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월 반백년을 반추(反芻)하다 보니,
입가에 미소 지을 일도 많고 낯 찡그릴 일도 적지가 않습니다.
그중 약혼식이 있던 날은 아직도 잊지를 못합니다,
그날 밤은 비가 많이도 왔습니다.
인천 자유공원 근처의 한정식집에서 약혼식을 치렀는데,
이날 혼약을 마치고 약혼녀와 단 둘이 데이트를 하게 됐습니다.
비는 계속 퍼 붙고 있는데 말입니다.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골목길을 걷는데
길 한 복판에 지갑이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약혼식 날 비가 내려 부자로 잘 살겠다는 덕담을 받은 게 불과 몇 십분 전인데
이젠 두툼한 지갑까지 눈에 들어오니 금세 부자가 될 징조 같았습니다.
비 오는 밤이라 행인도 적어 얼른 주어들고 지갑을 펼쳐 보았습니다.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 였습니다. 빈지갑이었습니다.
다시 버리려고 손을 어깨높이만큼 들어 올렸는데 약혼녀가 소리쳤습니다.
‘그거 악어가죽이에요 버리긴 넘 아깝잖아요’
악어가죽이 비싼지 싼지도 모르던 촌놈이-
아무튼 젖은 지갑을 잘 말리고 구두약을 듬뿍발라 놓으니 새것이나 진배없었습니다.
소매치기가 훔쳐 내용물을 다 빼가고 버린 것인지-
아니면 누가 새로 산 것을 잃어 버렸는지-
아무튼 이날 이 후 돈 몇 푼 넣지도 않은 가죽지갑을 들고 다니면서 폼 좀 잡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약혼식 날 비가 와서 잘 살겠다는 덕담도-
비싼 악어 지갑 주운 뒤 이젠 돈만 주으면 된다는 믿음도-
다 소용이 없더라 이겁니다.
약혼식 땐 순딩이 같던 마눌은 이제 기차화통 삶아먹은 것 처럼 소리만 질러대고
분 바르지 않아도 곱기만 하던 눈가엔 잔주름만 잔뜩한 것이
‘마귀과’에 가까워 보이니 말입니다.
덕분에 ‘아- 꿈이여’소리만 연발하며 삽니다.
물론 마눌 입장에서야 속아 시집왔다고 투덜대겠지만 말입니다.
인생사는 거-
약혼식 할 때 기분 같진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악어지갑 주었을 때 이젠 돈만 벌면 된다는 흥분은 좀 오래 갈 줄 알았습니다.
서산에 해 걸리면 마음만 급해 진다더니
요즘 내 꼴이 그 꼴입니다. 그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