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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꽃밭에 개양귀비꽃이 푸지게 피었습니다. 도발적인 섹시미를 자랑하는 붉은 색...
아마도 당나라 현종의 애첩 양귀비가 저처럼 사람을 홀리는 요물이라 저 꽃에 '양귀비'란
이름이 붙여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환장하게 좋아하는 꽃 양귀비는 그 먼 당나라까지 빌려 올 것 없이 얹그제처
럼 기억이 선명한 내 할머니 적 이야기입니다. 우리 할머니는 놀러다니시기 좋아하고, 밭
매기 보다는 꽃가꾸기에 열을 올리시던 건달 같은 분이셨습니다.
당신 연세 마흔 둘에 벌써 시어머니가 되셨고 맏며느리인 우리 엄마 말씀에 따르면 그때
부터 살림은 내몰라라 하고 밖으로만 돌았다 합니다. 졸지에 큰 살림을 떠맡은 우리 엄마
에겐 절대로 좋은 시어머니가 아니셨지만 우리들에겐 넉넉하고 편안하기만 한 할머니셨
지요.
지금도 생각납니다. 할머니는 동네 아낙들에게 한글공부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답게 수많
은 고전 소설을 섭렵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할머니 무릎 위에 누워
심청전, 박씨 부인전, 춘향전 등 참으로 많은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스르르 잠이 들곤 했
습니다.
할머니는 또한 동네 통반장이셨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청해 동네에서 발생하는
우환꺼리 해결에 손발을 걷어부치쳤지요. 누가 급체라도 했다 하면 뜨거운 된장국과 소
금으로 배를 문지르고 토하게 해 위기를 모면시켰고, 이유없이 덜덜 떨고 앓아 누우면
스스로 만신이 되어 소금을 끼얹고 부엌 칼을 내동댕이치며 잡귀를 물리치셨습니다.
단방약을 많이 알고 계셨던 할머니에게 양귀비 꽃대와 씨는 아주 중요하고 훌륭한 처방
약이었습니다. 누가 배가 아프다거나 설사를 하면 할머니는 갈무리 해둔 양귀비 대와 씨
를 당장 삶았습니다.
그 물을 조금씩 마시다 보면 밤낮으로 뒷간 출입하던 몹쓸 배앓이가 어느새 씻은 듯이
낫게 되고 할머니는 "배앓이에 이것보다 좋은 약은 없다"며 양귀비꽃의 효능을 강조하
고 또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집 뒤란에 무리지어 피고지던 양귀비꽃. 너무나 흔하게 봐왔던 꽃이라 어려선 그
꽃이 그렇게 아름다운 꽃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지금의 개양귀비꽃보다는 훨씬 작고
여리던 꽃잎. 빨갛고 흰 양귀비꽃이 바람에 흩날릴 때면 꼭 습자지로 만든 꽃같다는 생
각을 했습니다. 말갛게 비칠 정도로 얇디얇은 꽃이파리는 홑겹으로 몇 장 겹쳐있는 모
양이었지요.
푸른 초원에 빨간 물감을 흩뿌려 놓은 것 같은 유럽 들판의 개양귀비꽃 군락. 작년에 다녀
왔던 동유럽 여행에서 내 시선을 가장 사로잡은 풍경입니다. 폴란드 어느 마을, 오스트리
아 어느 마을에서 차창가로 보이는 개양귀비꽃의 무리진 모습이 어찌나 환상적인지
"버스 스톱" 외치고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느라 고생깨나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
다.
양귀비꽃을 무단으로 심으면 '징역'을 살린다는 국법 때문에 우리 집 꽃밭의 양귀비가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 중학교 때 무렵인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까지도 양귀비
꽃 약효에 미련을 못버리시던 할머니가 키가 큰 꽃 속 사이사이 양귀비 몇 포기를 몰래
몰래 키우셨지만 좋은 양약이 흔하게 된 뒤로부터 할머니도 그 미련을 떨치셨습니다.
우리 집 뒤란에 그 많던 양귀비꽃도 사라져 버리고 놀기 좋아하시고, 꽃가꾸기 좋아하고
더구나 아는 것도 많으신 우리 할머니도 세상을 뜨셨습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양귀비꽃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할머니꽃 양귀비는 자취를 찾을 수 없었지요. 서른 넘어 인사동
어느 화랑가에서 모네의 '아르장퇴유 근처 개양귀비꽃'이라는 그림을 만났습니다. 유럽
의 어느 구릉진 개양귀비꽃밭 속에서 모자를 쓴 여인네와 계집아이가 다정히 서있는 모
네의 그림은 서양화가 쪽엔 문외한인 나를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집까지 구해서 보게 하
는 진도까지 나가게 했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오신 듯 '개양귀비꽃'에 홀려 보고 또 보고, 인사동만 나가면 그
그림을 찾아 무작정 발품을 팔던 어이없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작년 초봄에 우연히 친구
가 씨앗 두 봉지를 선물로 주데요.
아,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친구가 준 그 씨앗이 내가 그토록 가꾸고 싶었던 '개양귀비
꽃' 씨앗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좋던지, 애면글면 물주고 가꿔 튼실하게 키워냈습니다.
작년에 받아 준 씨로 식구를 늘렸더니 올 해는 아주 양귀비꽃 천지가 되었습니다.
'개양귀꽃'이면 어떻고 '참양귀비꽃'이면 또 어떠랴. 꿩 대신 닭이라고 양귀비꽃 속에
파묻혀 해가는 줄 모르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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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리웠던 양귀비를 눈안가득 넣을수 있게된걸 축하드려요~멋진 할머님을 두셨었군요~^^
할머니의 추억처럼 곱고 아련한 아름다운 양귀비꽃을 키우시는군요. 꽃을 볼땨마다 추억이 묻어나겠어요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군요.돌아가신 울 엄마생각에...
할머니님이 대장부 이셨나 봐여... 글로만 봐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듯 하네여...
참으로 곱습니다..........살아가는 삶을알려주시는군요 이웃집에 마주앉아있는 느낌받고 갑니다^^
저두 다알리아만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생각이 납니다 그맘 이해가 가네요
할머니에 대한 애뜻한 향수가 아주 잔잔하게 배어나오는 글솜씨군요. 잘 보았습니다^^**
잔잔한 소설을 읽은 기분입니다 양귀비 꽃과 함께 님의 글 솜씨에 녹아들었습니다 ^^
어쩐대유~~~~님글읽으면서 서서히 중독데는것 같어유~담엔 또......~^^
양귀비꽃의 추억 속에 같이 머물다 갑니다,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다 떠오르는 울엄마를 그려보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자연스레 펼쳐가는 맛깔스런 글솜씨가 부러워집니다. 건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