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67)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 ③ 펜혹이 시인을 만든다/ 시인 정일근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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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펜혹이 시인을 만든다
펜혹이란 말이 있다. 컴퓨터 세대에게는 생소한 말일 것이다.
펜이나 연필로 글을 쓰는 사람의 손에는 반드시 펜혹이 남아 있다.
오래 글을 쓰다보면 펜을 받치는 가운뎃손가락에 혹 같은 굳은살이 박힌다.
그것이 펜혹이다.
펜혹은 글쓰기의 상처다. 그 상처는 시인을 만들어 주는 통과의례와도 같다.
나는 펜혹이 없는 시인의 손은 신뢰하지 않는다.
펜혹은 시인에게만 남는 상처가 아니다.
무릇 필업을 사는 사람들은 펜혹의 두께가 문학과 정신의 두께를 말해 준다.
대학 시절 나는 내 손에 생기는 그 굳은살의 이름을 몰랐다.
단지 보기 싫고, 불편했을 뿐이다.
어느 날 스승을 뵈러갔다. 놀라운 모습과 조우하고 말았다.
스승은 칼로 펜혹을 깎아내고 계셨다.
사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스승의 방에는 작은 판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위에 2백자 원고지가 펼쳐져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고, 스승은 그때 ‘한국문학사’를 집필하고 계셨다.
푸른 칼날을 가진 연필깎이 칼로 가운뎃손가락의 굳은살을 베어내며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생 펜으로 글을 쓰다보니 장지에 펜혹이 생겼어. 자주 깎아내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어.”
스승의 글쓰기는 그 펜혹이 대변해주었으며 스승은 펜혹으로 글쓰기가 불편해지면 칼로
굳은살을 깎아내고 다시 글을 쓰셨다.
한 편의 논문이 완성되기까지,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스승은 얼마나 많은 당신의 살을 깎아내셨을까.
나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스승의 펜혹은 산과 같은 모습이었고, 내 펜혹은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
스승의 펜혹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글쓰기는 자신의 살을 깎아내는 고통이며,
그 고통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그 이후 펜혹은 내 습작시대의 화두였다.
나도 펜혹이 생기도록 시를 썼고, 펜혹을 깎아내며 시를 썼다.
진해시 여좌동 3가 844번지. ‘옛집 진해’에서 습작시대를 보냈다.
나는 대학생이었으며,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가장이었다.
시대는 질곡의 80년대 초였다. 역사는 표류하고 있었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불안했다.
취하지 않는 밤이면 연습장 위에, 노트 위에 시를 적었다.
모나미 볼펜을 꼭 잡은 손가락에 펜혹이 자라고 새벽이면 머리 위에 파지가 무더기로 쌓였다.
그 시절 모든 문학도의 꿈이 그러했듯이 나도 신문사로부터 노란색 신춘문예 당선 전보를 받고 싶었다.
그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였고 그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한 글쓰기가 내 삶의 전부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학년말 시험을 포기하고 원고지 위에 피 같은 시를 써 투고를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집에서 당선 전보를 배달해 줄 우체부의 오토바이 소리를 기다렸다.
우체부는 찾아오지 않았다.
새해 첫날이면 진해의 6개 중앙일간지 신문지국을 돌며 1월 1일자 신문을 빠짐없이 구해
당선자 명단을 확인하며 절망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대학생 현상문예에서 함께 활동했던 하재봉 안재찬(류시화) 안도현 등이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시인으로 등단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시를 쓰는 일이 나에게는 전부였다. 습작시대였던 대학시절, 나는 시만 썼다.
강의실에서도 고개 숙여 시를 썼으며 자면서도 시를 생각했다.
펜혹은 점점 커졌으며 그 상처를 자주 깎아냈다.
그리고 펜혹 덕분에 대학 4학년 겨울, 나는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았다.
문예창작과 첫 강의에서 나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책을 손으로 읽으라’고 가르친다.
펜으로 문학작품을 옮겨 적으며 손가락에 펜혹이 생기도록 문학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컴퓨터 시대라 해도 누구도 펜혹이라는 상처가 없이 시인을 꿈꿀 수 없기에.
< ‘나를 바꾸는 시 쓰기, 시 창작 강의 노트(유종화, 새로운눈, 2019)’에서 옮겨 적음. (2021. 1. 2.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67)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 ③ 펜혹이 시인을 만든다/ 시인 정일근|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