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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시가를 전공하면서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시를 읽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수업 시간에 주로 학생들에게 고전시가와 함께 현대시를 함께 설명하는 것이 이해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젊은 시절 한동안 부지런히 시집을 사서 모으는 것이 취미였던 적이 있다. 그래서 소설책은 읽고 나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지만, 그동안 모은 시집은 지금까지 잘 보관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최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집 외에 많은 시 작품들을 잘 읽지를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조금은 감성이 무디어진 탓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은 엮은이가 독자들에게 권하는 시들을 모은 ‘시선집’으로 일종의 앤솔로지(anthology)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눈물 나게 외롭고 쓸쓸했던 밤 내 마음을 알아주었던 시 101’이라는 부제가 달려있어, 모두 10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엮은이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출판사에 취직을 하면서 좋아하는 시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다락방에서 조용히 시집들을 읽으면서 시와 가까워졌고, 살아가면서 힘들 때도 시를 읽으면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01편의 시를 선정해서, 각각의 성격에 맞는 분류를 통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일단 이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엮은이가 시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두 8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이 책의 첫 번째는 ‘어느 날 시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라는 제목 아래 윤동주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1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눈물 나게 외롭고 쓸쓸했던 날’이라는 두 번째 항목에서는 나태주의 <세상 일이 하도 섭해서>를 포함하여 13수의 시가 배치되어 있다. ‘외롭고 쓸쓸했던 날’에 시를 읽으면서, 그 외로움을 달래는 엮은이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본다. 물론 그것은 딱히 누구라고도 할 것없이 나 자신의 모습으로도 치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목들을 통해서 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따져 볼 수 있을 듯하다.
세 번째는 ‘인생이 절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쉰이 되었다>라는 이면우의 시를 비롯하여 모두 13수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이와 함께 ‘이누이트 족의 언어에 ‘훌륭한’이라는 단어가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네 번째 항목에는 13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두 항목의 제목들은 아마도 저자가 시에 대해서 느꼈던 개인적인 감성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인생의 절반’이 몇 살쯤일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람들이 꼭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문득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을 것이라 여겨지는데, 다섯 번째 항목인 이 제목 아래에는 12수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김영승의 <반성 16> 전문)
여섯 번째 ‘무심코 하는 말들을 위한 기도’ 항목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말짱한 정신에서는 ‘반성’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늘 후회가 되는 행동을 하고서 마지못해 반성을 하고, 그 상황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맨 정신으로는 알아볼 수 없는 글이 술이 취하고나서 보였지만, 그 내용이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였다니. 아마도 화자는 술이 깨면 다시 그 글을 잊어버리고 살 것이 분명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흔한 ‘반성’의 상황일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 작품은 '반성'에 대한 내 자신의 처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 항목에는 이 작품을 비롯하여 모두 13수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시가 내 곁에 있어 참 다행이다’는 일곱 번째 항목에도 오규원의 <죽고 난 뒤의 팬티>를 비롯하여, 모두 13수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내 삶을 뻔한 결말로부터 구해 준 결정적 순간들에 대하여’라는 제목 아래, 이성복의 <그렇게 소중했던가>를 포함하여 모두 11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가운데 처음 본 시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나로서는 엮은이의 분류와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시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그저 엮은이의 감성을 공감하면서, 작품들을 읽어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문득 내 자신의 감성을 담은 앤솔로지를 엮는다면, 과연 어떤 작품들이 포함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렇게 엮어낸 시선집은 과연 독자들로부터 충분히 공감될 수 있는 작품들이 포함될 수 있을까? 단지 그렇게 상상해보기만 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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