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살면 되는 것임을!
김윤옥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어디서 오는지 귀뚜라미가 집안으로 들어와 상주한다. 밖으로 내보내고 싶어도 말 못하는 사정이 있거니 하고 그냥 지낸다. 장조와 단조를 적절히 배열해가며 구성진 소리로 노래하지만 한 밤중이 되도록 친구를 못 만난 연유인가? 솔로이스트들의 음악회는 지속된다. 살아 있는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자 열창을 한다. 간간이 쉬어가며 부르는 노래 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울음소리로 변조되어 간다.
애처로운 음의 파동과 진동이 있어서인가 듣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밤이다. 카페인 성분 때문일까? 삼경이 되어 가는 데도 몸은 고단한데 의식은 더욱 명료해지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거실로 나와 서성이다 몇 권의 책이 포개져 있는 작은 책상 위로 눈이 머문다.
사랑할 때는 별이 되고,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천로 역정,
윤동주 시집,
그리고 오늘의 양식들이다.
불면에 대한 정성 분석을 해보아도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마음은 게속 부대낀다. 녹차를 마셨기 때문도 아니고 귀뚜라미의 서글픈 사연을 알았음도 아니다. 서시序詩에서 나오는 구절로 인함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애송하는 시 한 줄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다시 표현하자면 죄책감이다.
영혼이 없는 미소를 만들지 못할 뿐 아니라 보내지도 못하는 지병이 있다. 만나면 반가운 이웃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이웃이 있다. 후자의 경우 우연히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될 때 마음속으로 비는 말이 있다. “ 긍휼을 베풀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가랑잎 나비 신자라는 말이 있다. 나비가 날개를 펴고 있을 때는 아름다운 색을 지니고 우아하게 날아다니지만 날개를 접으면 갈색으로 변해 볼품이 없는 낙엽처럼 보이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모범생들이나 바깥세상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 나비를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가라앉는다. 오늘 오후 있었던 거북스런 일과 연관되어서이다. 녹말가루에 물을 부으면 서서히 침전하며 응고되듯 이미 심연에 내려앉은 상한 심령은 무엇으로도 풀리지 않는다. 끝내는 자신과 마주하는 절대 고독의 시간만이 흐를 뿐 형벌처럼 이 밤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처연한 마음이 된다.
내면의 평화를 찾고 싶어 음반을 얹어 놓는다. 낮은 음으로 연주되는 부르흐의 콜니드라이 (Kol Nedrei), 번역하면 신의 날, 속죄일에 불려지는 의미심장한 곡이다. 깨어진 서약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청원의 기도를 히브리 선율에 담은 음악이다. 지키지 못한 크고 작은 서약들로 번민하는 날에 찾아듣곤 하지만. 몇 번을 들어도 울적한 마음은 계속 남아 있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있다.
밤을 지샐 것 같아 고향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그녀와 얘기를 할 때에는 포근한 솜이불을 덮는 기분이다. 영혼이 맑은 친구이자 좋은 상담 가이다. 허심탄회하게 가리는 것 없이 얘기하다 보면 결미는 이렇다. “그게 바로 너야, 잘하고 있는 거야. 그 이상 무엇을 바래?” 그러면서 나의 마음을 다독여 준다. 어린 시절 종아리를 맞아가며 교회를 다녔던 신실한 벗이다. 그와 함께 신의 은총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은총에 의해 신을 닮는다”고 얘기했었다. 편지 대신 한 줄씩 참회의 글을 써내려 가면서 마음을 비우니 달빛도 슬며시 찾아와 고요히 창가에 머문다. 막다른 길에서 배회하다 제자리로 돌아오니 안도감이 든다. 한참을 돌아온 것 같다.
죽어 가는 것들을 어떻게 사랑하며, 나그네 길을 가야 하는 것인지?
사랑하고 (Love) 웃으며 (Laugh) 살아라 (Live)
액자 안에 갇혀 있는 글자들이다. 벽에 걸려 있는 말대로 그렇게 살면 되는 것임을! 귀뚜라미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풀어놓았나 보다. 적막한 가운데 진眞이요, 선善이요, 미美라고 한 전인격의 참회를 마치며 동이 트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