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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수경 Esther 목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1949년 8월 5일, 평생을 바쳐 한국을 사랑했던 한 파란 눈의 이방인이 마침내 그토록 그리워하던 한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바로 대한민국의 독립과 문화 보존에 평생을 바친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 1. 26 ~ 1949. 8. 5.) 선교사입니다.
오늘 그의 서거일을 보내면서,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참 선교사이자 한국의 은인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자 하는 전도자와 선교사의 사명을 받은 자라면, 반드시 호머 헐버트 박사의 삶을 알아야 합니다.
1886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 땅을 밟은 헐버트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니었습니다.
1863년 1월 26일, 목사이자 미들베리대학 학장이었던 칼빈 버틀러 헐버트와 다트머스대학교 설립자의 증손녀인 메리 우드워드 헐버트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헐버트는 다트머스대학교에서 히브리어를 수학한 뒤, 1884년 유니온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신학 공부를 하던중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육영공원: 양반집 자제들과 과거에 급제한 자들에게 영어 및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고종 하에서 우리나라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
🔺헐버트 선교사와 그의 제자들(육영공원)
그는 한글의 우수성을 가장 먼저 간파하고, 최초의 순한글 세계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했습니다.
호머 헐버트가 조선 땅을 밟은 후 단 3년 만에 한글로 책(『사민필지』)을 쓸 정도로 완벽하게 마스터한 과정은 그의 천재성과 엄청난 노력, 그리고 한글에 대한 깊은 애정이 결합한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또한 구전으로만 떠돌던 민요 '아리랑'을 최초로 서양식 오선보에 채보하여 기록으로 남긴 것도 바로 헐버트였습니다. 그는 한국인이 스스로의 문화에 자부심을 갖도록 이끈 진정한 문화의 선구자였습니다.
1. 한글 부흥의 초석
사민필지 발간과 한글 맞춤법(띄어쓰기·문장부호) 체계화
헐버트 박사는 한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한자만 숭상하던 당시 조선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한글을 실용적인 근대 문자로 탈바꿈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 최초의 순한글 세계지리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 (1891년 발간):
조선 정부의 국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한 헐버트는 학생들이 세계 정세를 배울 교재가 없자 직접 이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서 발간된 '순한글' 인쇄물입니다.
1891년 그가 펴낸 『사민필지(士民必知)』는 '조선의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을 담은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로, 세계 각국의 천문, 지리, 정치 체제, 산업 등을 망라하여 조선인들의 국제적 안목을 넓혔습니다.
한자를 모르는 평민과 여성들까지 세계 정세를 읽고 눈을 뜨게 만들겠다는 그의 교육 철학이 낳은 위대한 결실이었습니다.
그는 『사민필지』 서문에 조선 지배층을 향해 다음과 같은 명문장을 남기며 일침을 가했습니다.
"조선 언문(한글)이 대단히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모르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참으로 안타깝다. (...) 중국 글자(한자)는 선비들이 평생을 공부해도 다 알지 못해 눈먼 사람처럼 되기 십상이나, 조선 글자는 단 몇 주일만 공부하면 선비부터 장터의 여인까지 모두 글을 읽고 뜻을 통할 수 있으니 세계에서 이보다 훌륭한 글자는 없다."
▪️철저한 조선 기준의 도량형:
그는 세계 각국의 지리를 설명하면서 모든 단위를 조선인들이 쓰던 전통 단위로 환산했습니다.
거리의 단위는 '리(里)', 높이는 '척(尺)', 곡물은 '석(石)'으로 바꿨고,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수출입 총액마저 조선의 화폐 단위인 '원'으로 통일하여 표기했습니다.
▪️과감한 외래어의 한글화와 신조어:
이 책에서 조선에 없던 서양 물품을 한글로 신선하게 표현했는데, 커피는 '가피', 바나나는 '바나나'로, 특히 버터는 '졋기름(젖기름)', 치즈는 '졋떡(젖떡)'이라는 아주 직관적이고 귀여운 순우리말 신조어로 만들어 표기했습니다.
2) 한글 역사상 최초의 '띄어쓰기'와 '문장부호' 제안 및 도입:
헐버트가 조선 땅을 밟았을 때, 한글은 '언문(諺文)'이라 불리며 양반들에게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어학자였던 그는 한글을 접하자마자 그 독창성과 과학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띄어쓰기가 없고 마침표나 쉼표 같은 장치가 없어 읽기 불편하다는 점을 간파했습니다.
본래 한글은 띄어쓰기나 마침표 없이 붙여 쓰던 문자였습니다. 이에 헐버트는 주시경, 서재필 등과 머리를 맞대고 한글 맞춤법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에 그의 제안이 반영되면서, 한글 간행물 역사상 최초로 띄어쓰기, 마침표, 쉼표 등 점찍기 규정이 공식 도입되어, 한글이 근대적 소통 체계를 갖추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3) 국문연구소 설립과 한글 논문 발표:
그는 고종 황제에게 건의하여 최초의 국가 차원 어학 연구 기관인 ‘국문연구소‘를 설립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미국 학술지에 직접 '조선 글자(The Korean Alphabet)' 같은 한글 연구 논문을 발표하며 세종대왕의 위대함과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세계에 최초로 알린 외교관이기도 했습니다.
