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교육의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내적인 부자유이다(자유를 향한 교육, 2008, 208)."
누구라도 자신의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뭔가는 모르지만, 불만이 있었다는 것을 돌이킬 수가 있을 것이다. 가만히 그 당시(7-14세)를 짚어보면 그것들이, 그 당시 이루어지던 교육이 나의 내부에서 원하는 것이 아닌 그것과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는 왜 그런지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불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사랑, 또는 선생님의 사랑이 있었기 떄문이다. 정신에 있어서 사랑은 어떤 처방보다도 강력한 효과를 준다. 예컨대 학교에서 힘이 들었다면,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안아주면서 등을 토닥여주면 어려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던 경험을 누구라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나를 지탱해 주었던 사랑은 이제 많이 희석되어서 효과가 예전 같지는 않다. 그런 사랑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비판, 판단, 이성과 같은 정신기제가 들어섰다. 그나마 나를 지탱해주고 받혀주던 지지대가 사라져버린 지금,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점점 더 정신이 설 자리가 작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왜 그 당시 학창시절이 불만이었을까가 질문이다. 우리 모두는 학교에서,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도록 배우기 때문에 학교는 당연히 가야햔다. 요컨대 가장 우선 순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창시절이 불만인 것은, 학교에서 '그런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이란 현재 공교육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말함이고, 이는 인간의 본성인 정신을 배제하고 이루어지는 교육이다.
정신을 배제하는 이유를 조야하게 말하면, 인간의 정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태어난 인간이 육체만 자라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 내부의 정신도 자라고 있다. 즉 육체보다는 정신이 자라는 것이 훨씬 더 비중이 크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정신이 보이지 않으니 배제하는 것이 어쩔 수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정신이 배제된다는 말은 아이들의 내부에서 원하는 상황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뭔가는 모르지만 아이들이 불만이 생기는 것이다. 이 불만이 해소가 되지 않으면 끝내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현재 아이들이 저지르는 폭력이 내적으로 깊어진 권태, 불만이 쌓여서 원하지 않는 상황이 깊어진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은 뭘까가 궁금하다. 한마디로 정신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정신이 성장하고 발달하는 시기에 정신을 배제하게 되면 아이들은 큰 상처를 입는다. 육체의 상처는 보이므로 치료를 받지만, 정신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상처를 치료하기도 어렵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인간의 본성에 따른 교육을 해야 한다. 인간의 본성에 따른 교육 첫째, 항상 전체에서 개체로 나아가야 한다. 현재의 교육은 덧셈을 할 때 개체를 더해서 전체로 간다. 예, 5+6+7=20이다. 반면 인간의 본성은 20이 있고, 이는 개체인 5+6+7 의 모임이다.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듯 싶지만 개체를 더할 경우 인간의 내부에서는 인간의 본성으로 전체를 보는데 개체를 보게 하는 것과 같다. 만약 몸이라면 몸 전체를 보고 있는데 팔, 다리를 먼저 보라고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기 때문에 아이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이들은 말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아이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이들의 외부에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전달되는 감정, 뭔가 나쁜 감정은 느낀다. 즉 뭔지는 모르지만 기분 나쁜 것이다. 이것이 짜증이다. 짜증이 나면 공부가 하기 삻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이것이 조금씩 쌓이면서 불만으로 가는 것이다.
두 번째 인간의 본성은, 아이들은 오랜 옛날 인간의 정신 발달 시기를 반복한다. 예를 들면 인간의 정신은 꿈꾸던 시기를 지나서 현재의 이성이 발달한 시기에 도달하였다. 아이들도 그 꿈꾸는 시기를 거치는 것이다. 꿈꾸는 시기는 에테르체가 자유로와지는 시기인 7-14세 사이이다. 이 시기 교육의 순서는 그림에서 출발해서 쓰기로, 쓰기에서 읽기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에서 바탕은 모두 이야기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 이야기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서 쓰기로 나아갈 때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꿈꾸는 시기의 아이들은 감성이 전면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감성은 이야기를 통해서 내부로 전달되는 것이다.
