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건국 200여년 더 빠르다" 北학계日심포지엄서 주장 논란일 듯
"압록강 적서총 발굴결과 기원전 277년 확인.광개토대왕,동명왕 17세손"
고구려의 건국연대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기원전 37년보다 200여년 빠른 기원전 277년이라는 북한 학계의 주장이 공식 제기됐다. 이같은 주장은 기원전 37년을 고구려 건국연대로 보아온 국내 학계에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24일 일본 도쿄(東京)에서는 ‘조선장학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남북 고대사학자들의 합동 심포지엄이 열려 북한 사회과학원 소속 고고학연구소 석광준(石光濬) 교수와 채태형(蔡泰亨) 역사연구소 발해사연구실장이 최근 북한측의 연구성과를 발표했다.
남한측에서는 한병삼(韓炳三) 전 국립박물관장과 이기동(李基東) 동국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석 교수는 이날 ‘고구려 고고학의 새로운 성과’의 발표를 통해 고구려 건국연대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기원전 37년이 아니라 기원전 277년이라는 사실이 최근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북한 학계가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고구려 초기의 대표적 무덤군인 적석총(積石塚)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한 결과 무덤형식이나 부장품이 기원전 3세기의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또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을 동명왕의 12세 손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광개토대왕비에는 17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고구려의 건국이 기원전 3세기라는 것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역사가들이 의도적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축소, 왜곡한 결과라고 석 교수는 해석했다.
석 교수는 또 황해도 신원군 아양리와 월당리 일대에서 고구려의 제2 수도였던 남평양 유적을 발견했다고 소개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학계의 논쟁거리였던 안악3호 고분의 주인공은 이 곳에서 100리 가량 떨어진 남평양에서 백제와 싸우다 전사한 고국원왕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발해역사 및 고고학의 새로운 성과’의 논문을 발표한 채 실장은 “발해의 피지배계층이 말갈인인가 고구려 유민인가에 대해 이견이 있다”고 전제하면서 “역사기록을 전면 재검토한 결과 피지배계층도 고구려 유민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발해는 중국 역사에 흔히 나타나는 이민족 통치제도를 전혀 두지 않았고, 소수의 말갈인들이 서북과 동북부 변방지역에서 살면서 중앙 정부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
그는 또 “발해를 당나라의 속국이나 지방정권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발해는 당나라의 통치제도와 전혀 다른 중앙통치기구를 갖고 있던 독립국이었다”고 강조했다.
도쿄〓심규선특파원
국내 학계의 반론
北 BC 277년說 꾸준히 제기… '세손'은 왕의 '代'수 의미
북한 학계가 고구려 건국연대에 대해 기원전 277년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며 90년대들어 꾸준히 제기해 왔다. 이번 발표는 북한측이 구체적인 근거자료를 내놓았다는데 의미가 있다.
서울대 사학과 노태돈 교수는 북한이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을 근거로 삼은 것에 대해 ‘17세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노 교수는 “광개토대왕빙 나오는 ‘세손’이라는 말은 왕의 ‘대(代)’수를 나타내는 것”이라면서 “이 경우 ‘삼국사기’의 기록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심포지엄에 참석한 서경대 서길수 교수는 “북한측 발표 가운데 평양 일대 유적지에서 나온 벽화무덤의 숫자가 이제까지 알려진 70여기보다 많은 90기에 이른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지는 등 새로운 성과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남한 학계가 북한 학계의 주장을 보다 긍정적인 자세로 연구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앞으로 남북한 학술교류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서 교수는 또 발해의 피지배계층까지도 고구려유민으로 보는 채태형 실장의 주장에 대해 동감을 표시했다.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인으로 보는 남한 학계의 기존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서 교수는 “고구려 멸망 후 대부분의 지역을 발해가 차지했다”면서 “그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약 300만명의 고구려 유민에 비해 말갈인은 극히 적은 소수민족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야후 사이트에서 퍼옴
첫댓글 기원전 277년이라면 기자조선시대로써 기자조선의 마지막왕인 (기)준이 위만에게 깨져서 남으로 도망가기 이전이다.
기자조선의 시대가 40여세에 역사가 1000여년이 된다. 기자조선의 시대는 중국의 주나라시대와 같이 하므로 주나라시대의 기년이 정립되어야 기자조선의 편년이 가능하다.
고구려의 성립은 기자조선의 시대가 아니며, 위만의 손자 우거가 한무제에게 깨지고 난 이후에 그 혼란기를 틈타 (북)부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추측된다. (북)부여에 대한 검증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성립 및 멸망시기가 자세하지 않으며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이 태어나기전에 멸망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는 북부여의 옛땅을 복구한다는 의미에서 다물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는데, 고구려의 역사를 아무리 늘리려고 하여도 기원전 277년의 건국은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삼한의 건국과 기자조선의 멸망은 같은 의미로써 이때가 기원전190년대에 해당한다. 즉 평양에 나타나는 기원전3세기의 유물은 기자조선이나 삼한사 연구에 쓰여야 하며 석광준 교수는 보다 심사숙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나라 장수 이적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비기라는 서적을 얻는데 거기에는 고구려가 건국 후 800년에 망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기록 외에도 한서에 보면 기원전 37년 이전에 고구려 기사가 나타납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기원전 277년은 무리가 있어도 기원전 2세기 무렵에는 고구려가 건국되었다고 보는 학설이 타당성이 높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