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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삶을 마감하는 행동을 일컫는 '자살'이라는 주제는 매우 논쟁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주제로 인식되지만, 자살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행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살' 역시 죽음의 한 형태이고, 또한 자실을 선택한 이들이 지닌 다양한 상황과 사연에 주목한다면 마냥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때로는 ‘오죽 했으면’ 하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행위에 비난을 퍼붓기는 쉽지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의 절박한 심정을 조금이라도 경청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물론 그의 죽음과 함께 남아있는 이들이 겪어야할 고통의 무게 또한 우리는 고려할 필요가 있을 터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철학자의 오후'라는 부제를 지닌 이 책은, 오랫동안 '자실'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온 저자의 고심의 기록이라고 이해된다. '자살'이라는 행위는 마냥 비난받아서도 안 되지만, 또한 전적으로 옹호되어야만 하는 권리도 아니라고 하겠다. 저자는 '자살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가능한 풍부한 사회학적 데이터와 함께, 적어도 역사적 문화적으로 최대한 넓은 범위에 걸쳐 자살행동에 대해 오랫동안 폭넓은 관점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비난을 퍼붓거나, 혹은 상황 논리에 맞추어 그것을 옹호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자살'이라는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서양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자신의 살에 지배권을 행사하고 오직 하느님만이 소유하고 있는 권력'에 어긋나는 행위이기에 '자살이 죄가 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 논거도 적절히 제시하고 있으며, 인간이 신의 부속물처럼 여겨지는 그런 관점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는 철학적 입장도 제시되어 있다. 자살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접근하기 조심스러운 이유가 이 책의 목차에서 잘 드러나 있다고 보는데, 일단 저자는 '우리에게는 자살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할 언어가 없다'고 첫 번째 항목의 제목을 통해서 밝히고 있다.
그야말로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에게는 그 숫자만큼의 다양한 사연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렇기에 그에 관해서 일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유래한 '베르테르 효과'라는 용어가 말해주듯, 자신이 추종하는 유명인이 자살을 했을 때 그 대상을 모방하여 자살하는 행위가 문제시되기는 한다. 그래서 최근 유명인의 자살을 다룬 기사들은 시시콜콜한 흥미 위주의 사연이 아닌, 비교적 간단한 사실 위주의 정보만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리고 기사 말미에 우을증 상담과 같은 내용을 첨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자살은 왜 비도덕적이라 여겨지는가' 라는 두번째 항목에서, 저자는 기독교적 문화에서 자살을 죄악시하는 관념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대항하는 철학적 논의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책의 말미에 부록으로 첨부된 데이비드 흄의 '자살에 대하여'가 주로 다뤄지고 있다. 세번째 항목에서는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남긴 '자살 유서'들을 분석하고, 저자 자신이 행했던 '자살 유서 쓰기 수업'의 경험을 소개하기도 한다. 마지막 항목에서는 '자살자들'이 지니는 심리 상태에 대해서 접근하면서, '자살'을 도덕적 단죄의 대상이 아닌 현실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분석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자살'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매우 조심스럽다고 여겨지는데, 그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냥 옹호할 수는 없을 터이지만, '자살' 역시 인간의 '죽음' 가운데 하나로 보다 진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에 공감한다.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에 비난을 퍼붓기보다는 그러한 선택을 했던 이들의 삶의 모습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여겨지는데, 아마도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쉽게 극단적 선택의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주위 사람 누군가 그들에게 좀더 따뜻한 관심을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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