🔺조선 소식지(The Korean Repository. 1896년 1월호). 띄어쓰기를 잘못하면, 이렇게 의사 전달이 잘못된다며 “띄어쓰기”를 강조
2. 민족의 노래 보존
구전 '아리랑'의 최초 서양 음계 채보 및 세계화
구전으로만 내려오며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악보로 기록하여 영원히 보존하고, 전 세계에 널리 알린 주역 역시 헐버트 박사입니다.
1) 역사상 최초의 서양식 오선보 채보 (1886년~1896년):
1886년 조선 땅을 밟은 직후, 헐버트는 길거리에서 아이들과 백성들이 부르는 아리랑 선율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즉시 이 노래를 서양식 오선보에 옮겨 적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채보된 곡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의 모태가 되는 '구(舊)아리랑'입니다.
2) 논문 『조선의 성악(Korean Vocal Music)』 발표 (1896년):
그는 1896년 영문 잡지인 『한국소식(The Korean Repository)』에 아리랑의 오선보 악보와 한글 가사, 그리고 영문 번역 가사를 수록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아리랑이 문헌상 악보로 기록된 최초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아리랑은 조선인에게 쌀(밥)과 같은 존재":
그는 논문에서 "한국인들에게 아리랑은 주식인 밥과 같다. 다른 노래들은 부수적일 뿐이며, 조선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이 노래를 부른다"라고 극찬했습니다.
또한 한국인들을 '즉흥곡의 명수'라고 부르며, 우리 민족의 뛰어난 음악적 천재성을 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했습니다.
사라질수도 있었던 민족의 노래에 영원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이를 세계에 전파한 그의 노력은, 한국 문화의 가치를 서양에 알린 최초의 문화 외교적 쾌거였습니다.
3) 미국 찬송가집에 실린 아리랑
헐버트 박사가 세계에 전파한 아리랑의 아름다운 선율은 세월을 흘러 미국 종교 음악계까지 매료시켰습니다.
▪️수록 찬송가:
1990년 미국 연합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USA)가 발간한 공식 찬송가집(The Presbyterian Hymnal) 346장(또는 일부 판본 229장)에 공식 수록되었습니다.
▪️찬송가 제목:
〈Christ, You Are the Fullness〉(그리스도, 당신은 하나님의 충만하심)라는 제목이며, 악보 밑에는 곡조의 명칭(Tune Name)이 'ARIRANG'으로 명확히 표기되어 있습니다.
▪️전원 합의 통과:
미시간주 칼빈 대학의 버트 폴먼(Bert Polman) 교수가 아리랑 가락에 감명을 받아 골로새서 말씀을 바탕으로 가사를 붙여 제출했습니다. 당시 3,000여 곡의 후보 중 편찬위원회의 만장일치 찬성을 얻어 정식 찬송가로 채택되었습니다.
결국 헐버트 박사가 130여 년 전 "이 노래는 세계적인 가치가 있다"며 꼼꼼히 받아 적어 둔 악보와 문화적 전파 노력이 씨앗이 되어, 오늘날 미국과 캐나다의 교회에서도 한국의 가락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적 같은 결과로 이어진 것입니다.
🔺헤이그 특사인 이준, 이상설, 이위종과 헐버트 선교사
3. 고종의 밀사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헐버트는 복음전파자 그리고 교육자와 연구자를 넘어, 일제의 침략에 고통받는 대한제국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외교 무대에서 전방위로 활약했습니다.
1) 을사늑약 반대 친서 전달 (1905년):
고종의 밀명을 받아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는 친서를 들고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찾아갔으나, 미국의 외면으로 면담하지 못했습니다.
2) 헤이그 특사 지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특사가 파견되도록 막후에서 기획하고 도왔습니다.
3) 현지 언론 기고:
헤이그 회의 상설공보에 대한제국의 비극적인 상황을 폭로하는 글을 기고하며 국제사회에 일제의 침략을 고발했습니다.
4. 강제 추방과 끊임없는 독립운동
헤이그 특사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한국으로부터 강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의 한국 사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 서적 출판
1906년 『한국의 대동사(The Passing of Korea)』를 저술하여 한국의 역사, 문화의 우수성과 일제의 잔학상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2) 미국 내 여론전
미국 전역을 돌며 순회강연을 열고, 글을 기고하며 한국의 독립성취를 위한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3) 서재필·이승만 지원
헐버트 박사는 미국 전역을 돌며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하는 순회 강연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 재미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든든한 학술적·정치적 지원군이 되어주었습니다.
