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44) 시의 길, 시인의 길 – 하얀 까마귀 – ① 습작시절/ 시인 조재도
시의 길, 시인의 길 – 하얀 까마귀
네이버 블로그 - 김용식 문학서재/ 아름다운 사람 / 조재도
안녕하세요?
여러분을 만나게 돼 정말 반갑습니다. 글로 쓰는 원고인데 마치 강의하는 것처럼 시작했네요. 하지만 뭐 괜찮죠. 말이나 글이나 자기 생각을 잘 나타낼 수만 있으면 되니까요. 욕심 같아서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없어 안타깝군요.
사실 이 글을 쓰기 전 고민 많이 했습니다. 써야 할 내용이 ‘시 창작 강의 노트’라는 편집자의 말을 듣고서, 어떻게 써야 할지 윤곽은 떠오르는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생각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기도 하고 바람 빠진 튜브처럼 쪼그라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써야겠다 싶어 메모할라치면 홀연 공중에 흩어져 막막하기만 하였어요. 하여 그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요. 시 창작에 관한 내용만 쓴다면 이야기가 너무 간소할 것 같고, 그렇다고 내 이야기를 좀 섞자니 자칫 본말이 전도될 것 같았어요. 하여 필요한 대로 말을 하되 간략함을 미덕으로 최소한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는 범위 내에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① 습작시절
▶ 사람에게는 누구나 원체험이라는 게 있습니다. 원체험이란 자신이 겪은 체험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체험, 체험 중의 체험, 엑기스라 할 수 있죠. 여러분이 처음 시를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내 경우엔 형 때문이었어요. 내게는 말도 못하고 몸이 불편한 형이 한 분 계십니다. 어려서 경기(驚氣)를 했는데 그때 침을 잘 못 맞아 그리됐다고 하더군요.
나는 어려서 형을 보며, ‘왜 형은 말을 못할까? 아마도 형은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이 따로 있을 거야.’, 이런 의문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면서 식구들이 잠든 밤이면 형에게 말을 가르쳤죠.
달밤
등잔불 깜뭇 눈을 감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여섯 남매가 가로세로 누워 자는 밤
폭 좁은 무명이불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눈을 뜨고 있었다
왜 형은 말을 못할까
도롬도롬 생각하며
마음을 털며
발등이 보오얀 달이 마루턱을 오르고 있었다
그 후 자라서 나는 형이 하지 못하는 말을 내가 대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시작한 게 문학이었습니다.
▶ 나는 고2 때 처음 시를 썼어요. 그야말로 어느 날 불쑥 쓰게 되었지요. 나는 그때 서울에 있는 서라벌고등학교에 다녔는데, 봄이었어요. 해마다 봄이 되면 교내 시화전이 열렸는데, 전시된 아이들 시를 보고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더군요. 그래서 쓴 시가 「사온(四蘊)」이라는 거였어요. ‘사온’이란 제목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오온개공(五蘊皆空)’에서 따온 말입니다. 오온이란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가리키는데, 형은 입이 고장나 말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제목을 「사온」이라고 했던 거죠. 내용도 벙어리 벙어리하고 누가 놀릴 때면 형이 화를 낸다는 그런 거였습니다.
그리고 그뿐이었죠. 다시 나는 시라는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특별히 문학적 소양이 풍부했던 것도 아니고, 또 시를 쓸 기회도 없었으니까요. 늘 사고치고 말썽이나 피우는 학생이었으니, 솔직히 시가 다 뭐겠습니까?
▶ 그러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게 대학 1학년 때, 문학 서클에 들어가서였습니다. 그땐 오로지 술과 시, 그리고 책 읽기였어요. 한 마디로 읽고 쓰는 데 미쳐 있던 때였죠. 그러던 중 3학년 때 박정희가 죽었고, 4학년 때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어렵게 졸업을 하고 교직에 첫발을 내딛은 게 1981년 3월입니다.
사회에 나와 보니, 비로소 학교 다니며 시 쓰던 때가 천국이었음을 실감했습니다. 주위에 시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시간이 갈수록 시가 뭔지, 내가 쓰는 시가 과연 시이기나 한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도 어쨌든 쓰고 또 썼죠. 그땐 정말 3일 동안 시를 쓰지 않으면 그걸 되찾는 데 석 달이 걸릴 거라는 생각에 쓰고 또 썼어요. 오죽했으면 시를 쓰기 위해 학교 발령 받고서도 버스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시골에 방을 얻어 출퇴근했겠으며, 군부대에서 방위 받을 때에도 집에서 다니지 않고 부대 앞에 농가를 얻어 자취했겠어요.
