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60. 병자호란
치욕의 그 날을 생각하며.
김삿갓이 그로부터 두어 달 이천 땅을 떠돌아 다니다가
광주 땅으로 들어섰을 때는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사람이 사는 세상사는 무던히 변덕스럽지만 계절의 변화는 매년 어김없이 돌아온다.
어제 까지만 하여도 추위를 느꼈건만 입춘이 지나고 보니
조금만 멀리 걸어도 등골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봄볓에 한결 넉넉해진 김삿갓은 문득 시 한수를 읊조려 본다.
연연연거 무궁거年年年去 無窮去
해마다 해는 가고 가고 끝없이 가고
일일일내 불주래 日日日來 不晝來
날은 날이 날마다 끝없이 오고 있네
연거일내 내차거 年去日來 來叉去
해는 가고 날은 와 오감은 끝이 없는데
천시인사 차중최 天時人事 此中催
우주의 모든 일이 그 속에서 이루어지네.
사람의 일생이란 하루 하루가 쌓이고 쌓여 해가 바뀌고,
그런 해가 쌓이고 쌓여 인생이 모두 지나간다.
어느덧 돌아 보면 아무 것도 뜻대로 된 것 없는데
무정한 세월 탓만을 하는 것은 아닌지?
만사개유정부생공자망
萬事皆有定浮生空自忙
세상사 모든 일이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가건만 사람이 제 혼자 바쁘게 돌아간다.
김삿갓은 모처럼의 봄볕을 맘껏 받으며 무심히 길을 걸었다.
그러다 보니 남한강이 가까워진 것 같은데
삼전도에 이르러 문득 눈에 띄는 비석이 있었으니,
비문에 새겨진 글은 "대청황제 공덕비大淸皇帝 功德碑"였다.
김삿갓은 그 비석을 보는 순간
병자호란의 치욕이 머리에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진땀이 솟아났다.
이 비석은 병자년 호란 때 청태종 누루하치가
남한산성에 은거하던 인조 대왕에게 항복을 받은 뒤 우리로 하여금 강제로 세우게 했던 치욕의 비석이었기 때문이다.
김삿갓은 남한산성 위에 올라 병자호란의 치욕의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1627년 滿州의 여진족 추장인 누루하치가 後金이라는 나라를 새로 세운 뒤 조선에 국교를
수립(형제의 나라 관계)할 것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그 때 조선은 전통적으로 명나라와의 국교가 두터웠던 관계로
우리와 같은 핏줄인 청태조 누루하치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도 않았다.
명나라는 불과 35년 전인 1592년,
조선 땅에서 벌어진 왜적의 침입(임진왜란)을 함께 막아낸
조명朝明연합의 한 나라였으며 은혜(?)를 베푼 나라였던 것이다.
날로 강성해져가던 후금(청)의 침공을 받고 있던 명은
조선(광해군)에게 파병을 요구하게 되고, 친명사대파와 교린파의 대립하던 조선 조정은
강홍립을 도원수로하는 조선군을 명의 요구대로 파병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동북아지역의 정세를 어느정도 읽고 있었던 광해군은 파병되는 도원수 강홍립에게
전투를 피할 수 있는 대로 피하라(투항?)는 밀명을 주고
조선이 후금과 전쟁할 뜻이 없음을 후금이 알게 하였기에
명과의 전쟁에 더 급했던 후금은 명과의 전투에 전념하여
만주 북부지역을 장악하고 대륙의 중원으로 진출로를 얻게 된다.
그런데 그때 친후금정책을 펴오던 조선왕 광해임금이
친명파들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실각, 폐위되자
후방을 인정시킬 필요성이 갑자기 커진 후금은 조선을 제압하려는 명분을 만들었는데
지난날 조선이 형제국의 관계를 맺자는 자신들의 요구에 거절하였고,
또 명의 지시에 따라 조선군을 부차전선에 파병한 일 등등을 이유로
반후금 노선을 취하고 있던 인조의 조선에 사실상
선전포고(그때 조선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요구)를 하게 되지만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가 아직도 세계 최강국으로만 알던
친명사대파에게 장악되어 우물안 개구리 같았던 조선 조정은
이미 무너져가는 명나라가 또 한번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줄 것이라 믿고
후금의 요구를 무시에 가까운 무대응으로 나가자
후금의 누루하치가 인조 14년(1636년) 저들의 국호를
청으로 고침과 동시에 십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왔다.
그 해가 마침 병자년丙子年이었고,
우리는 이 전쟁을 "병자호란" 이라 부르게 되었다.
