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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에게 보낸 옥중편지를 통해 파란만장한 삶을 고백하다
출옥 후 가히 초인적 생산력으로 여러 저서와 번역서를 펴낸 바 있는 정수일의 옥중편지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 실린 편지는 1996년 체포된 후 2000년 8월 석방될 때까지 자신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다.
1996년 7월 세상 사람들은 단국대 사학과에 재직중인 무함마드 깐수 교수가 실은 북한의 공작원이라는 소식을 접하곤 크게 놀랐다. 어느 누구도 그가 아랍계 필리핀인이란 사실에 의심을 갖지 않았다. 외국인치고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능숙하게 구사하며 남한에 대한 지식과 애정이 무척 많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는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당국에 체포된 그는 혐의를 순순히 인정했고, 그는 간첩혐의로 구속됐다. 이 책에 실린 편지들을 통해 그는 아내와 남한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처음으로 스스로 드러냈다. 요컨대 자신이 무함마드 깐수가 아닌 정수일임을 고백한 것이다.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았는지 등에서 시작해 남한사회에서 정수일로 살아야 할 포부와 인생관 및 학문관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은 목소리가 들어 있다. 아직도 특수한 처지에 놓인 터라 말하지 못할 부분이 있지만, 이 편지모음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일종의 중간결산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중간결산을 감옥에서 한 셈이다.
이 편지모음에는 일제의 압박을 피해 이주한 유민(流民)의 후손으로 태어나 연변에서 일제강점기를 보내고 광복 후 중국의 외교관으로 봉직하다 북녘으로 환국(還國)했으며 급기야 수의(囚衣)를 입고 남녘으로 환향(還鄕)한 저자의 복잡다단한 인생과 학자로서의 포부 및 인생관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편지를 읽노라면 한국근현대사를 집약해놓은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멀고먼 길을 돌아 수의환향한 그는 옥중에서 보낸 편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고 새로운 도약의 다짐을 한다.
문명교류학에 대한 포부와 삶의 화두인 민족주의
그는 자신의 학문인생을 정리하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한다. 40여년간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한 운명이었음에도 학문적 비전을 세우고 그를 위해 도전했다고 고백한다. ‘문명교류학’이란 학문적 열매를 키워가던 중 검거된 그는 감옥에서 문명교류학의 학문적 정립을 위해 몰두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에게 옥방은 또 하나의 연구실이며, 그 연구실에서 그는 목표를 구체화한다. 그 결과, 그는 옥중에서 약 2만 5000매나 되는 연구물을 생산해낸다. 우리 겨레의 대외교류사를 조명함으로써 한민족이 세계에서 어떤 위상을 지녔는지를 역사적으로 구명(究明)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명교류학의 핵심이자 이론적 기초인 ‘씰크로드학’을 구상하고 가다듬은 작업이나 문명교류사에 관한 개설서 집필작업 등은 그 맥락에 서 있다. 물론 그의 이 방대하고 치열한 작업은 ‘시대의 소명에 따라 지성의 양식(良識)으로 겨레에 헌신한다’는 삶의 화두와 연관되어 있다. 편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민족주의자적 풍모는 그가 오랫동안 지녀온 화두의 발현이다. 그에게 민족주의는 삶의 화두 그 자체인 것이다.
