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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자지
어지간하면 이길수 없는 선거전이었다
지금은 이쪽이 다스린다
자세한건 잘 모르지만 민심이 잡히지 않는다
지금는 잘하지만 금년에는 또 어떨런지 알수가 없다
*어지자지 :
두 발을 번갈아 가며 제기를 차는 것을 뜻하는 말로
중성이나 남녀 양성을 같이 가진 인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남녀추니, 舍方知)
목차
조선 시대를 담은 실록에는 숱한 남녀상열지사가 실려 있지만 당시에 사관들이 기록하기에도 난감한 사건들이 많았다. 그 중에 선비 김구석의 아내 이씨와 노비 사방지의 간통 사건이야말로 기이하고 미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에 양반 댁 마님과 노비의 간통 사건이 발각되면 재판권을 갖고 있는 수령이 두 사람을 법령에 따라 처벌하고 여인은 〈자녀안(恣女案)〉에 올리면 그만이었다. 고려 시대부터 시작된 〈자녀안〉은 행실이 음란하고 방탕한 사대부 가문의 여자를 기록해 국가에서 그 신분을 낮추거나 자손들의 관직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장부인데, 자칫 등록되기라도 하면 당사자는 물론 가문까지도 사회적으로 매장되기 때문에 가족들에 의한 명예살인도 종종 일어났다.
한데 이씨와 사방지의 경우는 적용할 법적 근거를 찾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사건 관련자들의 신분도 규정하기가 애매해서 임금과 조정 중신들이 골머리를 싸맸다. 여자는 공신의 자손으로 명문 사대부가에 시집 장가보낸 자식이 둘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애정행각을 당당하게 과시한 여걸이었고, 노비는 그 시대에 남녀 구별이 모호한 양성인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처벌에는 복잡다단한 정치사회적 분위기도 변수로 작용했다. 당시 계유정난, 왕위 찬탈,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으로 이어지는 정계개편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주역인 세조와 공신들과의 관계 유지, 혼란스런 사회 안정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이 사건의 진실을 더욱 미궁 속으로 끌고 갔다.
남자인가, 여자인가
사방지(舍方知)는 세종의 부마인 안맹담 집안의 사노비였다. 호남아였던 안맹담은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혼인한 뒤 장인 세종의 사랑을 받았지만 술을 너무 좋아한 탓에 1462년(세조 8년) 술병으로 죽었다.
그의 아내 정의공주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해서 아버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여러 대군이 풀지 못한 사투리 문제를 해결하여 큰 상을 받았던 재녀였다. 세조는 왕자 시절부터 막내여동생인 그녀와 함께 불경을 언해하는 등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이처럼 막강한 가문의 사노비로 태어난 사방지는 기이하게도 음양인이었다. 음양인은 해부학적으로 자웅동체나 양성구유라고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여자와 남자의 성기를 동시에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말한다. 통상 ‘남녀추니’ 또는 ‘어지자지’라고 하거나 고상한 표현으로 ‘고녀’ 또는 ‘반음양’이라고 부른다.
사방지
사방지는 이런 반음양 중에서도 유전적으로는 여성이지만 외부생식기는 남성의 형태를 갖춘 특이한 존재였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커밍아웃할 수 있는 현대의 트랜스젠더와는 또 다른 부류라고 할 수 있겠다.
사방지의 어머니는 이런 자식의 본색을 숨기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얼굴에 연지와 분을 발라주고 여복을 입혔으며 바느질을 가르치는 등 완벽한 여자로 키웠다. 사방지는 얼굴이 매우 예뻤으므로 주변 사람들은 그가 음양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장성한 사방지는 남자들의 출입이 제한된 양가의 규방을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다. 그 과정에서 홀몸이 된 과부들을 유혹해 무수히 통정했지만 겉모습이 완전한 여자였으므로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았다. 양인 여성들의 바깥나들이가 제한되고 연애는 물론 개가까지도 죄악시하던 당대의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그의 존재는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은밀한 향락을 누리던 사방지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상전이 혼기가 찼다는 이유로 남자노비와 맺어주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신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었다. 그는 궁리 끝에 불교에 호의적이었던 상전의 허락을 받아 동대문 밖에 있는 절에 들어가 비구니 행세를 했다. 한데 여색에 심취한 그는 절에서도 본성을 숨기지 못하고 함께 기거하던 비구니 중비와 지원, 소녀 등과 통정하기에 이른다. 그때 중비가 임신을 두려워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찍이 내수(內竪) 김연의 처와 간통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잉태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
그가 말한 김연의 처는 중비의 고모였다. 때문에 양심에 가책을 받은 중비는 사방지와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평소 드나들던 선비 김구석의 미망인 이씨에게 그를 소개했다. 이씨는 사방지의 정체를 알고 나서 반색하며 집안의 침모로 받아들였다. 당시 그녀는 두 자녀를 출가시킨 뒤였지만 여자의 본성을 포기할 만큼 늙지 않았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남녀의 정분을 나누면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발전했다.
