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9월 25일) 성균관과 전국 모든 향교에서 석전제(釋奠祭)가 열렸다.
석전제는 '상정(上丁)'이라고도 하는데, 음력 2월과 8월 간지로 첫 번째 정일(丁日)을 택해 공자(孔子), 성인(聖人), 현인(賢人)에게 지내는 제사다.
'丁'에는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 담겼다는데, 오늘이 음력 8월의 첫번째 '정(丁)'자가 들어가는 정유일이다.
'석전'의 본래 뜻은 정성스럽게 잘 빚은 술을 받들어 올린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양천향교에 이틀 전 잠시 다녀왔다.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와 약 500m 가량 올라가면 양천향교다.
집에서 가까워 여러 번 들렀고,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에서 출발하는 '겸재 정선길'에 대한 글도 정리해 올린 바 있지민, 이번엔 석전제를 앞두고 향교만을 찾았다.
석전제 준비를 위해 모든 문이 활짝 열려 구석구석 자세히 볼 수 있어서였다.
양천향교는 일제강점기에도 제향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곳이다.
양천향교가 서울에 있는 것은 행정구역의 변천 때문이다.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가양리에 속해 있었지만, 1963년 1월 서울시(현재 강서구 가양동)로 편입됐다.
※참고ㅡ겸재정선 길 답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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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향교 앞에는 석전제를 알리는 큼지막한 현수막이 붙었다.
'공기(孔紀)'라는 단어부터 들어온다.
유교를 숭상하는 나라에서는 중요하다고 한다.
서기를 기준으로 551을 더하면 된다.
공자는 BC 551년 2월에 태어나서 BC 479년 8월에 죽었다.
석전제가 2월과 8월에 거행되는 이유다.
석전제가 종묘대제와 다른 점은 헌관(獻官)이다.
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임시로 임명되는 제관으로,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을 지칭한다.
향교 석전제의 초헌관은 시장, 구청장이 맡는다.
성균관과 향교에는 은행나무를 심었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데서 비롯된 ‘행단(杏壇)’ 전통 때문이다.
은행나무는 암수 구별이 가능하고, 열매 하나에 씨가 하나인 특징을 지니며, 벌레가 끓아 유교에서 '충성'과 '지조'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성균관과 향교는 제향공간인 내삼문 안에 위치한 대성전과 가르침을 펼치는 강학공간인 명륜당, 동재와 서재로 구성된다.
대성전에는 유교의 성인 공자를 비롯한 오성(五聖: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 송조 4현(四賢: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설총과 최치원을 비롯한 국내 유학자 18현(十八賢) 등 총 27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양천향교 대성전에 봉안된 위패는 성균관이나 다른 지역 향교와 비슷하다.
우리나라 18현은 신라 2인, 고려 2인, 조선 14인이다.
유교의 교조인 공자 사당에 올라 함께 제사를 받는 일이니 유학자로서는 최고의 영광이었다.
"정승 10명이 문묘에 종사된 성현 한사람만 못하다”(十相不如一賢)는 말도 있다.
신라시대 인물은 설총과 최치원이고, 고려의 인물은 안유(안향)와 정몽주이다.
조선은 14명인데,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다.
이들은 어떤 연유로 이름을 올렸을까.
우선, 정몽주를 조선 성리학의 태두로 삼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조선이 숭상한 것은 조선 개국을 끝까지 반대한 정몽주였던 것이다.
정몽주의 절의파 학풍이 사림에게로 이어졌다.
조선 중기 이후엔 영남 지역 학통이 강조되면서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이 문묘에 종사됐다.
서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기호학파의 중심인 이이와 성혼이 문묘에 종사됐다.
부자관계인 김장생과 김집은 송시열의 스승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비집권층이 된 남인 계열에서는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영조 때 탕평론을 주장한 것이 높게 평가받아 가까스러 추봉된 현석 박세채를 제외하면 전부 노론계열이었다(※서강나루 편 현석동의 유래에서 박세채를 다룬 바 있음).
하서(河西) 김인후가 포함된 것은 정조 덕분이었다.
정조는 "조선 개국 이래 도학과 절의, 문장 어느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면서 인종 때 인물인 하서의 문묘 종사를 성사시켰다.
하서는 18현 중 유일한 호남 출신이다.
명분이 있으니, 노론 집권세력을 설득할 수 있었을 것이고, 소외된 지역도 아우를 수 있었을 것이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명분이다.
향교 앞 정문 왼편에는 1580년 전후부터 1880년 전후까지 양천현령 등으로 재직하던 사람들의 선정비, 영세불망비(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내용의 비석) 9기가 서 있다.
양천현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이 모였다.
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한 것 중 <경기관찰사 김보현 불망비>(고종 17년, 1880년)가 눈에 띈다.
경기도관찰사 김보현이 귀에 익은 인물이어서다.
고종 19년(1882년)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 간 차별에 불만이던 구식 군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른바 임오군란이다.
봉급으로 받던 쌀이 13개월 치나 밀려 있었는데, 1년이 지나서 한 달 치라며 준 것이 반은 썩어 있었고 반은 모래였다.
분노한 군인들은 서대문을 나와 비탈길 아래 경교를 건너 경기감영(지금의 서대문역 4번 출구 적십자병원 자리)을 습격했다.
나라 쌀 대동미를 관리하는 선혜청의 전직 당상이자 현직 경기도관찰사 김보현은 맞아죽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탐관오리들이 부임과 동시에 공덕비 세우기에 급급했다고 한다.
선정비, 영세불망비 속 주인공들은 덕망 있는 관리였을까, 아니면 탐관오리였을까.
양천향교역에서 양천향교로 가는 길 왼편에 양천현아지(陽川縣衙址)가 있다.
‘현아(縣衙)’란 지방행정구역으로 지금의 ‘구청’에 해당한다.
지도를 보면 중앙에 현청(동헌, 양천현은 종해헌), 그 동쪽에는 객사(파릉관), 북쪽에는 향교가 있었다.
이를 일컬어 '읍치'라 하는데, 반경 200m 이내의 읍치는 우리나라에서 양천현 읍치가 유일해 학술적 가치가 높다.
양천현아지에서 양천향교로 가는 오른쪽 길목 화려한 금탑과 대웅보전을 갖춘 홍원사가 옛 양천관아의 객사가 있던 곳이다.
양천향교역 1번 출구 쪽에 있는 양천초등학교는 갑오개혁 이후 과거제도 폐지로 1900년대 초 세워졌다.
과거를 준비하는 지방 교육기관이던 향교와 과거제 폐지 이후의 근대 교육기관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다.
'양천(陽川)’은 햇볕이 잘 들고 물이 맑은 고장이라는 뜻이다.
삼이 많이 나고 나루터가 있던 어촌은 ‘마곡(麻谷)’이었으며, 꽃이 활짝 핀 모양이라 ‘개화산(開花山)’이라 이름 붙여졌다.
땅이 기름져 골짜기 사이마다 벼가 익어간다는 ‘화곡(禾谷)’이었다.
양천현의 풍경이 풍요롭고, 아름다웠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지명들이다.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 추(秋)는 벼와 불이 결합한 형태다.
벼가 익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가을이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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