4) 3·1 운동의 정당성 전파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헐버트는 이승만과 교류하며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등에 일제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연설문을 제출하는 등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미 정계에 전달하는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5.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
이승만의 국빈 초청 (1948~1949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자, 그는 가장 먼저 옛 스승이자 동지였던 헐버트 박사를 잊지 않고 찾았습니다.
1) 초대 대통령의 국빈 초청:
1948년 대통령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 선포 후 헐버트 박사를 국빈 자격으로 공식 초청했습니다.
2) 유언이 담긴 답장:
1948년 12월, 헐버트는 이승만에게 서한을 보내 “아내가 위독하여 지금은 갈 수 없지만 다음 기회에 꼭 가겠다"라며 안부를 전했습니다. 바로 이 서한에 그의 유명한 유언인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 1949년 7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제물포에 도착한 헐버트
6. 눈물의 마지막 재회와 임종 (1949년 8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인 1949년 7월 29일, 86세의 노구였던 헐버트 박사는 마침내 인천항을 통해 그토록 그리워하던 대한민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이 넘는 긴 항해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쓰러져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습니다.
1) 국무회의를 중단한 이승만:
1949년 8월 2일, 국무회의 도중 헐버트 박사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회의를 즉각 중단하고 병원으로 직접 달려갔습니다.
2) 눈물의 임종:
침상에서 옛 제자이자 대통령이 된 이승만을 마주한 헐버트 박사는 떨리는 손을 내밀었고, 이 대통령의 위로에 말없이 눈물만 흘리다 사흘 뒤인 8월 5일 서거했습니다.
3) 양화진 안장: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평소의 유언에 따라,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습니다.
4) 미국 유족에게 보낸 전보:
이승만 대통령은 서거 직후 헐버트 박사의 미국 유족(큰딸)에게 영문 전보를 보내 "부친이 오실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최선을 다했으나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다"라며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헐버트 박사의 이 같은 공로를 기려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며 두 사람의 오랜 동지적 우정과 헐버트 박사의 헌신에 최고의 예우를 표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의 배경에는, 우리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호머 헐버트 선교사의 눈물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8월 5일 그분의 서거일을 보내면서 그의 숭고한 헌신을 가슴 깊이 되새겨 봅니다.
🙏🏻 기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 저희는 한 세기 전, 어둠과 절망에 갇혀 있던 조선 땅에 푸른 눈의 선구자를 보내어 저희 민족의 눈을 뜨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드립니다.
조선 백성들을 제대로 선교하고 가르치기 위해 매일 밤낮으로 한글을 공부했던 헐버트 박사의 열정을 돌아봅니다.
그는 단시일에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깨우쳤고, 우리조차 귀한 줄 몰랐던 한글과 한민족의 위대함을 전 세계 만방에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띄어쓰기 하나, 마침표 하나에 담겼던 그의 세밀한 사랑 덕분에 저희가 오늘날 말과 글을 잃지 않고 이 자리에 서 있음을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지혜의 주님, 이제 그의 삶을 거울삼아 오늘을 살아가는 저희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언어를 깨우쳐 한민족을 깨웠던 헐버트 박사처럼, 오늘 저희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깊이 연구하는 자들이 되게 인도하옵소서.
세상의 유혹과 분주함 속에 닫혀 있던 영안을 열어주사, 성경 속에 담긴 진리의 위대함과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날마다 새롭게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헐버트 박사가 한글과 한국의 독립과 위대함을 세상에 외쳤듯, 저희 또한 가슴에 새긴 성경을 들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 만방에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며, 저희에게 맡기신 전도자의 직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또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했던 그의 절절한 사랑의 고백을 통해 저희의 영적 주소를 다시금 확인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와 명예를 배설물처럼 여기고, 더 고귀하고 가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택한 사도바울처럼 그리고 대한민국 땅을 선택했던 헐버트 박사의 그 마음처럼, 오늘 저희 크리스천들도 저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눈앞의 세상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동안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가치에 매여, 땅 차원의 복된 삶을 구하며 살아왔던 저희의 어리석음을 이 시간 철저히 회개하고 버리게 하옵소서.
저희는 이 세상의 나그네일 뿐이며, 영원한 하늘나라의 시민권자요 백성이라는 사실을 그 어떤 세상의 명예보다 더 자랑스럽게 여기며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양화진의 서늘한 그늘 아래 잠든 복음의 선구자이자 하늘 소망을 품고 살았던 헐버트 선교사의 발자취를 따라 저희도 신실한 천국 백성이자 전도자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나라를 잃은 암흑기 속에서 저희 민족의 손을 잡고 세계를 향해 정의를 외쳤던 그의 펜과 발걸음은 복음을 입술로만 외치지 않고 불의에 맞서 삶으로 복음을 살아냈던 모범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이며 성전인 저희가 세상과 대한민국이 겪고있는 고통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소금과 빛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늘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고 감사드리며, 저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복의 통로로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김수경 목사 Pastor Esther Soo-Gyung Kim
뉴욕퀸즈교회
The 2nd Life Foundation 대표
이승만 기념 장학재단 부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