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71)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 ⑦ 길이 시인을 만든다/ 시인 정일근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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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길이 시인을 만든다
중학교 2학년 때 부산에서 진해까지 걸어온 적이 있다.
악동 친구들과 해운대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차비마저 다 유흥비(?)로 날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여름이었고, 우기였다.
우리는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엄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엄궁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명지로 가,
명지에서 다시 걸어 진해까지 갈 계획이었다.
친구 3명의 무사귀환을 책임져야 하는 내 주머니에는 1백20원이 숨어 있었다.
나는 그 돈으로 진해 인근인 웅천에서 버스를 탈 계획이었다.
다들 부모님에게 선생님과 함께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떠난 여행이었기에
우리는 어디에도 구원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중대한 결정이라도 내리듯 친구들에게 그렇게 선언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염소란 별명을 가진 친구도 찔끔거렸다. 그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붉은 완행버스를 타고 떠나왔던 길. 그 먼 길을 과연 걸어갈 수 있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대로 다른 길은 없었다.
믿는 것은 우리가 가진 A자형 군용 텐트, 알코올 버너, 라면 몇 봉지, 쌀 등과 열다섯 살의 두 다리뿐이었다.
그래, 한 이틀 걸어가면 진해까지 갈 수 있을 거야.
가다가 어두워지면 길 위에서 자고 가지.
내가 앞장섰다. 결국 우리는 1박2일을 걸어서 진해로 돌아왔다.
내가 걸어본 최초의 장도였다. 그날 이후 나는 세상의 길에 대해 자신을 가졌다.
그리고 그 길을 걷고 난후 내가 많이 성숙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진해에서 자전거를 타고 진주까지 갔다 왔다.
그 높은 마진고개를 넘고, 더 높은 진동고개를 넘어 진주로 갔다.
친구의 친척집 작은 골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내리는 비를 피해 다리 밑에서 밥을 먹었다.
역시 집으로 돌아오니 나는 성숙해져 있었다.
진해에서 마산까지 버스통학을 하던 고등학교 3년, 하굣길에 자주 마진터널 검문소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왔다. 어둠의 산길, 홀로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면 내 몸으로 스며든 길의 향기가 좋았다.
그 시절 우연히 목월 선생이 쓴 젊은 날의 비망록에서,
청년 박목월이 군용 모포 한 장만 들고 강원도에서 부산까지 걸어왔다는 글을 읽었다.
낮에는 해변에서 자고 밤에는 걸어서 동해의 길을 밟았다는 글을 읽고 전율했다.
나는 책을 읽다 일어서서 외쳤다. 떠나자.
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길을 따라 떠나자.
그대, 길은 사람에게 사유의 시간을 가져다준다.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혼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하는 길이라고 해도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길을 걸어주지 않는다.
결국 길은 혼자 가는 길뿐이다.
혼자 가는 길이 사람을 성숙시켜 주고, 시를 깊어지게 만들어 준다.
길은 무엇보다 그리움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가보지 않는 저쪽에 대한 그리움이 길을 만들었으니, 그리움이 없다면 길도 없었다.
길 위에서 혼자임을 아는 사람은 언제나 그리움의 따뜻함을 꿈꾼다.
그 따뜻함을 나는 서정이라 말하고 싶다. 홀로 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길 위에서 그리움을 꿈꾸지 않은 사람은 서정시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길의 가장 큰 가르침은 고통이다.
그대, 길 위에서 혼자 맞는 저물 무렵과 일몰의 고통을 아는가.
타관을 지날 때 하나둘씩 돋아나는 집들의 불빛을 바라보며 떠나온 곳으로 등이 굽는 쓸쓸함.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저녁이 찾아올 때 비로소 그리운 사람과 이름들.
저무는 길 위에서 고통을 느껴보지 않고서 사랑의 시를 쓸 수 없다.
등이 배기는 길 위에서 고통의 칼날에 싹둑싹둑 잘리는 마디잠을 자보지 않은 사람 또한
시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니,
그대 오늘 그 길 위에 서라.
< ‘나를 바꾸는 시 쓰기, 시 창작 강의 노트(유종화, 새로운눈, 2019)’에서 옮겨 적음. (2021. 1. 6.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71)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 ⑦ 길이 시인을 만든다/ 시인 정일근|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