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69)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 ⑤ 부끄러움이 시인을 만든다/ 시인 정일근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Daum블로그 http://blog.daum.net/foxrain61/ 부끄러움도 시인을 만든다.
⑤ 부끄러움이 시인을 만든다
습작시절 누구에게나 병이 생긴다.
이름하여 ‘신춘문예 병’. 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손에 아름다운 상처 ‘펜혹이 생기듯, 이 병도 아름다운 병이다.
신춘문예. 굳이 말뜻을 풀이하자면 ‘새봄의 문학예술’이다.
그러나 신춘문예는 풀이하는 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뜻을 갖는 말이다.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습작시절이라는 통과의례가 있고,
신춘문예는 그 통과의례 중 가장 치열한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 치열함의 끝에 당도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영광의 다름 아니다.
신춘문예 병은 신문사마다 1면에 신춘문예 현상공모 사고를 내는 11월초쯤 발병한다.
신춘문예라는 활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뛴다.
혈관 속에서 문학의 피가 끓는 소리가 들린다.
문제는 그런 흥분된 상태가 응모 마감일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 끝나가고 겨울이 서서히 찾아오는 때쯤이다.
심장과 피는 더워지지만 몸은 추워지고 등은 불안감으로 굽어진다.
말수도 줄어들고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가끔씩 왜 그렇게 긴 한숨이 터져 나오던지.
그 시절 겪은 나의 대학성적표는 감추고 싶은 흉터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신춘문예 병이 준 후유증이었다. 고백하자면 아슬아슬하게 낙제를 면한 점수다.
졸업학점이 1백60학점이었던 시절, 신춘문예 병 때문에 펑크난 학점을 맞춘다고
4학년 2학기에도 21학점을 신청해야만 했었다.
신춘문예의 마감과 학년말 시험기간은 늘 일치했다.
나는 그 두 길 앞에서 늘 미련도 없이 신춘문예의 길을 택했다.
친구들이 도서관에서 학년말 시험 준비로 밤을 새울 때 나는 신춘문예 응모작품을 준비한다고 밤을 새웠다.
유신 시대, 군사독재 시대에서 학점을 얻기보다 신춘문예 당선 시인이란 이름을 얻고 싶었다.
언젠가 가지게 될 내 첫 시집의 약력에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빛나는 한 줄을 남기고 싶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면 누구에게나 나오는 2급 정교사 자격증보다 먼저 시인이 되고 싶었다.
아직 그 시험답안지들이 남아있을까.
시험문제와는 무관한 글들만 써놓았거나 백지로 제출했던 답안지들.
월영동 449번지, 나의 사랑 나의 대학. 사범대학으로 오르던 돌계단, 지칠 때마다 바라보던 푸른 함포만,
내 기억 속 풍경들의 계절은 언제나 그 겨울이다.
사범대학 빈 강의실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시를 쓰던 동면 직전의 곰 같았던 내 모습.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며 우편함을 찾아가면 복도 쪽으로 눕던 긴 그림자.
환청처럼 갈가마귀 울음소리 들리던 시절.
더워졌던 피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는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오는 것도 신춘문예 병 후유증이다.
마감도 끝나고 시험도 끝나면 할 수 있는 일이란 낮에는 당선통지를 기다리는 일과
밤이면 술을 마시는 일뿐이었다.
우체국에서 작품을 보내고 돌아와서부터 당선 연락이 올 때까지의 그 막연한 기다림.
폭음과 함께했던 확신과 장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고 마침내 허탈해진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당선 연락이 오지 않으면 더는 기다리지 말라는 동병상련하는 도반들의 충고에도 혹시,
혹시 하며 기다리다 절망하다 받아보는 1월 1일자 신문.
그 신문에 실린 그해 당선자들의 얼굴사진과 빛나는 작품들.
당선 시들을 읽은 뒤에는 지금까지의 기다림보다 더 큰 부끄러움이 엄습했다.
그렇다. 그 부끄러움이 나를 성숙시켰다.
현재의 내 시가 어떤 자리쯤에 서있는지를 확인시켜주었던 부끄러움이 내 시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혹독한 추위의 겨울이 시작되고 뛰어난 그해 당선 시들을 읽으며 언젠가는 찾아올
내 문학의 봄인 신춘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대,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문학을 꿈꾼다면 그 꿈은 욕심에 불과한 것이니,
다시는 신춘을 기다리지 마라.
< ‘나를 바꾸는 시 쓰기, 시 창작 강의 노트(유종화, 새로운눈, 2019)’에서 옮겨 적음. (2021. 1. 4.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69)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 ⑤ 부끄러움이 시인을 만든다/ 시인 정일근|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