그는 감옥 안에서 중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조남기(趙南起)씨의 금의환향 기사를 접하고 여러 회상에 젖는다. 조남기씨는 충북 청원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때 중국으로 가 그곳에서 성장한 조선족 가운데 최고위급 인사다. 그에 걸맞게 우리는 그를 ‘조선족의 영웅’으로 대접했다.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를 주었고, 연일 언론은 그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그 배면의 사정을 소개하는 편지는 묘한 울림을 준다. 정수일 역시 연변 출신의 전도유망한 엘리뜨였다. 변방인 연변 출신으로 북경대학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카이로대학에 국비로 유학을 다녀온 후 중국 외교부에서 외교관으로 재직했으니 엘리뜨 중 엘리뜨라 할 만하다. 일제의 억압 때문에 이주한 유민의 후예인 젊은 조선족 엘리뜨들은 1950~1960년대에 ‘잔류파’와 ‘환국파’로 나뉘어 열띤 논쟁을 벌였다. 환국파의 지향은 조국으로 돌아가 조국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었고, 잔류파는 이것저것 여건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환국을 거부했다. 결국 그는 환국했고(환국하는 데 가장 큰 동력이 된 것은 물론 민족주의였다), 조남씨는 잔류했다. 그리고 40여년 후 남한에 온 두 사람의 모습은, 수의환향과 금의환향으로 판이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가 편지에서 들려주는 이 비사(秘史)는 두고두고 진지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분초를 아껴 시간을 몇배로 늘린 감옥생활
그는 인생의 목표에 다가서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음을 편지 곳곳에서 전한다. 열악함, 그 자체인 환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서와 집필에 몰두해 급기야는 ‘할 일에 날짜가 부족하다(惟日不足也)’는 고백에 이른다. 흔히 수인(囚人)의 시간을 두고, ‘정지된 시간’이니 ‘잃어버린 시간’이니 하고 일컫지만, 이 통설은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는 일각(一刻)을 천금으로 여기고 시간을 아꼈다. 스스로 이를 두고 ‘시간을 무자비하게 혹사’했다고까지 회고한다. 그만큼 시간을 얻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무릎 위에 큰 책을 펴고 그것을 책상으로 삼다가, 용수통을 뒤집어 책상으로 사용하다가, 책을 여러권 보자기로 싸서 그걸 책상으로 삼아 집필하면서 느낀 고통을 술회하는 대목은 너무 오래 앉아 글을 써 엉덩이가 짓뭉개져 벽에 선반을 매고 일어서서 글을 쓴 다산(茶山)의 일화와 대적할 만하다.
세인들이 궁금해하는 일화들
이 밖에도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일화들이 편지 곳곳에 숨어 있다.
우선 외국어 섭렵에 관한 이야기. 그는 자신이 동양어 7종(한국어?일본어?중국어?아랍어?페르시아어?말레이어?타갈로그어)과 서양어 5종(러시아어?영어?독일어?프랑스어?에스빠냐어) 등 총 12종의 언어를 배웠다고 했다. 스스로의 인생사에서 만난 외국어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그의 인생궤적이 얼마나 넓은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이도 모자라 옥방에서 산스크리트를 비롯해서 2~3종의 고전어를 또 배워야겠다고 다짐하는 걸 보면 그는 천상 학자이다.
또 중국 외교부에 봉직할 때, 그는 주은래(져우 언라이周恩來) 총리 가문의 한 여성에게서 구애를 받은 적이 있었다. 변호사의 법정 심문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이미 북녘으로 환국할 것을 결심한 상태에 있던 그는 이민족과 결합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거절했다고 한다. 40여년 전의 한 토막 ‘러브스토리’가 법정심문의 화제로 오른 것이다.
또 1996년 2월 상해(샹하이上海) 복단대학(푸딴대학復旦大學)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여해 씰크로드의 한반도연장설을 주창하고, 그를 두고 중국의 역사학자 손진기(쑨 진지孫進己)와 논쟁을 벌인 일화는 최근 불거진 이른바 ‘동북공정사태’와 너무나도 절묘하게 연결된다. 당시 저자는 이미 중국의 속내가 무엇인지 간파했고, 기회가 닿으면 그 속내는 언제든지 재현될 거라고 예측했다. 물론 그에 대비하기 위해 임전태세를 갖춰야 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실제로 손진기는 동북공정프로젝트의 핵심이론가로 활동했고, 지난 9월 16~17일 서울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해 중국의 속내를 유감없이 드러낸 바 있다.
이밖에도 검거와 함께 압수당한 ?고대문명교류사? 원고를 자신에게 사형을 구형한 검사한테 돌려받은 일화 등도 실려 있어 민족주의자이자 학자인 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이 책의 제목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에 대해
정수일은 ‘시대의 소명에 따라 지성의 양식으로 겨레에 헌신한다’는 화두를 머리에 이고 우직하게 한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사실 그가 누빈 곳은 그의 인생만큼 넓다. 한반도와 중국은 물론 이집트, 알제리,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세계적 범위’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초지(初志)와 역정(歷程)을 함께 살피면, ‘날랜 걸음으로 전세계를 종횡무진 누빈 인생’이란 말로는 그의 인생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그보다는 ‘삶의 목적을 향해 큰 걸음을, 더디지만 성큼성큼 내디딘 인생’이라 할 수 있다. 보통사람에 비해 부침(浮沈)이 심한 인생사였지만, 그 또한 큰 틀에서 보자면 한곳으로 수렴된 역정 안의 부침이었다. 이 책의 제목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는 그가 쓴 한 편의 편지제목이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행로를 담기에 적당한 듯하여 전체 제목으로 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