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병원으로 가셔야 되겠는데요?”
모니터가 침침하다 느낀 건 좀 되긴 했지만
황반변성 증상을 확실히 느낀 건 얼마 되질 않아
전부터 다니던 안과를 가니 고도근시성 황반변성이라고 예후를 좋게 보며
우선 안구 혈행개선제를 한 달 정도 복용한 후 보잡니다.
의사가 그렇게 봐주니 기분 좋습니다.
한 달 후, 차도가 없습니다.
결국 눈주사(루센티스, 아바스틴 등)를 맞기로 했습니다.
또 한달,
CT를 찍으니 전에는 망막 속에 기포 비슷한 것이 보이더니
이젠 망막의 연속성이 깨져버렸습니다.
문외한인 제가 봐도 ‘안 좋아진 것 같네요.’
나오며 치료비를 계산하려니 ‘됐답니다.’
의사가 예후에 대해 확신을 했는데 결과가 빗나가버렸으니 미안하다는 뜻인가요?
계산을 하겠다는데 한사코 말립니다.
저도 1차 진료를 담당하고 있지만 이런 게 1차 진료를 맡는 의사들의 비애입니다.
의사라는 본분 외에 예견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환자는 요구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걸 머뭇거리면 ‘의사가 그것도 몰라?’ 라며 돌팔이 소리 듣기 딱 좋으니
불완전한 자료를 가지고 점을 칠 수밖에요.
(수술전 협진실에서 찍은 혈액검사 성적표 일부- 비교적 정상범주에 들어있다.)
여하튼 대학병원 외래 진료까지 디밀고 들어왔습니다.
망막 권위라는 의사는 환자 정리하고 당장 한 달 쉴 생각하랍니다.
현 상태는 황반변성이 아니라 황반 원공인데
한가하게 수술을 하느니 마느니 따질 때가 아니랍니다.
당장 하라는 거지요. 난감합니다.
공교롭게 집안에 아들 딸이 동시에 수술을 받아야 하는 날에 임박해서
제가 수술을 받아야하는 불상사가 한꺼번에 벌어진 것이지요.
별 수 있습니까? 수술날짜가 그날밖에 없다는 데...
‘나까지 이래서 미안하오...’
아내도 몸이 불편한데 이 상황이 되니 아프다 내색할 수도 없습니다.
지난번 내원 했을 때 채혈, 채변(소변), 흉부 X-Ray, 심전도 검사를 끝내고,
10월 22일 수술 전날 입원하며 심혈관센터, 안과, 수술전 협진실(마취과) 검사를 다 마치고
병실로 올라갔습니다.
사람이 좀 속일 줄도 알아야 하는데 '하루 담배 한 갑 핀다'고 이실직고 했더니
심혈관센터와 마취과를 들르게 한 모양입니다.
‘지금에야 괜찮다고 하지만 앞으로 10년 뒤면 장담 못합니다.’
젊은 의사로부터 점잖게 그러나 단호하게 한 마디 듣습니다.
(아마 병실에 의사가 들어와서 저 책제목을 봤다면 변태라 그랬을 겁니다.)
병실이 없어 본의 아니게 든 1인실, 경치 좋습니다.
오늘부터 술 담배는 끊어야 되니... 지난번 수술 날짜 받고나서
딸내미가 ‘아빠, 금단증상이 일어나면 폭력적이 될 수도 있대’하며 걱정하던 생각이 납니다.
옷을 갈아입고 입원에 대비해 샀던 ‘아내를 (무심한 듯 뭉클하게) 탐하다’란 책을 꺼냅니다.
김상득이라는 ‘작가가 부업인’ 글쓴이는 소재가 궁해지면 엄한 아내를 소재로 끌여 들여
작가의 생명을 연명해나가는 사람으로 아내를 육체적으로 탐한다는 뜻이 아니라
일상을 통해 아내와 함께 살아가며 무심하게 했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어떤 뜻을 지니는지에 대해 애정 어린 눈으로 탐구해나가는 내용입니다.
순식간에 반을 읽고 나니 밤입니다.
11시부터는 물도 안 되는 금식이라는데 햄버거 같은 거 하나 사먹고 와?
에이 귀찮다.
(배가 고파 싹싹 긁어 먹었습니다.)
