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으로 읽는 수요말씀 ◈
신앙의 징검다리: 거룩한 독서- 마가복음 알아가기: 난 몰라요!(2월 19일)
주관 가정- 이옥순님 가정/ 본문: 마가 14:66-72
예수께서 의회 법정에서 곤욕을 치르실 때 베드로는 법정 마당에 있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기록은 공관복음서와 약간 다르다. 또 한 명의 제자가 등장하고,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어서 베드로를 그 장소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익명의 제자가 어떤 제자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하녀가 베드로를 예수의 측근으로 알아보았다는 부분에서 요한복음은 문지기 하녀라고 기록했다. 요한복음의 기록을 중심하여 본다면 문지기 하녀는 나름 힘이 있는 자리의 사람을 뜻할 것이다. 그런데 이 하녀가 베드로를 알아봤다. 아마 이 하녀가 대제사장을 측근에서 수행했을 것이고, 대제사장은 예수의 활동을 자주 목격하는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니 이 하녀는 예수 일행을 자주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하녀가 베드로에게 던진 의심의 말은 일회에 그친다.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두고 다른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예수의 일행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베드로의 예수 부인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는 것이다. 당한 자는 제대로 기억하는 법이다.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마가복음에서보다 요한복음에서 더 처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성서의 문장을 보면 요한복음에서는 단순 부인을, 마가복음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다.”라는 표현을 써가며 강하게 부정한 후 그곳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나는 아니오.”라고 했을 뿐이며 그곳을 벗어나지도 않았다.
당시 법에 의하면 여자는 법적으로 증인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주변사람(남자)의 도움이 없으면 효력이 없다. 그러니 주변 사람(남자들)의 증언이 필요했던 것이다.
라틴어로 여성을 ‘femina’라 부른다. fe(믿음) mina=minus(적은)의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믿음이 적은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라는 말은 여성 경멸로부터 온 것이다.
어찌 되었든 베드로는 강력히 부인한다. 예수의 존재만 부인해도 죄를 묻지 않던 당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를 저주하고 하느님께 맹세한다. 이것이 부인 이상의 잘못이라는 것을 우리는 숙고해야 한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째 울 때 울었다. 이 울음 안에 베드로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수치와 후회의 눈물로 읽힌다. 하지만 그렇게 운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소에 가지 않았다. 회개의 눈물을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흘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곁으로 가지 않는다. 베드로가 그랬다. 오늘날 베드로 같은 사람이 참 많다.
베드로를 지목한 사람들이 그 증거로 ‘갈릴리 사람’ 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는 예수의 삶이 갈릴리 사람들을 향한 삶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 갈릴리 사람이라는 건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는 말일까? 결코 아니다. 당대의 갈릴리는 예수 운동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이란, 예수 운동의 대상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오직 사랑만을 말씀하신 분이기에 갈릴리 사람은 사랑을 해야 할,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며, 그들은 작은 자, 낮은 자, 빼앗긴 자, 어린아이, 과부, 여성들과 이어진다.
우린 살면서 예수를 얼마나 부인하게 될까? 교회 안에서 맡은 직분이나 신분이 우리들의 믿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울어야지 예수께서 더 이상 울어선 안 된다.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분명코 십자가 아래다. 우린 그곳에서 울어야 한다.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