조정에 분란이 일어나다
사방지를 사랑했던 이씨는 세종대에 장영실, 이천과 함께 명성을 날린 과학자 이순지의 딸이었다. 한양의 위도를 알아내면서 세종의 신임을 받아 천문역법 전문가로 성장한 이순지는 1442년 조선 최초의 역법인 《칠정산외편》 탄생의 주역이었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서 중국으로부터 조선의 시간을 독립시킨 이순지의 존재감은 여느 중신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들 김유악은 당대의 대학자 정인지의 사위였다. 계유정난과 왕위 찬탈을 적극 지지했던 세조의 총신이 바로 정인지였다.
그렇듯 막강한 배경을 지닌 여인이 기이한 양성인과 사랑에 빠져 세월을 잊었던 것이다. 사방지와 이씨는 여주인과 침모의 관계로 철저히 위장한 채 10여 년 동안 행복한 부부로 살았다. 한데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경계심이 흐트러졌던 모양이다. 세간에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것이다.
“김 대감 댁 마님이 침모를 남편처럼 지극하게 받든다고 하데.”
“듣자 하니 식사도 늘 같이 하고 똑같은 옷을 지어 입는대.”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이씨와 사방지의 행각이 급기야 포도청에까지 알려졌다. 반가의 미망인이 여종과 다정하게 지낸다는 것은 과거 문종의 아내 순빈 봉씨의 경우처럼 대식(大食. 동성애)의 혐의가 다분했다.
그때부터 두 사람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던 포교는 용의자 이씨가 판중추원사 이순지의 딸인 데다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사돈마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겁하며 사건을 감찰기관인 사헌부에 이첩해 버렸다. 일종의 책임 전가였다.
오늘날의 감사원에 해당하는 사헌부는 관원의 기강을 감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히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원로대신들이 관련되어 있는 데다 새롭게 등장한 세조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사헌부 감찰은 은밀히 사방지의 전력을 탐문한 끝에 그와 간통했던 비구니 중비를 잡아들였다.
“사방지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그는 분명 남자입니다. 양도(陽道. 생식기)가 매우 장대합니다.”
수사 초기에는 대식을 의심했지만 중비의 증언에 따라 이제는 엄연한 간통 사건이 되었다. 감찰은 즉시 사방지를 잡아들였는데 외양이 완벽한 여인이라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 그래서 여의 반덕에게 검의를 맡겼더니 사방지는 여자이면서 남자처럼 커다란 생식기가 달려 있음이 밝혀졌다.
수사 결과 두 사람이 남녀 관계를 맺은 것이 분명해졌다. 한데 그 다음 행보가 문제였다. 남녀의 성별이 불확실한 부마의 노비, 공신의 딸이자 사돈마님이 얽힌 전대미문의 사건을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고심하던 사헌부 장령 신송주는 결국 대전에 나아가 임금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했다. 1462년(세조 8년) 4월 27일의 일이었다.
“여경방의 고 학생 김구석의 처 이씨의 집안사람 사방지가 여복을 하며 종적이 괴이하다고 하여 체포해 조사해 보니 음경과 음낭을 갖춘 남자였습니다. 그가 남자로서 여장을 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가두어 심문하게 하소서.”
보고를 받은 세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곁에 있던 부마 정현조에게 조사를 명했다.
“듣자 하니 괴이한 일이구나. 그 집은 그대와 관계가 있으니 승지들과 함께 사헌부로 가서 직접 살펴보도록 하라.”
부마 정현조는 세조의 맏딸 의숙공주의 남편이었는데, 자칫하면 사돈 마님을 욕보이는 일이라 몹시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지엄한 어명을 어찌하랴. 승지들을 대동하고 사헌부로 달려간 정현조는 사방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인의 복색을 한 그는 겉보기에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러나 이미 남자임이 밝혀진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사방지의 하의를 벗기고 국부를 확인해 보니 과연 음경과 음낭이 분명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그는 이의(二儀)의 사람인데, 남자의 형상이 더욱 많습니다.”
정현조의 보고에 따라 세조는 사건의 내막을 파악했지만 더 이상 상황을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헌부의 수사 담당관인 장령 신송주를 다그쳤다.