전 솔직히 그때 시가 나를 버리고 홀연히 증발해버릴 것 같아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릅니다. 책을 읽거나 밥을 먹을 때 혹은 차를 타고 어딘가 가고 있을 때에도 시가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심지어는 밤에 잠을 자는 동안 어떤 동자(詩童)가 꿈에 나타나 시를 막 불러줍니다. 그러면 나는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머리맡에 놓아둔 종이에 정신없이 받아 적습니다. 다음 날 다시 보면 알아보지도 못할 것들이 거기 적혀 있어요. 완전히 미친 상태였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렇게 미치지 않았더라면 그 후 내가 시를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한마디로 시에 대한 열정 하나로 견뎠던 거죠.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데 가장 중요한 게 열정이라고. 시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계속해서 시 쓰기가 어렵습니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요, 남에 알아주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에서 그래도 시를 놓지 않고 쓰려면 시에 대한 열정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 그렇게 한 7년을 시에 미쳐 있었어요. 내가 대학에 들어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게 1978년이고 이제부터 얘기하려는 시 ‘너희들에게’를 쓴 것이 1984년이니까 거의 7년인 셈이죠. 그동안 나는 혼자 자작시집을 두 권 묶기도 했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를 소재로 하여 한 권 분량의 장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나의 시 쓰기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나는 방위 복무를 마치고 공주농고에 발령 받아 근무하고 있었어요. 그곳에서 농업과 담임을 하며 학급문집을 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쉬는 시간이었어요. 이상하게 시가 한 편 써질 것 같더라고요. 하여 교무실 자리에 앉아 죽 써 내려갔는데, 어찌나 막하지 않고 한꺼번에 썼던지 마치 머릿속에 외우고 있던 걸 받아 적는 느낌이었어요.
너희들에게
싹수있는 놈은 아닐지라도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은 아닐지라도
나는 너희들에게 희망을 갖는다
오토바이 훔치다 들켰다는 녀석
오락실 변소에서 담배 피우다 걸렸다는 녀석
술집에서 싸움박질하다 끌려왔다는 녀석
모두 모두 다 더 없는 밀알이다
공부 잘해 대학 가고 졸업하면 펜대 굴려
이 나라 이 강산 좀먹어 가는
관료 후보생보다
농사꾼이 될지 운전수가 될지
모르는 너희들에게 희망을 갖는다
이 시대를 지탱해 가는 모든 힘들이
버려진 사람들, 그 굵은 팔뚝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공무원 관리는 되지 못해도
어버이의 기대엔 미치지 못해도
동강난 강산 하나로 이을 힘이 바로 너희들
두 다리 가슴마다 들어 있기에
나는 믿는다, 통일의 알갱이로 우뚝우뚝 커 가는
건강하고 옹골찬 너희 어깨를
시끌시끌한 교무실에서 정말 십 분도 채 걸리지 않고 쓴 시였어요. 헌데 이상하지 뭡니까? 시를 쓰고 나서 두 가지 느낌이 확고하게 들었어요. 하나는 그동안 내가 시를 쓰면서 씨름해왔던 문제, 이를테면 시어를 선택하고 표현을 세련되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던 문제 등, 이런 잡다한 문제들이 한꺼번에 싹 해결된 듯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동안 나를 감싸고 있던 시의 막(幕)이 툭 터져 버렸다고나 할까. 태아를 감싸고 있던 막이 툭 터지면서 비로소 아기가 숨을 쉬고 생명을 얻어 울음을 터뜨리는 것과 같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시를 쓰고 나서 그동안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시에 대한 조급증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 전에는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게 옳은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게 옳은 것 같았어요. 이 시를 읽으면 이것이 좋아 보이고 저 시를 읽으면 저것에 현혹되었죠. 또 누가 내 시를 두고 형편없다고 하면 낙심천만하여 전전긍긍하였고, 좋다고 하면 겉으론 겸손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고만장하였습니다.
헌데 이런 증상이 싹 가신 겁니다. 이제 더 이상 조급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시가 나를 버리고 홀연 떠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지요. 다른 사람 말과 시에 내가 휩쓸리지 않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래요. 7년여의 악전고투 끝에 찾아든 평온함.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나일 수 있었습니다.
< ‘나를 바꾸는 시 쓰기, 시 창작 강의 노트(유종화 엮음, 새로운눈, 2019)’에서 옮겨 적음. (2020.12.10.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44) 시의 길, 시인의 길 – 하얀 까마귀 – ① 습작시절/ 시인 조재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