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자신의 혼을, 내적 힘을 통하여 다시 한번 고양시키지 않으면 안된다(색채의 본질, 2016, 107)."
현재 우리들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여기 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마치 헝크러진 실타래가 나둥그러진 것같아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을까란 의문마저 든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문제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근본 즐기가 있다. 그것이 뭘까가 질문이다.
이를 필자가 학교교육을 받으면서 일관되게, 끊임없이 질문하였기 떄문에 파악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답을 찾지 못하였지만, 슈타이너 책을 읽으면서 다행히 그 답을 찾았다. 당시 생각은 필자의 내부에서 원하는 것이 분명 아닌데 외부(학교교육)에서는 강요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상하다'는 생각 정도만한 듯하다. 인간 내부 상황과 전혀 다른 상황을 외부에서 강요하면 분명 안되는데 하는 정도. 이를 크게 보면 '인간의 본성에 따른 교육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절대 틀리지 않고, 나아가 인간 본성에 따른 교육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이러한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태어난 후 몇년동안 무의식적으로 살다가 차츰차츰 의식적으로 됩니다. 그렇다면 의식적으로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아이가 자신이 내면생활을 외부세계에 적응시킨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외부세계를 연괸시키고, 외부세계에 자신을 연결합니다(청소년을 위한 교육예술, 2023, 157)." 인간이 태어나서 3 세까지는 자아를 의식하지 못하다가, 3세 이후 어렴풋이 자각을 한다. 이때의 자아는 상속에 들어간 자아이다. 상속의 자아가 서서히 외부세계를 의식하는 것이다. 외부세계를 의식하기 시작은 하지만, 외부세계와 인간의 내부가 연결되지는 않았다. 이제 연결을 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된다.
문제는 아이의 내면과 외부 세계가 연결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이제 연결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연결이 되어야 인간 내면의 기관을 활용하기 떄문에, 만약 연결이 안되면 외부세계의 삶을 살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야 된다. 연결시키는 방법이 교육방법이고, 그 교육방법이 현재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을 분명 필자가 학교에서 직접 경험하였다. 지금도 그 당시 당황한 상황을 뚜렷이 기억하는데, 아마 지금의 아이들은 그 정도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그 당시 교육이 필자의 내면에서 원하는 상황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이다. 필자의 내면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내면은 인간 정신의 발달 상황이다. 구체적으로 7-14세 사이 교육이다. 7-4세 사이 아이들의 발달단계는 에테르체가 독립하여 자신의 힘을 발현하는 시기이다. 에테르체는 정신세계에 있을 때 지닌 상을 지니고 있다. 이 상을 외부세계의 상과 연결시켜주어야 하는데, 이 상을 그림을 통한 이야기로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아이가 정신세계에서 가지고 온 상과 외부세계에서 들려준 상이 일치한다면, 아이들은 속으로 환호성을 지른다고 한다. 이것이 무의식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아이들이 현실에서 지각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이들의 표정과 감정은 분명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일치하는 상이 후일 아이들의 소질이나 창조로 연결되는 것이다.
필자는 초등 2학년 때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당시 상황을 짐작하면, 필자가 장난을 친 모양이고, 선생님은 여러 번 주의를 준듯하다. 하지만 필자가 여전히 장난을 친 모양에 선생님은 소리를 지르셨고 깜짝 놀란 필자는 이래서는 안된다는 위기 의식을 느낀 듯하다. 그 전까지는 필자의 내부에 따라서 외부생활을 유지했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그 시기 아이들은 내부의식에 연결되어서 생활한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아이들의 내부에 맞게 교육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이를 나무라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실로 적반하장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상황을 모르므로 외부에서 요구하는대로 따를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부를 닫는 것, 내부를 닫아야 더 이상 내부의 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고 외부에 맞출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본의가 아니게 내부를 닫고 외부에 따라서 생활을 했지만, 이것이 평생 돌이킬 수없는 결과를가지고 오게된 것임은 후일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결단코 이 때 필자의 내부를 닫지 말아야 하였다. 에테르체가 발달하는 시기에 내부를 닫았으니, 에테르체의 발달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므로, 에테르체의 기능이 모두 사라져 없어진 것이다.
에테르체의 기능은 첫째, 추상적인 상을 제시한다. 물론 이 상은 아스트랄체의 작업을 통하여 우리가 현실에서 이해를 하므로 에테르체가 상을 제시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에테르체가 상을 제시하지 않으면, 아스트랄체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과 추상적인 상은 이해하지 못한다. 추상적인 상이란 예컨대 수학에서 수준이 높아지면 추상으로 넘어가는 경우를 의미한다. 모든 경우 수준이 높아지면 추상으로 넘어갈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추상적인 상에서 창조로 나아간다. 창조란 에테르체의 상(정신세계에서 지닌)을 아스트랄체가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에테르체는 기억에도 관여한다. 따라서 필자는 에테르체가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기억하는 것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필자가 이것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중학교 시절 영어 단어 외우기 였다. 물론 노력이 부족했다고도 할 수가 있지만, 잘 안된다는 것은 내부 정신이 문제라고도 할 수가 있다. 기억은 다른 부분에서도,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특히 7-14세 사이 발달해야 하는 정신이 발달하지 않으면, 평생동안 어려움이 간다고 했는데, 여전히 그 말을 실감하고 있다.