“네가 이 일을 조사하면서 이씨의 가비 소근 소사에게 곤장을 치면서 심문을 여러 차례 했다는데, 새삼스럽게 무엇을 더 알아내려고 사방지의 고문을 청하느냐?”
“그가 남자로서 여복을 하였으니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고신을 청한 것입니다. 소근 소사는 신문할 때 태 1, 2도를 때렸을 뿐입니다.”
“황당한 사람이 여식의 집을 출입하는데 이순지는 가장으로서 금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너희들이 간통 현장을 잡은 것도 아닌데 재상가의 일을 경솔하게 의논하고, 또 이런 괴이한 일을 품의하지도 않고 멋대로 조사했으니 참으로 고약하다.”
세조는 그처럼 호통 치면서 신송주를 비롯하여 수사에 동참했던 사헌부 관리들을 파직시켜버렸다. 모른 체 눈감아주어도 될 일을 수면 위로 드러내 왕실과 재상가의 분란을 조성했다는 일종의 괘씸죄였다.
딸바보 이순지의 변명
세조가 생뚱맞게 임무를 충실히 행한 사헌부 관리들을 처벌한 것은 조정에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틀 뒤인 4월 29일 의금부에서 임금의 월권을 지적하면서 사방지 사건을 법대로 마무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범인을 심문한 죄로 관리를 파직하는 것은 실로 부당합니다. 사방지를 형신하여 사건을 마무리 짓는 것이 마땅합니다.”
“나의 조치는 사방지 때문이 아니라 무고한 소근 소사 때문이다. 그리고 사방지는 병자임에 분명하니 추국을 허락하지 않겠다.”
신료들의 추궁에도 세조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좀 찜찜했던지 그날 저녁 태도를 바꾸어 사방지에 대한 국문을 명했다. 그러면서 도승지 홍응에게 형식적인 조치만 취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것은 국가 원로인 이순지에 대한 배려였다. 하지만 사헌부 관리들이 계속 항의했고 급기야 길창군 권남까지 나섰다.
“전하께서 이 일을 묵과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부디 현명한 조치를 취하십시오.”
“정말 불쾌하구나. 그대조차 내 마음을 모르는가. 어찌하여 공멸의 길을 걷고자 하는가. 정 그렇다면 소원대로 해주겠다.”
마침내 세조는 5월 2일 의금부에 명하여 사헌부 관리들을 국문하게 한 다음 이순지를 파직시켜 버렸다. 하지만 곧 이성을 되찾은 듯 열흘 뒤 그를 복직시켰고, 또 열흘이 지난 22일에 하옥되어 있던 사헌부 관리들을 모두 석방시켰다. 그와 함께 세조는 이순지를 불러 이렇게 명했다.
“그대의 딸과 관련된 사건이니 사방지의 처분은 알아서 하도록 하라.”
졸지에 임금으로부터 사방지의 처벌을 위임받은 이순지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방지를 엄히 다스리자니 딸의 부정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가볍게 처결하자니 세상의 이목이 두려웠다. 하는 수 없이 그는 형식적으로 사방지에게 곤장 십여 대를 안긴 다음 서울 근교에 사는 외거노비 집으로 쫓아내 버렸다.
이순지가 그 정도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지만 천방지축인 딸의 행보가 문제였다. 이미 오랫동안 사방지를 지아비로 섬겨온 이씨는 온천에 목욕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를 따라갔고, 몇 달 뒤에는 다시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아들 김유악이 사방지를 멀리하라고 울면서 간청했지만 이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제발 가문을 생각해 주십시오.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에 제 귀가 멀 지경입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 사방지는 그냥 침모일 뿐이다.”
그녀는 가족들의 반대와 세간의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사방지를 떠받들었다. 실로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신분도 없었다. 늙은 아버지 이순지는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 조정 대신들이 연회석상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안주꺼리로 사방지를 들먹이면 그는 얼굴을 붉히며 역정을 냈다.
"두 사람 사이에 애가 없지 않은가. 사방지는 틀림없는 여자야."
사람이 아닌 사람
그로부터 3년 뒤인 1465년(세조 11년) 6월 11일 이순지가 세상을 떠났다. 조선을 거듭나게 한 과학자에 대한 예의였을까. 대신들은 사방지와 이씨의 관계를 2년 동안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았다. 때문에 두 사람은 가시버시 정답게 부부생활을 지속했다.