반면 현재의 교육은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바탕에 깔고 이루어진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란 감성을 배제하고 사고를 통하여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감성은 영혼활동의 공감과 반감의 가운데에 위치해서 공감으로 갈수도 있고 반감으로 갈수도 있다. 공감 감성은 사랑이고, 반감 감성은 구토와 같은 느낌이다. 꿈꾸는 시기에 사고를 강조하면 아이들은 구토와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므로 짜증이 유발된다. 반면 공감은 사랑, 열망과 같은 감정으로 의지를 발현시킨다. 꿈꾸는 시기에 공감감성으로 의지를 발현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지가 이해가 될 것이다. 반감 감성을 통한 사고 교육은 14 - 21세 사이에 아스트랄체가 탄생한 이후 해야 한다. 아스트랄체가 영혼 활동의 바탕으로 아스트랄체가 탄생해야 영혼활동인 사고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꿈꾸는 시기에 과학적인 사고방식 교육을 강조하면, 아이들의 영혼 활동 중 반감이 강조되어서 아이들이 짜증을 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내적으로 나는 짜증은 외부에서 해소하기도 어렵고, 또 아이들이 자신의 내부가 어떻게 되는지도 알지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이 망가진 상태로 아이들은 학교를 나오게 된다.
요컨대 인간의 내부 정신이 발달할 때 그 발달 단계에 맞게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아가 오히려 정신을 배제해서 아이들의 내부가 망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요행히 사회에 나와서 자신의 정신을 돌이켜 망가진 정신, 자아를 살펴본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부분은 망가진채로 삶을 살아간다.
필자의 학창시절도 그랬지만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이러한 불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참으로 궁금했지만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아무도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았다. 다행히 슈타이너의 공부를 하고 그 이유를 알았지만, 이제는 필자도 아이들도 정신이 많이 망가진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정신이 보이지도 않고, 어떤 경우에도 드러나지 않아서 우리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 정신에게는 놀라울 만치 좋은 점이 있다. 삼라만상 모두에 정신이 깃들어 있어서 어디든 탐구하기만 하면 정신을 찾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나의 정신은 오직 나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면 나의 정신이 이렇게 반응하고, 저렇게 생각하면 나의 정신도 저렇게 반응한다. 따라서 누구도 나의 정신을 어쩌지 못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나의 정신을 변화시켰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감정, 행동, 사고라도 내가 모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그것이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내가 선택한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절대로 정신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책임이 내게 있는 것이다. 정신이 반응해야 그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언제라도 지금이라도 변화시킬 수있는 정신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래서 수십년 캄캄했던 동굴이라고 하더라도 불이 켜지면 순간 밝아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어떤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면, 그 순간 부터 나의 정신은 확 바뀌어서 새롭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쁜 일을 받아들였다면 동굴도 꼭 그만큼 더 캄캄해질 것이다. 그리고 순간 밝아졌더라도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그 밝음이 유지가 되는 것이다.
이런 교육, 정신을 배제하는 교육, 인간의 발달단계에 맞지 않는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그 시기에 발달해야 하는 정신적인 요소가 발달하지 못한다 특히 7-14세 사이는 에테르체가 자유로와 지는 시기로, 에테르체가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에테르체는 상을 만들고 기억에도 관여한다. 따라서 에테르체가 상을 만들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스트랄체가 탄생한 이후 아스트랄체가 에테르체를 독려하여서 에테르체가 만든 상을 해석해서 영혼 활동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이런 활동 결과 자아가 발달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육체를 입지않은 상태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육체를 입었기 때문에 육체를 입기 전 자유로웠던 시기를 기억한다. 이는 인간의 정신이 자유로운 상태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이런 갈망은 정신이 적절하게 발달함으로 해서 해소가 된다. 하지만 이런 교육이 정신의 부자유함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뭔가는 모르지만 짜증이 나면 그것을 해소하려고 한다. 이때 짜증을 잘 살피면 정신의 문제점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정신이 망가졌으면 깨닫기는 어렵다. 결론은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지금 뭔가 짜증이 난다면, 또 스스로 부자유하다고 느낀다면, 이는 자신의 정신이 발달단계에서 배제되어서 억눌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깨달으면 하나씩 해소가 되어서 나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수행이다-.
정신이 보이지 않아서 믿기 어렵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모든 문제는 자신이 선택해서 지금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해소할 책임도 자신에게 있다. 어릴 때 비록 학교에서 내부를 막도록 했을 지라도 스스로 자신이 선택했기 때문에 자신의 내부가 봉쇄된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현재 자신의 정신은 자신의 선택이므로 자신이 책임지고 발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