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76) 착란, 혹은 의식의 확장 - ③ 자동기술법/ 문학박사 전기철
착란, 혹은 의식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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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자동기술법
자동기술법은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말들을 그대로 적는 기법이다.
혹은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대로 적는 방법이다.
이는 의식의 범위 밖에서, 다시 말하면 무의식이나 전의식 상태에서 떠오르는 영상을 베껴 쓰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앞뒤 논리적인 연결고리 없이, 무작위로 받아 적는 시의 기술법이다.
따라서 시인은 우리 안의 어떤 목소리가 하는 말을 서정적 주체가 논리적 의식 없이 그대로 따라 적는다.
이렇게 쓰인 시는 전후 관계가 이어지지 않아 언뜻 뒤죽박죽인 것처럼 느껴진다.
카오스의 무의식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기록하기 때문이다.
합리적 이성으로 인해 한 사회가 타락하면 이러한 카오스가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어떤 규칙이 타락하면 혼란, 그 타락한 논리를 흐트러뜨려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서구라든가 한국전쟁 이후 우리 시에서 보여준 현상이 이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는 어떤 진실도 유언비어와 변절되지 않는다.
타락한 시대에는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그리고 그 갈망이 깊어지면 한 시대의 변곡점이 나타난다.
그것을 먼저 아는 이가 위대한 사상가나 예술가이다.
현실의 모든 것, 자아라든가 사회적 규범을 믿을 수 없을 때, 그 규범을 무화시키는 예술적 감각이 요구될 때,
나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그 규범을 철저히 혼란에 빠뜨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직 직관만이 변곡점을 깨닫는다.
자신의 냉철한 의식보다는 몽롱한 상태에서 창작을 했을 때 진정한 예술작품이 나온다고 검은 사각형의 화가 말리비치는 말하고 있다.
논리와 합리적인 사고를 부러뜨릴 수 있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
시인뿐만 아니라 예술가는 순수자아나 사회적 자아를 거부하고 꿈이나 환각,
순간적 착상에서 나오는 언어를 표현하려고 한다.
이런 언어는 순간적 충동이나 왜곡된 정신, 혹은 직관에서 나온다.
카오스에서 건져 올린 이미지는 일상에서 만날 수 없는 뒤틀린 것들이다.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주체는 하나의 매개일 뿐이므로 혼돈 자체를 두서없이 기록한다.
혼란 상태에서는 머릿속으로 너무 많은 목소리가 들어온다.
그 다중 목소리를 앞뒤 없이 떠오르는 대로 마구잡이로 적어낸다.
혼란의 시대나 불란이 가중된 상태에서는 이와 같은 자동기술법이 가치가 있다.
라캉이 서구 사회의 혼란 속에 또 다른 혼란으로서의 카오스를 강조한 것도 이와 같다.
■ 다음에서 몇몇 시를 통해서 카오스의 세계를 맛보도록 하자.
① 뱀이 나를 감더니 덩굴이 피어오르고
쪽배 하나 허공으로 떠가다 구름으로 젖는다.
오래된 이름이 눈동자를 붉힌다.
나무가 나를 툭, 친다
나이테로 구부러진 귀에서
눈을 뜬 고양이 한 마리
입술 위에서 밤으로 파도를 탄다
② 사람이 우산을 가지고 건너는 호수, 땅의 불란한 초조, 이 모든 것은 없어지려는 희망을 낳는다. 한 사나이가 작은 귤을 감추고 걸어간다. 때로는 그 자신 위에 부채처럼 구부린 다. 그가 살롱 쪽으로 가니 거기에는 흰 족제비가 먼저 와 있다.
―앙드레 브르통, 「자장」 부분
③ 떠오르는 바람이 만들어낸 종이비행기에서 추락한 얼굴이 수줍어하며 아침에게 손을 내 민다. 목소리를 들고 있는 새들이 이현령비현령, 너는 아침 여섯 시의 한 페이지, 십자가 들이 공중에서 맴을 돌고, 기울어진 휘파람 따라 울컥, 지붕 위에 걸린다.
①에서 뱀이 덩굴로 피어오르고, 쪽배가 허공으로 떠난다.
그리고 귀는 나이테가 되고 고양이는 입술 위에서 파도친다.
혼돈 자체를 가감 없이 적고 있다.
②에서는 시의 주인공이 있기는 하나 그의 행동은 무작위이다.
우산으로 호수를 건너고 귤을 감추고 살롱 쪽으로 걸어가는데 족제비가 와 있다.
정상적인 행동과는 거리기 멀다.
③에서는 종이비행기에서 얼굴이 추락하고 목소리를 들고 있는 새는 여섯 시의 페이지에서 이현령비현령하고 십자가가 휘파람을 따라 울컥, 지붕에 걸린다.
비정상적인 그로테스크한 현상이 두서없이 널려 있다.
< 연습 > 불안과 초조, 수만 가지 갈등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때로는 멍을 대리고 싶다.
이러한 나의 정신 상태를 시로 쓸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 냉철한 이성을 버리고 떠오르는 낱말이나 문장을 논리적 계산 없이 적어보시오.
< 아랫부분 줄임 >
< ‘언어적 상상력으로 쓰는 시 창작의 실제(전기철, 푸른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1. 1.14.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76) 착란, 혹은 의식의 확장 - ③ 자동기술법/ 문학박사 전기철|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