하지만 괴상한 노비와 양반 부녀자의 불륜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었다. 1467년(세조 13) 4월 5일 조정에서 다시 사방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한명회를 비롯한 여러 신료들이 두 사람의 추문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며 세조에게 처벌을 권유했던 것이다.
“사방지가 다시 이씨의 집에 들어가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청컨대 멀리 귀양 보내십시오.”
“전에도 국문하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거론하면 법이 가볍다 하지 않겠는가. 그냥 둘이 살게 내버려 두어라.”
세조가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신숙주와 심회가 나섰다.
“사방지는 일찍이 비구니와 간음해서 환속시킨 바도 있습니다. 그 자를 내버려두면 도성 안에 풍속이 더럽혀질까 두렵습니다. 풍문에 따르면 백성들은 사방지(舍方知)를 일컬어 서방적(西房的)이라고 한답니다.”
속담에 ‘사위는 서방(西房)에서 묵는다.’는 말이 있다. 신료들은 이를 빗대어 사방지가 이씨의 서방 노릇을 하고 있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들의 공세에 지친 세조는 입시하고 있던 형조 판서 서거정에게 물었다.
“이 사실을 경도 아는가?”
“물론입니다. 무릇 하늘에 달려 있는 도리를 음양이라 하고 사람에게 달려 있는 도리는 남자와 여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데 이 사람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니 죽여도 용서할 게 없습니다.”
서거정이 누구인가. 일찍이 그는 명나라 학자들로부터 해동의 기재라는 찬탄을 받았고, 조선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함)을 역임했으며 《동인시화》, 《동문선》 등의 저서를 남긴 일세의 명유였다. 세조는 그를 들러리 세워 이전의 판결을 되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단호한 판결에 승복한 세조는 좌승지 윤필상에게 명했다.
“이 사람은 인류가 아니다. 더 이상 사람들과 함께 살게 할 수 없으니 외방의 노비로 영구히 쫓아내도록 하라.”
세조는 결국 사방지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니 뭇 노비들과 함께 어울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그 결정에는 이씨와 사방지가 15년 동안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깡그리 무시되었다.
이씨의 아버지 이순지가 세상을 떠난 마당에 그들을 지켜줄 보호막은 존재하지 않았다. 왕은 이씨의 사돈 정인지나 사방지의 주인 안맹담의 집안과는 상관없는 사방지 개인의 질병으로 처리해 버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씨에 대한 처벌은 한 마디로 논의되지 않았다. 그녀를 치죄하면 다시금 골치 아픈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어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튿날인 4월 6일 사방지는 체포되어 곤장을 맞은 뒤 도성에서 쫓겨나 신창현의 관노가 되었다. 세조는 안맹담 집안의 사노비를 공노비로 만든 셈이라 장예원에 명하여 그와 나이가 비슷한 공노비를 대신 지급하게 했다.
사랑의 뒤끝, 가문의 왕따
사방지 사건의 여파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469년(예종 1년) 6월 27일 정인지는 임금에게 글을 보내 억울함을 호소했다. 내용에 따르면 그날 괴한 4명이 그의 집 인근에 있는 딸의 집, 즉 이씨의 아들 김유악의 집 뒤뜰에 침입했는데 노비 막생이 한 사람을 잡아 까닭을 물었더니 소가죽을 거래하는 범인들을 쫓아 들어왔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정인지가 범인의 호패를 빼앗아 사헌부에 고했더니 아전들이 오히려 막생을 잡아 가두고 고문한 다음 조례 10여 명을 출동시켜 자기 집 노비 잉질금과 계집종 소비를 잡아다 구타했다는 것이다. 한데 예종의 명을 받은 의금부에서 조사해 보니 모두가 허위로 판명되었다.
《예종실록》의 사관은 이 사건에 대하여 정인지가 사방지와 음행을 일삼은 이씨의 아들 김유악의 하소연을 믿고 가볍게 처신했다며 비웃었다. 그로 인해 정인지 가문과 김유악 가문은 여타 사대부 가문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따돌림을 당했다. 김유악은 훗날 도총부 도사, 군기시 판관 등을 거쳤지만 그때마다 신료들의 반대와 조롱을 받았다.
1473년(성종 4년) 11월 8일 성종이 김유악을 경상도 도사로 임명하려 하자 대사헌 서거정이 가문의 추문을 이유로 반대하기도 했다. 연산군에 이르러서는 아예 부마를 선택함에 있어 김유악의 후손은 제외되었다. 양성인 노비 사방지와 반가의 여인 이씨의 지독한 사랑은 후손들에게 그처럼 깊은 상흔을 남겼다.
글: 이상각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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