(신촌. 병실과는 딴 세상)
잘 먹고 있던 혈압약까지 걷어가더니
새벽 5시에 와서 일부러 깨워서 내 혈압약을 딸랑 배급해주고 물 한 모금만 마시랍니다.
수술은 9시에 잡혀 있답니다.
소독과 동공확장 시키는 점안액을 떨구고 샤워하고 빨가벗고 환자복 입고
정맥주사 관로 확보하고 어영부영하고 있으니 수술실로 가자고 휠체어를 가지고 옵니다.
(수술을 기다리며)
수술실은 왜 이리 써늘한지... 마취준비를 하며 하반신에 항공담요 같은 것을 덮어줍니다.
(수술방에서 돌아오자마자 옮긴 병실. 아래 치과대학이 보인다.)
수술대에서 이동식 침대로 옮기는 걸 느끼며 마취에서 깨어납니다.
나 나름대로는 생명, 삶, 죽음, 망각, 뭐 이런 거에 대해 좀 엄숙하게 느껴보자 했는데 싱겁게 끝났습니다.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2인실로 옮기고 각과 담당 간호사마다 들어오며 퍼붓는 질문과 주사들.
갑자기 먹지도 않았던 별다방 콩다방 아메리카노가 땅깁니다.
오지 말라 했는데 초등친구 부부가 병실로 들어옵니다.
지난번 제 집사람 입원했을 때도 그러더니 마치 소풍 가는 것처럼 연어 샐러드, 호박죽, 멸치 콩졸임,
잡곡밥, 국, 고구마, 과일주스 등 바리바리 많이도 싸왔습니다.
아니 나더러 저걸 어쩌라구?
안과수술은 입원기일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저처럼 망막수술을 해서 길어야 2박 3일입니다.
요즘은 유리체와 망막(황반)이 들러붙는 것(유리체 망막유착)을 막고,
망막을 제 자리에 고정 시키기 위해 안구 내 가스를 주입하는데
이것 때문에 계속 엎드려서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눈이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계속 엎드려 있다 보면 가슴과 어깨가 배겨오기 시작합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보면 선잠도 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잠을 편치 않는 포즈로 자게 되니 가위 눌리게 마련이지요.
꿈과 현실이 서로 믹스되어 비몽사몽이 됩니다.
내 피를 빨고 간 모기가 남을 물면 내 DNA 아니
내 머리 속에 저장 됐던 파일들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게 사실처럼 느껴질 때,
엎드려서 자야만 되는 사람이 그 포즈가 안 나오면
침대가 나를 인식 못할 것 같이 잠결에도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엎드려 잔 게 인정이 되질 않는 거지요.
비몽사몽간에 폭 안기는 포즈를 잡아 침대가 외장기기를 잘 인식하도록 합니다.
사람이 기계가 되고 침대가 사람이 되고... 원래 그런 겁니다.
다음날 퇴원 전에 안과 외래에 들렸더니 ‘어제 아주 잘 엎드려 계셨던 모양이에요’ 합니다.
엎드리지 않으면 큰 일 날 것처럼 겁을 줘
선잠 속에서도 몸을 뒤척여 침대에 잘 인식되는 USB가 되도록 만들었는데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되지요.
(먹성은 변하질 않아 운동은 못해도 찾아먹을 건 맛맛으로 다 찾아먹는다. 은근 걱정됨)
친구부부는 다음날도 와주었습니다.
와준 것은 고맙지만 어제 가져온 반찬과 밥 등을 챙기며 ‘이걸 다 어쩌노? 우씨’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나를 생각해서 땀 흘려 싸준 음식인데 집으로 가져가서 바닥이 보이도록 감사히 먹어야겠다고요.
일주일 후 재진 갔다 ‘술은 언제쯤?’ 했다가 그대로 박살났습니다.
술은 무슨 술이냐며 한 달간 근처에도 가지 말랍니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야멸차게, 단호히, 차갑게, 섭섭하게 면전에서 일언지하 잘라 버리다니...
이제 금연한 지 12일째가 돼갑니다. 폭력성을 보이는 금단증상은 없었지만
간혹 ‘뭐해야 되지?’ 하며 지방분권형으로 따로 노는 손을 제어해야하는 괴로움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동안 김상득 아내를 탐하다. 이정명 뿌리깊은 나무 1,2. 한승원 추사 1,2. 추사에 미치다.
