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淸溪) 이세후(李世后)
樂民 장달수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는 재령이씨(載寧 李氏) 집성촌이다. 도문화재자료 107호로 지정된 ‘청원리 이씨고가’ 옆에 또 다른 고가와 재실이 있는데, 계상정, 임간정, 만수정, 수당서실 가묘 등의 건물이 갖추어져 있어 옛 사대부 집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고가는 재령이씨 정랑공(正郞公) 문중이 대대로 살아온 건물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무척 높은데도 아직 문화재로 지정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후손들은 지금도 유지 관리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고가의 주인이 바로 청계공(淸溪公) 이세후며, 계상정(溪上亭)은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한말 학자 회봉 하겸진은 기문에 “옛날에 청계 선생 이세후 공은 영조 때 병오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 관직에 있으며 법을 받들어 올바른 것을 지키며 아첨하지 않았다. 일찍이 어떤 일로 권세가 있는 고관의 미움을 샀으나 스스로 자신의 성품이 강직해 조정에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파를 멀리하여 나아갈 바를 밝히고, 향약을 세워서 풍속을 바로잡고 별도로 시냇가에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근처의 선비들을 초청하여 경전을 강론하고 학문에 정진했다”라 적고 있다.
청계공은 문과에 급제해 병조좌랑의 벼슬 등을 지내며 곧은 성품으로 옳고 그른 것을 명확히 구분해 일을 처리하고자 했으나, 권세가들의 미움을 사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해 학문에 힘을 쏟은 선비란 것을 알 수 있다. 청계공은 1681년 9월 청원리 집에서 부친 명규(明奎)와 모친 진양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순후하고 기쁘거나 성나는 일이 있어도 얼굴에 내색하지 않아 주위 사람들이 크게 될 인물이라고 기대를 걸었다. 1699년 갈암 이현일 선생이 광양으로부터 청원리에 머물자 공이 반년 간 수업을 하였는데, 크게 칭찬과 가르침을 받았다. 갈암 문인 중에 제산 김성탁과 친분이 가장 두터웠다.
회봉 하겸진은 계상정 기문에 “기묘년에는 갈암 선생이 광양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청원리에서 수개월을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공은 일가친척으로서 제자의 예를 다하여 크게 인정을 받았다. 선생의 제자 중 제산 김성탁 또한 공과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이다”라 기록해 놓았다. 1726년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문원에서 벼슬을 하였고 곧 경양도 찰방이 되었는데 그때 경상우도의 부시관(副試官)으로 차출되어 바른 일처리로 많은 선비들의 칭찬을 받았다. 이어 예조좌랑으로 제수되고 다음에 병조정랑으로 승진했다. 이때 진주병사가 뇌물을 많이 써서 북병사가 되려고 했는데, 공이 이를 반대했다. 병조판서가 말하기를 “내 견해로는 낭관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니 강제로 뜻을 꺾을 수 없다. 어찌 상관이라고 해서 사사로이 처리하겠는가”며 청계공의 뜻을 따랐다.
또 일찍이 대궐에서 숙직을 할 때 상관의 결정이 잘못되었다 생각하고 따르지 않았다. 공은 자신의 성품이 강직함으로 인해 곤란한 일을 당할 것을 예견하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청계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경상도 관찰사의 권유로 같은 당파에 들어가서 권유하기를 “선비도 이 세상 사람인데 만약 잘못 옛 당파만 지킨다면 몸을 용납할 곳이 없을 것이요, 또 장차 벼슬길에 나가고자 한다면 먼저 처지를 바꾸는 것이 좋다”라 했다. 이때 청계는 정색을 하며 거절하여 말하기를, “선대부터 지켜 오던 것을 어찌 한때의 영광이나 곤욕 때문에 처지를 바꾸겠는가”라 했다. 이 후로 젊은 학도들과 더불어 경서를 공부하고 가르치며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했다.
참고로 청계의 스승 갈암은 당시 남인의 대표 인물이었다. 당시 정권은 노론들이 잡고 있으므로 남인으로서 다시 조정에 출사하기는 쉽지가 않은 상황이었다. 만약 청계가 경상도 관찰사의 권유를 받아들였다면, 다시 벼슬길에 나가 부귀영화를 누렸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청계는 부귀영화보다 의리를 택해 스승에게 배운 바른 선비의 도리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고향에서 여러 벗들과 함께 향약을 수립하여 풍속을 바로 잡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청원리에는 청계의 유풍이 아직도 면면히 이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청계는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풍속을 바로 잡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1754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방어산 솔밭 재에 있다. 한말 학자이자 의로운 선비인 향산 이만도는 청계공을 “시문은 깨끗하고도 깊이가 있고 아름다움이 담겨 있으니 미루어 보아 그의 기상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라 하며 “그런데 다만 한스러운 것은 많이 수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스승과 제자 간에 질문하고 답변하는 글도 오히려 그 뜻이 시문보다 더 심오할 것인데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깝다”며 청계의 글들이 많이 유실돼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향산은 “행적이 전해져서 후세에 교훈이 되면 족하다”는 말로 글보다는 행동이 중요함을 강조하며 청계의 삶을 후대인들에게 전하고 있다.
후손들은 청계의 숨결이 깃들은 고가 재실 가묘 등을 지금껏 보존해 오며 조상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다. 청계가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어사화(御賜花)가 지금도 전하고 있다.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닌 청계의 유적들이 하루빨리 문화재로 지정되기를 바라며 조상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