활용하여 옆에 있는 사람을 조와야 합니다. 그러러면 먼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더러운 것을 볼 수 없는 사람은 청소의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평화의 도구가 되라는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볼 때
울 수 있는 사람은 구제와 권위(권면과 위로)의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을 볼 때 답답한 사람은 가르침의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이
외에도 무언가를 볼 때에 답답한 경우는 그것이 바로 그 사람에게 주신 은사입니다.
만약
바닥에 무엇이 떨어져 있는데, 그것을 보며 전혀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치우는 데 은사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 짜증이 나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은사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왜 치우지 않았느냐며 화를 내거나 답답해하지 말고 그것을 하십시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다른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은사는 덕을 세우기 위해 주신 것이지 다투고 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내 눈에
거슬리는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내 마음에 거슬리는
무엇 때문에 그것을 내가 해결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옆에
있으면 짜증이 나는 사람, 귀찮고 부담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유익을 얻게 되고(상을 받고) 나를 통해서 넘어진 사람이 일어설 수
있고, 나를 통해서 추위에 떨던 사람이 추위를 이겨내고, 나를 통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를 사람이 오히려 더욱 강건해지는 역사가 올
한해동안 나를 통해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가족과 친구과 이웃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이 있듯이 정말 혼자서는 외로와서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저희에게 함께 할 사람들을 주셨는데, 저희는 함께
할 사람의 고마움을 잘 모르고 숨가쁘게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또한
개벼룩처럼 저를 위해 희생해 줄 사람을 필요로만 했지, 제가 개가 되어 저의 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항상
다른 이들이 저에게 무엇을 해주는 것에만 관심이 많았고, 저에게 잘 해주지 않거나, 저에게 상처를 주면 그것을 생각하며 원망하며 부정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족한 것들만 바라보며 걱정하며 근심하며 또한 불평의 말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제 입에서는 감사와 찬송과 위로와 권면의
말보다는 걱정과 불만과 고통의 소리가 더 많이 흘러나왔습니다.
주께서는
그런 삶이 아니라 주께서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저희들도 먼저 십자가를 지고 희생을 하라고 말씀하시며 본을 보여주셨는데 너무나
어리석은 저희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부터는
저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잘못된 부분들을 고치며 살기를 원합니다. 동그라미가 쉬지않고 굴러간 것처럼, 저 역시 쉬지않고 살아왔습니다. 잠시
멈추어서 제 삶을 성찰해보면서 반성하며 고치며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기를 원하오니 저를 온전히 주장하여
주옵소서.
옆에
있으면 부담스럽거나 짜증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옆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제 성품이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만하지 못한 것을 주님께서도 잘 아시오니 저를 변화시켜주옵소서. 그래서 진정으로 사람들이 저를 바라볼 때에 함께 있고 싶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함께
사랑하며 살라고 주신 가족과 이웃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섬기며 살도록 저에게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매
순간 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 넘치게 하시며 저를 통하여 희생이 무엇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몸소 본을 보여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저도 그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가운데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 삶 가운데 온전히 역사하셔서
저를 통하여 주님의 나라가 제가 있는 곳에 항상 임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에서
저희를 위해 물과 피를 쏟으시며 사랑의 수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