셋째, 에테르체는 생명의 힘으로 우리 몸을 만드는 작업을 평생동안 한다. 인간의 몸은 7년을 주기로 바뀌어서 새로운 몸이 된다. 에테르체가 잘 발달했으면 생명의 힘도 온전하게 작용할 것이다.
넷째, 자신의 일에서 뭔가 이룬 사람은 7-14세 사이 에테르체의 발달이 온전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필자는 학교교육에서 항상 어떤 부분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에 에테르체의 활동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는 이유를 몰랐지만, 예를 들어 음악을 한다면 아스트랄체가 흥미를 가지고 노력은 하겠지만, 그 노력이 추상을 뚫고 나아가야 하고 또 습관으로도 이어져야 한다. 나아가 노력을 하는 힘, 이 추진력이 생명의 힘에서 나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핑계가 아니고 지금의 아이들을 보면서 내부의 정신이 온전하게 발달했다면 하는 안타까움에서 하는 말이다.
마지막, 정신은 어떤 순간에도 발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속성이다. 그러므로 노력한다면 발전해 나아간다. 필자가 그나마 이 정도의 사고력을 가진 것은 '구구단외우기'에서 내부와 연결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숫자는 진리의 다른 표현이다. 예를 들어 1에는 '전부'라는 진리,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진리가 내재한다. 내가 1을 생각하면, 나는 1의 진리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내부의 진리의 존재와 같은 환경이 되는 것이다. 결과로 내부와 외부가 연결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구구단외우기를 할때 1과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아무 생각없이 해야 1이라는 진리와 하나가 된다. 상에서 한다면 1이라는 진리와 하나가 되기는 어렵다. 추측하건대 당시 구구단을 외울때 1과 하나가 된 듯하다
이런 관점에서 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무 생각 없이 현재하는 일과 하나가 되면 된다. 옛선사들이 아무 생각없이 자신의 삶, 단순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이때문이다. 늘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자신의 본래 자아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산 것이다. 여담으로 필자도 여러가지 문제로 힘이 들면 단순한 일을 하면서 음악(베토벤의 교향곡)을 듣는다. 단순한 일이란 아무 생각없이 그냥 하는 일이다. 그러면 어느 새 힘든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을 느끼고는 한다. 관건은 매순간 본래자아가 등장해야 하고 그래야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일단 7-14세 사이 에테르체가 발달하지 못한 경우의 예, 필자의 예를 들었다. 슈타이너의 책을 읽으면 필자가 가진 의문이 대부분 풀린다. 이것이 지금도 슈타이너의 읽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 슈타이너의 책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정신이기 때문인데, 정신은 체험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과학적 요소가 온전하게 성장, 발달해야 비로소 인간의 내적 힘을 사용한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혼의 힘을 쓰는 것이다. 필자는 동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끔 자신의 혼의 힘을 사용하는지 살펴보고는 한다. 세계적인 연주자로 인정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의 혼의 힘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콩쿨에서 두각을 나타내어서 K클래식이 각광받지만, 앞으로 나아갈려면 자신만의 개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런 의미라고 생각된다. 트롯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혼의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공감을 받고 우승한다는 사실이다.
결론으로 어떻게 혼의 힘을 사용할 것인가이다. 인간의 본성에 맞는 교육을 받으면 된다. 하지만 현 인류가 과학적인 사고방식만 인정하므로 학교교육에서는 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의 정신과학적 요소를 발달시켜야 한다. 이는 먼저 정신의 속성에 맞게 살아야 한다. 필자가 이를 실험해 봤는데 하기 싫은 일을 하면 상속에서 자아가 하므로 효과가 나지 않았다. 무심하게 그냥 하면서 이것이 습관이 될 때까지 해야 한다. 무심하게 하면 본래 자아에게 연결이 되고, 그런 상태로 꾸준히 하면 에테르체가 그런 상태로 정렬이 된다. 습관이 되면 인간 내부기관이 발달한다. 예를 들어 '차크라'가 움직이고 빛이 난다. 그러면 혼의 힘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든 내부 기관이 발닳할 때까지 꾸준히 해야 한다. 정신의 발달은 누구도 가능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하면 된다. 문제는 그 일과 하나가 되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