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기독신춘문예 / 서상규
붉은 십자가 / 서상규
햇살 밝은 은총을 이파리마다
녹음으로 펼쳐 보인 순례의 길
뿌리를 흔드는 폭풍우에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나뭇가지의 자세를 풀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그림자에 피맺힌
그늘의 멍 자국이 짙어만 갔다.
오병이어 기적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말씀의 한 획 한 자
거룩한 성령체로 익혀나갔다.
흰 비둘기의 깃털 같은
허공이 포근하게 감싼 과일에
햇무리가 눈부신 광채를 둘렀다.
한 시절 주름살 접힌 고뇌로
결실의 축복에 십자가를 짊어져야할 때
하늘빛에 푸르게 날이 섰다.
서릿발이 잎맥에 못을 박는
고통이 나이테를 휘감아
우주의 울림으로 퍼져나갔다.
흥건히 핏물 번진 단풍
한 잎 두 잎 숨결이 졌다.
새날의 부활로
열매가 조용히 꼭지를 놓았다.
닭이 세 번 목울대를 돋운 새벽녘
십자모양 야광 띠를 두른 청소부가
죄의 쓸개즙같이 얼룩진 길을
빛살무늬 선명히 쓸고 있다.
[당선소감]
꽃샘추위가 휩쓸고 간 후 봄을 재촉하는 실비가 내린다. 은총이 총총총. 목련이 기도하듯 꽃망울을 내밀고 개나리가 유치부 아이들처럼 조잘조잘 피어난다. 당신의 음성은 빗방울로 돋아나 꽃무늬 파문으로 목련의 꽃망울을 두르신다. 당신의 손길은 빗줄기에 생명선을 뻗쳐 개나리 꽃잎의 순결한 머리를 쓰다듬으신다. 겨울잠에 잠긴 나무들에겐 보혈의 신성한 피 냄새로 껍질을 겹겹이 두른 가지를 두드려 성령을 일깨우신다. 곧 심지에 등불을 밝힌 싹눈을 틔우리라. 당신은 높은 보좌에서 땅으로 내리시어 낮은 뿌리를 적시신다. 당신의 섭리가 기적이 아닌 것이 없지만 겨울을 난 생명들에겐 봄의 기적을 아낌없이 베푸신다. 꽃비는 당신의 말씀이시다. 자연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과 느낄 수 있는 촉감을 지녀 한 획 한 자 놓치지 않고 잎사귀에 꽃잎에 받아 적는다. 인간만이 아직 눈 비늘과 귀마개와 두터운 외투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봄비의 환희 속에 전해온 당선 소식. 한 순간 정신이 하얗게 바래진 듯하다가 곧 감사의 기쁨에 사로잡힌다. 주님의 영광을 받기엔 미약하고 부족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미숙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서 얼마나 대견해하실까. 눈물이 난다.
[심사평]
반세기 역사를 지닌,한국교회의 최장수 언론지인 '기독공보'가 수 년 전에 시작한 '기독 신춘문예'는 이 땅의 기독교문학의 진흥을 위해서 참 잘한 일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모여서 오늘날 심각의 정도가 깊어가는 세속문화를 구축(驅逐)하는 대안문화로서의 기독교문학이 그 위상을 점차 강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공모한 제8회 신춘문예의 시 부문은 응모 편수에 비해 전반적인 수준이
심사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비판은 쉬우면서도 실제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기독교문학의 근본적인 과제이기도 하지만
이번 응모작품들 역시 시의 형식은 갖추고 있으나 정작 설명조의 서술에 머문 작품들이 많았다.
지나친 신앙의 열정이 '문학'이라는 여과내지 정화 장치를 무시한 채 쉽게 감동하고
고백하는 영탄조의 언어를 남발하고 있거니와,
일상의 기도문을 시로 착각하고 쓴 경우도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의 하나이다.
지나친 관념적인 언어의 남발과 기독교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만용도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이런 중에도 깊은 산 속의 옹달샘처럼 신선한 작품이 드물게 있어서 신앙시의 앞날을 위해 다행스러웠다.
한현수의 '숲에 눕다'와 조명수의 '바울의 편지',조성욱의 '질투',김영숙의 '에서를 만나다',
최홍규의 '산골 동네 십자가', 김형미의 '오월의 신부; 부제 귀가',
이종섭의 '점자책',그리고 서상규의 '붉은 십자가' 등이 눈에 띄였다.
'오월의 신부'는 역설적인 제목이다. 나그네 인생길에 왔다가 팔순의 발걸음을 남기고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가는 수의(壽衣)걸친 사자(死者)를 오월의 아름다운 신부에 비유한 것은 드문 발상의 가작(佳作)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시의 분위기를 너무 절제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점자책'은 글쓴이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적 시선이 예리한 가작(佳作)이다. 한 해의 수확을 거둔 텅 빈 논을 바라 보면서 벼를 밴 밑동의 행렬을 점자책에 비유하고, 거기서 영적 무지를 깨우쳐주는 말씀의 이미지를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연(聯)에 가서 뒷심을 쓰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반면에 '붉은 십자가'는 '시'로서, 그리고 '신앙시'로서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이 시인의 다른 3편의 작품도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서 당선작으로 밀기에 안심이 되었다.
화자(話者)를 통해서 생활인의 시각이 십자가에 모아지고,
거기에서 새로운 내면세계를 표백해 내려고 하는 신앙의 의지를 무리없이 형상화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사명감으로 전진하고 있는 기독공보의 '신춘문예'가 앞으로 햇수를 거듭함에 따라
이 땅의 기독교문학의 밭을 기름지게 할 좋은 농부들을 많이 배출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 심사위원 최은하 전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회장, 김성영 성결대 (총장 역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