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궁금한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한 이유
필자가 과거를 돌이켜보면, 궁금한 것이 참 많았다. 특히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데, 누군가 그것을 말하는 경우, 궁금한 것에서 나아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그럴까'나 '어떻게 그런 것을 알았을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물에 내재된 정신'이었고, 필자가 정신을 파악하고자 함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필자가 '정신'을 아주 조금이나마 파악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요컨대 호기심, 나아가 의문이 정신을 파악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처한 현실이 그 사람의 정신에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인 정신을 깨달아서 돌이키지 않으면, 그 사람이 처한 현실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 등이다. 길게 보면 이것이 그 사람의 운명이다. 이는 당연히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에 정신이 내재하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 모두, 필자도 포함된다. 여기를 벗어날려면 온전하게 성인의 삶, 부첨님이나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정신은 겉으로 보기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사물에는 정신이 내재해서 그 물질을 움직인다. 그리고 아주 자세히 봐야 물질을 움직이는 정신이 보인다. 이것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노력한 결과가 '인문학'이라는 학문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예컨대 소크라테스의 메논, 플라톤의 아카데미, 왕양명의 격물치지 등등이 인간의 정신을 사물을 통하여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사물을 통하여 정신을 파악하면 그동안의 궁금증이 풀리고, 모든 사물의 이치도 깨닫는다. 이것이 또한 지혜이다. 그리고 깨닫기 전의 삶은 어리석은 삶이었구나하는 사실도 파악한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분명 있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사물의 이치(정신)를 깨달아서 자신의 삶을 살았다. 사람을 파악할 때도 그렇다. 그 사람의 행동, 생각, 언어 등등에서 그 사람의 정신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살면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을 바로 대항하지 않고 가만히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먼저 '왜 그럴까' 생각하면서 의문이 플릴 때까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다음은 여담이다. 성실하고 책임감있어서 모든 일에 거의 최선을 다하는 사람(여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하는 만큼 사람들로 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과 첼로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첼로를 취미로 하는데, 첼로 소리가 필자가 듣기에 어둡고 탁했다. 소리가 맑아야 하는데 '왜 탁할까'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누구라도 음악 연주를 하면, 다른 사람이 감동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못하면 숙상하고 억울할 것이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 이유를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것이 정신이기 때문이고, 정신이 그 사람을 움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이는 그 사람이 가진 정신에 따라서 소리가 나온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 사실을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필자 역시 사실을 알기 전에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리의 본질은 에테르체의 움직임이고, 이 움직임은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인간이 감지한다. 에테르체의 움직임이란 일종의 진동인데, 이 진동이 에테르체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이 자신의 에테르체를 진동시킨다. 이 정신이 정신세계(우주)에 연결된 본래자아가 일으키는 진동일 수가 있고, 현실에서의 상속의 자아 일수도 있다. 만약 본래자아라면, 삼라만상도 움직인다. 그렇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가 현실에서 상속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현실의 상속자아가 에테르체를 움직인다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상속 자아는 본래자아와 무의식에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본래자아의 진동을 일으킬 수가 있다.
구체적으로 그 사람의 소리가 탁한 이유 역시 슈타이너의 책에서 의문을 풀었다. 바로 말하면 그 사람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잡은 허영심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절대 나타나지 않아서 알기에 쉽지 않는 허영심이 그 사람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허영심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잘났다는 마음이다. 통상 다른 사람과 달리 내가 잘났으므로 그러기 위해서 노력도 아주 많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영심은 정신세계로의 문을 닫게 한다. 음악은 정신 그 자체로,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정신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세계의 문이 닫히면, 어떤 정신도 표현하지 못한다. 음정, 박자, 분위기 표현이 정확해도,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영혼이 허영심에 매몰되고 매몰된 영혼은 본래 자아에게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허영심이 정신의 속성이 아니므로, 상 속에서 열심히 연습한다고도 할 수가 있을 듯하다. 본래자아는 정신세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을 드러낸다. 본래자아가 삼라만상의 생명의 힘(우주)이기 때문에 그 진동(정신)이 드러나는 것이다.
영혼의 속성으로 인하여 허영심이라는 현재의 상황에 영혼이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삼라만상의 생명의 힘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혼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만약 자아가 이러한 영혼의 상황을 파악한다면, 매몰된 영혼의 상황을 감지해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러기는 어려울 듯하다. 정신의 수준이 높다면, 영혼이 허영심에 매몰되는 것 또한 파악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 사람은 상속의 자아가 가진 허영심으로 인해서 본래자아의 진동, 우주의 진동을 표현하지 못한다.
