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힘을 쓰는 방법
역사에 나오는 옛날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간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을 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가 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리하여 나 또한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청소년 시절에 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필자 역시 뭔가 가슴 깊은 곳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샘 쏟듯이 쏟아났다는 것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리하여 슈타이너의 주장, 청소년 시절에는 뭔가 인류를 위한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닌다는 주장에도 공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럴려면 먼저 자신의 힘이 극대화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힘이 극대화될 수 있을까가 질문이다. 바로 말하면 '자아의 힘'을 쓰는 일이다.
필자가 슈타이너의 책을 읽으면서 참 신기하다고 느낀 것이,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그 수준에 맞게, 그 수준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슈타이너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내용이 그대로 진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신세계는 보이지 않기 떄문에 무엇을 모르는지 또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물을 수도 없는 마치 길없는 길을 가는 것과도 같은데, 슈타이너의 책에는 그 수준에 이르면 다음 단계에 갈 수있게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마치 등불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제자들이 물었다고 한다. "스승님이 열반하시면 우리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네이버 백과 사전 참조). 이른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다. 이와 같이 슈타이너의 책이 법으로 등불처럼 필자를 정신세계로 안내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은 누구라도 정신세계를 가고 싶으면 슈타이너의 책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슈타이너의 이런 점이 거의 부각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를 짐작하면 정신세계는 반드시 체험해야 정신세계를 갈수가 있는데, 책으로 체험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정신세계를 가는 방법으로 어떤 단체를 선택하여 체험을 하고, 또 그 단체에는 스승이 있기 떄문에 정신세계를 가는 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현 시대는 과거 시대와는 다르다. 유튜브가 나오고, 세계가 이웃과 같이 교류하므로 언제든 원하는 스승을 만날 수가 있다. 언제나 내 수준에 맞는 스승을 유튜브를 통해서 만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또 체험은 현실 삶이 곧 체험으로, 현실 삶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 삶에서 자신의 내부에 집중을 하면, 그것이 곧 정신세계의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슈타이너의 책으로 정신세계를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현실에서 자신의 내부에 어느 정도 집중을 하는가 그것이다.
현재는 발도르프 교육이 슈타이너의 이름을 -그 정도로나마- 지탱해 주는 듯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정신세계를 가야하는 이유와 그 길을 가는 것이 슈타이너 인지학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교육 역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간의 본성은 정신세계를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정신세계를 가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본성 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발도르프 교육이다. "육체를 통한 우회로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가르친 내용이 아스트랄체와 '나'에 들어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청소년을 위한 교육, 2023, 101)." 교육은 겉으로 보이는 육체를 통하지만 육체를 우회로로 접근해서, 아스트랄체와 '나', 아이의 자아에까지 들어가야 한다. 아스트랄체는 감정체이므로 아이가 재미있고 즐거우면 아스트랄체에 연결이 되었다. 자아는 현실에서 상속에 있기 때문에 본래의 자아에 연결이 되어야 한다. 그 방법이 꿈꾸는 의식의 감성을 통해서 무의식에 내재한 자아에게 연결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정신 자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연결이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파악이 어렵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간의 본성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여담으로 학군이 좋은 곳이 지정되고 학부모들이 몰리는 것은 좋은 학군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분위기가 형성이 되어있기 떄문이다. 특히 청소년 시절에 좋은 아이들을 만나서 얻는 좋은 경험은 평생 영향을 주므로 좋은 학군을 가는 것이다. 그 이유가 정신이 서로 서로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인데, 이 경우에도 인간의 본성을 이해한다면 그 이유 또한 알수가 있는 것이다. 자아의 힘을 극대화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일이다. 여기에 따라오는 것이 교육이다.
다음은 자아의 힘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다. 물론 인간의 본성을 통한 방법이다. 먼저 상속의 자아가 아닌 본래의 자아(상을 벗은 자아)를 만나야한다. 만나는 방법이다. 첫째, 스스로 의지를 내야 한다. 의지를 내면 본래 자아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상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자아는 의지를 내지 못한다. 그림자는 의지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옛말에 생각으로 기와집 백채를 지어도 현실에서는 아무 결과가 없다는 말은 현실의 자아가 상속 자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속의 자아가 의지를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우리가 의지를 내기가 힘이 드는 것이다.