전경린의 열정의 습관, 바닷가 마지막집, 백지원 조일전쟁. ..
바람의 화원은 어디로 간 거야? 집에 있던 책들을 다시 꺼내 읽는 호강도 했습니다.
다시 보니 새로운 맛이 있군요.
그중에 ‘지란병분(芝蘭竝芬)’이란 것이 있습니다.
영지(지초)와 란(난초)이 어우러져 향기를 더하다란 뜻으로 지란지교, 우정을 뜻합니다.
추사가 영지와 난을 치고, 희이여묵(戱以餘墨: 그림 그리고 남은 먹으로 장난을 치다)이라 적어 넣습니다.
이에 이재 권인돈이 '백년 앞길이 끊어질 수 없듯이
1만 송이 지초난초가 함께 돋운 향기는 사라질리 없도다.'라고 맞장구를 치고,
제자인 이하응이 인패지란(지란을 허리춤에 찬다 -
벗 생각하는 마음을 늘 간직한다)라 추임새를 넣고,
마지막으로 홍우길(벽초 홍명희의 증조부)이
'정축년 중양절에 추사선생을 우러르며 이 그림을 즐겼습니다.'로 응대합니다.
추사의 장난기 어린 글(지초의 향)에 제자와 친구의 응대(난향)가 훈훈합니다.
저의 근황이 실수로 흘러 나가
카톡에서 대학친구들과 고등동창들이 염려와 걱정을 보내주는 걸 보며 지란지교,
훈훈한 우정을 느끼니 저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의사는 힘든 수술이었다고 합니다.
만날 때마다 뉘앙스가 달라지는 것 같아 무슨 뜻인지는 짐작하겠는데,
다시 망막이 들뜨거나 하면 재수술을 받아야 할까요?
아니면 별로 즐거울 것도 없는 세상 대충 반쪽만 보면서 그냥 살까요?
|
첫댓글 어디 여행이라도 가셨나 했더니...
고장났다고 부품 갈아끼듯 바꿀 수도 없고
잘 달래면서 오래 써야 할텐데 그게 어렵죠?
눈 수술하면서도 책은 쌓아놓고 읽고
사진 찍어서 블로깅하고...
이거 잘하는 짓인가요?
재수술받을 일이 없도록 해야지요
애독자들 생각해서라도...ㅎ
고생 많으셨어요. 그래서 한동안 서사모 싸이트가 조용했군요.
이판에 금연 계속 하시는게 그나마 남는 장사 아닐까요...
한달 지나면 한번 모시겠습니다. 꾹꾹 참았다가 그날 푸시죠.
고교동창 중 모인이 망막이 찢어져서 고생 했다는 얘기를
얼마전에 들었는데 원장님도 고생 하셨네요
이런 일을 포스팅 하는 장인정신에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대충 살기는 아직은 조금 이른 것 같고 9988은 아니더라도 88 234는 해야겠지요
안과영역에서도 렌즈(수정체)에 관한 것들은 돈도 되고 성형과 관계되는 것이라 안과의사들도 여기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만 망막에 관해선 안과 운영에 별 도움이 되질 않는 모양이지요? ㅋ
그래서 망막에 관한 한은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대학병원이나 전문 병원으로 뛰어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제 망막질환에 배아줄기세포를 활용한 치료법에 대한 임상증례도 곧 발표될 예정이라고 하네요.
조심한다 하더라도 나이들어 생기는 노인병이야 어쩔 수 없다해도 증말 무리하진 말아야겠습니다.
남수형 지적대로 '이거 잘하는 짓인가요?', '으쮸, 썽질머리가 그 모양인디---'
어쩌다 몹쓸일이 생겼을까나 흐미...
지는 8년전부터 녹내장이라는 몹쓸놈이 들어왔는데 고놈의 주초를 멀리하지 않아서인지 점점 시각장애인과로 진행중임다. 원장님은 우리 동창들에게 주요인사이시니 (재밌는 글과 사진 해박한 지식을 펼쳐주시니) 부디 완치 될때까지 주초를 멀리하소서...
그 주초가 酒草 말씀이지요? 주치의가 '싸늘하게' 말하니 나도 좀 거시기 합니다.
그래서 결과가 어찌되건 '내 스스로 책임지지'하는 똥배짱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일요일(엊그제)부로 금주는 포기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