청태종 누루하치가 십만 대군을 몸소 이끌고 심양(봉천:奉天)을 떠난 것은
그해 12월 12일이었고 그로부터 여드레 뒤에는 압록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그때 의주義州 부윤 임경업 장군은
백마 산성을 굳게 잠그고 적의 공격에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자 청군은 일부의 병력으로 백마 산성의 공격을 계속하면서
주력 부대는 한양으로 한양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군해 오는 청군에 크게 위협을 느낀 조선조정에서는
척화론과 화친론이 분분한 가운데 전쟁에서의 대책과 지원을 세우지도 못하고 급기야 임금이 몸을 피하는 몽진을 계획하게 되었다.
한양 인근인 강화도는 조수의 간만차가 크고,
내륙과 물살이 매우 빠른 큰 고랑으로 이어져 있는데다
큰 농토와 풍부한 수량水量을 품은 곳이다.
따라서 위급한 국가적 재난을 맞았을 때 제일 먼저 천도의 장소로 꼽는 곳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있는 청군은 한양을 공격하기에 앞서,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먼저 점령해 조선왕(인조)의 몽진길을 막아버렸다.
그러는 가운데 한양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인조임금은 장안의 백성을
고스란히 버려둔 채 그해 섣달 하순 엄동 설한을 무릅쓰고
대신들과 군사 만여 명만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남한 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남한산성은 청군에게 이중삼중으로 에워싸이고
외부와의 연결이 완전 차단된 상태에서 사방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게 된다.
이때 남한 산성에는 얼마되지 않은 군량과 적은 食水 밖에 없었으니,
두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인조는 항복 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시작한지 꼬박 1년 만인 정축년 1월 30일에
인조 대왕은 특사를 보내 화친을 제의하였다.
말이 화친이었지, 실질적으로는 항복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기고만장해진 청태종 흥타이지는 아래와 같은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첫째, 항복을 하는데 앞서 남한 산성 남문 밖 삼전도에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청태종이 항복을 받을 때 올라 앉을 옥좌를 마련할 것.
둘째, 청태종이 수항단에 앉은 뒤 인조는 왕세자와 함께 성안에서 수항단까지 홀몸으로 걸어나와 땅에 엎드려 고두구배(세번 큰 절을 하면서 한 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세번 땅에 찧는 여진의 군신간 예법)를 올릴 것.
셋째 , 두 나라는 그 자리에서 강화 조약을 맺되,
조선국은 청나라가 요구하는 모든 조항을 무조건 받아 들일 것.
넷째, 청태종에게 항복을 올린 수항단을 쌓았던 삼전도에
"대청황제 공덕비"를 새로 세워 영원히 기릴 것.
그러면서 저들의 요구가 단 한가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한 산성을 사흘 안에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엄포도 아울러 밝혔다.
궁지에 몰린 인조는 마침내 청태종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고
왕세자와 함께 수항단으로 걸어나와 청태종에게 땅에 엎드려 항복의 절을 올렸으니
그것은 5천년 역사 이래로 처음으로 겪은 치욕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조선은 여진을 이민족으로 취급하고 오랑캐라 멸시하면서 정벌의 대상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우리와는 같은 핏줄이었는데도 사대사상에 젖었던
신라, 고려, 조선은 중화족의 나라인 당, 송이나 명을 아비의 나라라 생각할 만큼
지도층들의 사대사상은 깊이 빠져있었고 그래서 역사에 대한 무지를 보였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좁은 반도에 자리잡은 약소국이었기에
살아남으려고 대륙 중원의 최강자 당, 송, 명과 한 몸이기를 염원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지도층의 무지가 나라를 위기로 몰아가
이 때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강화조약의 내용 가운데서 중요한 몇 가지는
1. 조선의 국왕은 청나라에 대하여 臣의 禮를 행할 것.
(형제의 관계가 아닌 군신의 관계라는 뜻)
2. 조선은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함은 물론이고
이제부터는 청나라 연호年號를 쓸 것.
3. 조선은 왕세자와 차자次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낼 것,
등등이었다.
또 이러한 강화 조약과는 별개로 더욱 막심한 피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백성들의 피해였다.
오랑캐 군사들이 전국을 휩쓸고 돌아 다닐 때 백성들의 재산을 닥치는 대로 약탈해 갔을 뿐 아니라,
무고한 백성 5만 여명을 포로로 납치해 갔다.
그렇게 납치해 간 사람은 從으로 부려 먹었고 젊은 여자는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
전쟁이 모두 끝난 뒤, 납치해 간 우리 백성을 돌려 달라는 조선의 요구에
청나라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