다음은 이에 대한 슈타이너의 표현이다. 그 사소한 감정(허영심)으로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허영심이 아주 작아보이지만, 정신의 속성이 아니므로 정신을 드러내는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슈타이너는 특히 청년들에게 허영심을 주의하라고 강조했다. 청년들이 허영심을 갖기가 쉬운 '시기'에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거나, 잘 나야 한다는 감정이 들기가 쉽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제가 악간 빗나가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초등학교 시절 어린이 회장 역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훌륭하다는 인식을 했는데, 동창회에 가보면 보이지 않아서 궁금했는데, 그 이유가 초등시기에는 자신의 내면을 발달시키는 단계로, 그럴려면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어린이 회장은 외부로 시선을 돌려야 할 것이므로, 내면이 온전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아이들이 자랄 때 간섭,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하라고 하면 아이들은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기가 어려워진다. 결과 아이의 내면이 발달하지 못하므로, 아이가 온전한 성인이 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필자가 이 사람이 허영심을 갖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가지로 주문을 한 듯하다. 정신이 보이지 않으므로 혀영심을 갖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 사람의 행동 중에서 지적을 하였다. 그랬더니 오히려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듯해서 그만 두고 말았지만, 그때 어려운 일이 닥치는 것이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꺠달을 수가 있었다. 다른 사람도 필자처럼 이렇게 할 것이므로 그렇다.
정신이 발달한 사람을 자세히 관찰하면, 일단 자신에 대해서 겸손하고, 또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두 번째 자신의 내부가 발달할 때까지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고 자신에 대해서 골몰한다. 이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관심하다고 말을 들을 수는 있지만. 자신에 대해서 파악할려면,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므로, 다른 사람을 간섭하거나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으로부터 간섭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다. 여기에서도 인간의 발달단계의 중요성이 있다. 그 시기에 발달하지 못하면 평생 어렵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하고, 또 본인은 자신의 발달기간에 발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시기에 자신은 모른다는 것에 있다.
어떤 사실이나 상황에 있을 때 '왜 그럴까'란 생각은 정신을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사항이다. 호기심은 자신의 본래자아에게 연결, 본래자아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기 떄문이다. 현실에서 자아가 상속에 들어있으므로 우리는 깨어있는 현실의 삶에서 본래자아를 만날 수가 없다. 더불어 상속의 자아는 마치 그림자와 같아서 어떤 일을 할 때 의지를 내지 못한다. 인간이 의지를 내어야 어떤 일이라도 하는데, 따라서 상속이지만, 본래자아에게 연결되어야 한다. 호기심을 가지면 본래 자아가 그 의문을 해결해 주고자 하고, 결과 정신을 우리가 파악하는 것이다. 불가에서 하는 참선 역시 본래자아를 만나고자 하는 일이다. 요컨대 본래 자아가 의문을 풀어주는 일이 정신을 파악하는 일이다.
정신을 파악하면 삼라만상에 대한 의문을 풀수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본래 자아를 만나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호기심, 의문을 가져야 본래자아가 의문을 풀어준다.
다음은 필자가 요즈음 갖는 의문이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현실에서 만나는 삼라만상은 거울에 비친 상이다. 이 상은 정신세계에 가면 그 원상을 본다고 한다. 정신세계에 이르면, 제일 먼저 소리를 듣고, 그 다음 색채를 본다고 하는데, 이때 듣는 소리가 천체음악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예컨대 노란 은행잎의 원상이 장신세계에서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빠알갛게 물든 타는 듯한 단풍도 정신세계에서는 소리로 먼저 듣는다.
그리하여 둘레길에서 노오란 은행잎과 빠알간 단풍잎 아래를 걸으면 뭔가 소리가 들리는듯 한데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런데 베토벤의 교향곡(1-9번 모두) 을 들으면 그 때 들리는 소리와 거의 같다. 참 신기한 일인데, 노오란 은행잎, 빠알간 단풍잎 아래에서 가만히 귀기울이면 그 소리가 들리는데, 그래서 생각하기를 베토벤 교향곡이 지상에서 듣는 천체음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는 필자의 영혼이 은행잎과 단풍잎 아래에서 듣는 소리와 베토벤의 교향곡이 같다는 것을 파악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정확히는 파악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필자의 본래자아가 의문을 풀어줄 것이라고 생각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