먼저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 같은 시간에 책을 보는 습관, 꾸준히 피아노를 치는 습관 등등, 습관이 되면 저절로 그 시간만 되면 그 행동을 한다. 습관이 되었다는 것은 에테르체가 변했다는 의미이다. 에테르체는 습관을 형성하고 기억을 관장한다고 한다. 에테르체는 생명을 영위하는 힘인데 생명을 영위하는 힘은 굉장히 클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생명의 힘을 거스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에테르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습관이 형성되면 그 습관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에테르체가 움직이면 본래 자아가 에테르체에 따라서 의지를 내는 것이다. 그래서 습관을 만들때까지는 참고 이겨야 한다.
이때 상속의 자아에게 휘둘리는 경우가 많은데 휘둘리면 안 된다. 예컨대 힘이 든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몸이 찌부둥하는 등 귀찮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쌓이는 것이 카르마이다. 카르마가 쌓이면 더욱 이기기가 어렵다. 사실 이때 본래 자아는 진리와 같은 존재이므로 상속 자아의 이런 생각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본래 자아가 하는 생각, 진리를 생각한다면 카르마를 이길 수가 있다. 대표적으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본래 자아가 전면에 나서므로 극복할 수가 있다.
카르마를 극복하고 습관이 되면 본래 자아가 전면에 나섰다고 볼수가 있다. 그러면 정신세계의 문이 열린다. 하는 일이 재미가 있어지고, 정신세계의 통지, 직관을 받을 수가 있다. 다른 말로 하는 일에 뭔가 능력이 생겼다는 의미이다. 이 능력이 자아의 힘이다. 정신의 속성은 한번 정신세계에 들어갔다고 해서 계속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해서 노력해야 같은 힘을 얻는다. 다시 이를 극대화해야 한다.
사실 본래 자아는 우주에 연결되어있다. 인간은 물질세계에서 살면서 지구의 힘을 받지만, 우주의 힘도 받는다. 이를 모르는 것은 인간의 오성이 우주에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에테르체는 탄생 시 우주 에테르에서 편취한 것으로 우주 에테르와 동일한 힘에 의해 영위된다. 즉 본래 자아는 우주 에테르에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만약 자신의 본래 자아에 연결된다면 우주 에테르의 힘을 쓸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현실에서 육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이 정신세계에 연결될려면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현실에서 능력이 있다는 말은 그 능력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정신세계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인정하고 파악할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굉장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육체를 벗어날 정도,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일이다. 둘째, 재미가 있으면 본래 자아를 만날려고 노력해야 한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으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간단한 방법으로 몸에 힘을 빼고 본래 자아를 인정하면 우주와 하나가 되어 있는 자신을 만난다. 명상 자세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면, 우주와 하나가 된 자신을 만날 수가 있다.
일이 힘들때 몸에 힘을 빼고 무심하게 그 일을 하면 일이 잘 되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본래 자아가 전면에 나선 경우이다. 본래 자아는 원래 우주에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본래자아가 전면에 나서면 우주의 힘을 쓴다는 것이다. 본래 자아는 진리와 같은 존재로 만약 사심이 있으면 절대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몸에 힘을 빼는 것은 육체를 벗어나기 위함이고, 무심하게 그 일을 하는 것은 사심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옛 위인들이 어려운 일을 할때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한 경우가 없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이다.
첫 번째, 자아의 힘을 쓸려면 본래 자아가 전면에 나서도록 의지를 내어서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습관이 되면 본래자아가 전면에 나선 것이다. 그러면 우주에 연결된 본래 자아를 만나야 한다. 두 번째, 본래 자아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우주에 연결된 본래 자아를 만날 수가 있다. 다만 자신이 모를 뿐, 우리는 언제나 본래 자아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어떤 일을 할때 새로운 생각을 떠올랐다면, 그 순간이 곧 본래 자아가 전면에 나선 순간이다.
우리는 현실의 일을 꾸준히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신의 속성으로 유지한다면 우주의 힘을 쓸 수가 있다. 현실의 감정이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 길가에 난 풀 한포기도 경외하는 마음이라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 감정이 이와 같은지를 늘 성찰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아의 힘을 쓰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