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81) 대상과 인식 과정 - ③ 관점과 미적 지각의 유형 -㉮ 피상적 지각과 기계적 지각/ 시인 오규원
대상과 인식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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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관점과 미적 지각의 유형
어느 관점에서든, 그 관점에서 서서 대상을 수용하기만 하면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상을 시적 공간(작품)에 수용하는 과정이란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이므로,
언어로 표현해놓은 다음에야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시인 → 시적 대상 → 시적 인식 → 시적 언술 → 시 작품이라는 과정의 결과를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창작 과정 속에서, 우리는 대상을 지각하는 몇 가지 유형을 추출해볼 수 있다.
이 지각의 각도, 즉 관점 속에 흔히 나타나는 몇 가지 미적 지각의 유형을 보자.
■ 대상
ㅇ 관념적 관점
· 피상적 지각 – 공원(1)
· 추상적 지각 – 공원(2)
· 풍자적 지각 – 공원(3)
· 해석적 지각 – 공원(4)
ㅇ 실재적 관점
· 기계적 지각 – 공원(5)
· 장식적 지각 – 공원(6)
· 감각적 지각 – 공원(7)
· 사실적 지각 – 공원(8)
이 유형은, 물론, 창작 과정에서 흔히 보이는 형태를 그 나름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것을 검토해보면 대상을 어떤 시각에서 접근하면 바람직한 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피상적 지각과 기계적 지각
다음은 공원을 공통으로 시적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 속에 드러나는 위의 8가지 유형을 비교 검토해보자.
공원은 모두의 안식처
가난한 사람도
부지런한 어린 아이도
누구도 찾아와
때묻은 영혼을 맑은 공기에
씻는다.
끝없이 무거운 나날의 짐을 내려놓고
고통을 잊으며
새로운 출발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
다가올 내일을 위해
―「공원·1」
「공원·1」은 ‘공원은 모두의 안식처’라는 식의 관념적 해석을 보여주고 있으나,
상식의 나열과 그 설명이라는 점에서 피상적 지각이다.
상식이란 누구나 알고 있는 흔한 지식이다.
그런 점에서 상식은 거죽 지식에 불과하고, 그 거죽 지식을 나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피상적인 것이다. 피상(皮相)이란 낱말의 뜻이 거죽 겉모양·겉면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상식과 사실은 전혀 다르다.
특수한 경우(예를 들어 반어법)를 제외하고는, 작품 속의 상식은 작품 밖에 있을 때와 다름없는 거죽 자식이지만, 사실은 느낌(feeling)을 구체화하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속의 사실적 존재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의 미적 지각의 등가물이다. 다음을 보라.
a) 꽃은 아름답고 예술은 영원하다.
b) 꽃이 피어 있다.
두어 송이
a)는 상식, 즉 거죽 지식의 나열이다.
b)는 그런 피상적 지식 대신 사실적으로 사물 현상을 가시화한다.
그 형상화된 사물 현상은 개개의 작품 공간에 어울리는 각각 다른 정서와 의미를구성한다.
b-1) 해가 지는 서산
새들의 그림자가 설핏 기운다.
그곳에도
꽃이 피고 있다.
두어 송이
b-2) 꽃이 피고 있다.
두어 송이
새들이 날고 있다
서넛
봄 아지랑이 속.
b-1)의 꽃은, 닥쳐오는 어둠의 세계(해가 지는 서산, 기우는 새들의 그림자)와 대립하는 밝음의 세계(꽃)를 암시하는 존재이다.
그 꽃이 b-2)에서는 단순히 봄의 활기(날고 있는 새, 아지랑이)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작품 속의 사실적 존재나 현상은, 그것들이 이미 허구인 예술 작품 속으로 공간 이동을 한 만큼,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구체화하는 형상적 존재들이다.
작가는 이런 형상, 이런 형상화를 통해 말한다.
상식의 나열과 부연 설명은 사고의 피상성과 상투성(stereotype)의 본보기이다.
혼자서 공원에 갔다.
나무들은 바람 따라 잎을 흔들고
잔디는 파란색으로
넓게 깔려 있었다.
사진사가 큰 소리로
‘사진 한 장 찍으시오’ 했지만
모른 척했다.
벤치에는 가끔 누워서
잠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울 때
비가 후두둑 떨어졌다.
날씨가 춥지 않아 다행이었다.
―「공원·5」
관념적 관점의 「공원·1」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작품이 실재적 관점의 「공원·5」이다.
「공원·5」는 기계적 지각의 좋은 보기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대상을 관찰하고 탐구하려는 흔적을 보여주지 않는다. 즉 사고의 흔적이 없다.
실재하는 풍경을 작품에 표현해놓기는 했지만, 그것은 탐구나 의도적 선택이 아닌 기계적인 옮겨놓기이다.
아래 작품과 비교하면 그 점이 더 분명해진다.
땅 위에 내려
조알을 세고 있는 새
손바닥만한 땅 위
조알을 하나씩
부리로 세고 있다
몇 개 조알의 힘으로
새는 하늘로 떠오르고
새를 따라 조알들은
허공에 흩어진다
―권혁진, 「遠景」
이 시는 짧지만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땅”과 그 땅 위에서 날기 위한 조알 몇 개를 쪼고 있는 새와,
새가 날 때 흩어져버리는 조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특히 “몇 개 조알의 힘으로/ 새는 하늘로 떠오”른다는 표현은 얼마나 놀라운가! 또 조알의 힘으로 새가 날 때,
나는 새들과 달리 남은 조알들이 허공에 흩어진다는 사실도 그냥 스쳐 지나가버릴 것이 아니다.
좁은 땅·새·조알, 이 셋은 무작위적 옮겨놓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탐구의 흔적이다.
그러나 「공원·5」는 거죽 지식과 마찬가지로 기계적으로 옮겨 놓은, 죽은 사고이다.
< ‘현대시작법(오규원, 문학과지성사, 2019)’에서 옮겨 적음. (2021. 2. 5.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81) 대상과 인식 과정 - ③ 관점과 미적 지각의 유형 -㉮ 피상적 지각과 기계적 지각/ 시인 오규원|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