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복있는 사람
시편 1: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은 의인과 악인, 복과 저주가 계속해서 대조되어 나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정직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은 의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며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은 악인으로 구별되어 나옵니다.
성경에는 "복"이라고 번역된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시편 1편과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 쓰인 "복" (에쉬어"אֶשֶׁר")은 "~을 했을 때에 받는 결과"를 말합니다. 즉 산상수훈에 나온 것처럼 "~을 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의미로 쓰인 용어입니다. 즉 인간이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거기에 대한 댓가(상)를 받는 복을 말합니다. 따라서 시편1편에 쓰인 "복있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해야한다는 전제 조건이 들어갑니다.
(1) 복있는 사람의 소극적 행동
1절에 보면, 복있는 사람의 행동 중에서 소극적인 3가지 면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3살 버릇이 80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의 습관은 반복되는 행동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사람은 행동하기전에 먼저 생각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즉 생각대로 행동하며 행동이 반복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대로 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꾀는 '생각'이며, 죄인의 길은 '행동'이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은 '습관'을 말합니다.
첫째로 복있는 사람은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한국 성경은 "악인의 꾀"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꾀"라는 말은 "모략, 상담, 의견, 충고, 목적, 의도"(counsel, advice, purpose) 등의 뜻을 갖고있습니다. 즉 악인의 충고나 악인의 지혜나 악인의 목적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이므로 아무리 세상적으로 지혜스럽고 좋은 의도를 갖고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있는 사람은 세상의 지혜를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찌라도 좇지 말라"(잠 1:10). 그러나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세상의 카운셀러를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삶 속에서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립해야만 합니다.
둘째로 복있는 사람은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죄"라는 것은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과녁에서 많이 빗나갔건, 아주 조금 빗나갔건 조금이라도 빗나갔으면 "죄"입니다. 따라서 "죄인"은 과녁 즉 하나님의 율법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간 행동을 하는 것, 즉 불순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살인과 같은 큰 죄를 지어야만 죄인인 줄로 착각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바로 죄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또는 세상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인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찌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잠 3:7)
셋째로 복있는 사람은 습관을 조심해야 합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에서 "오만"이라는 말은 "자랑하다, 과장해서(부풀려서) 말하다, 무례하다, 오만하다, 경멸하다, 조롱하다, 비웃다, 무시하다"(to scorn, make mouths at, talk arrogantly to boast, scorn, mock, deride, to be inflated, scoff, act as a scorner, show oneself a mocker) 등의 의미입니다.
"앉다"라는 말은 편안한 자세를 말합니다. 자랑하고 과장하고 무례하고 비웃고 무시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이미 몸에 베어서 아주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언행을 해도 불편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그러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은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그들의 예수님을 향한 비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scorners)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
"무례하고 교만한 자(Proud [and] haughty scorner)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잠 21:24)
"거만한 자(scorner)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잠 19:25)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derision)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19:51)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scorn)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욥 16:20)
"그러므로 너희는 경만한 자(mockers)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우심할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서 들었느니라"(사 28:22)
그러므로 복있는 사람은 먼저 생각을 조심하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반복되는 언행으로 말미암아 형성되는 습관을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찌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삼상 2:3)
(2) 복있는 사람의 적극적 행동(2절)
악한 일을 생각지 않고 행하지 않는다고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적극적으로 행해야할 '선'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말씀하는 '선'은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착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즐거워한다는 용어 "חֵפֶץ(헤이페츠)"는 "기뻐한다, 갈망한다, 소원한다, 기꺼이 바란다"라는 뜻을 갖고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기를 갈망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순종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것을 소원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낙으로 삼는 상태를 말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둘째로 복있는 사람은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묵상이란 말은 "하가"(הָגָה)라는 말로, 이것은 "묵상하다, 말하다, 떠들어대다, 중얼거리다, 공부하다" 등의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묵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항상 생각하면서 율법에 대해 연구하며 또 그 말씀을 크게도 말하고 조용히 중얼거리기도 하며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그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은 그 율법대로 다 지켜 행하게 됩니다.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율법을 주야로 읽고 외우고 공부하지 않으면, 쉽게 마귀의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말을 아담만 들었고,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전해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직접 성경을 읽고 깊이 묵상하지 않고, 남이 하는 설교만 듣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설교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전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된 말씀을 들었을 경우에는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 바른 말을 듣더라도 건성으로 들을 경우에는 하와처럼 잘못 알아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에 모두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칼"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3) 복된 실천의 결과(3절)
나무는 기본적으로 물의 공급을 잘 받아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쉬지않고 묵상하는 사람은 항상 물이 끊어지지 않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심은"이라는 말 "שָׁתַל(샤텔)"은 "옮겨 심다(transplant)"라는 말입니다. 이는 사막과 같은 땅위에 있던 나무가 물이 끊어지지 않는 시냇가로 옮겨 심기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동안은 과실을 맺지 못하고 잎사귀도 말라서 시들시들했던 나무가 이제는 복을 받아 과실을 맺으며 잎사귀도 마르지 않고 번성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행사가 다 형통하다고 말씀합니다. "형통"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형통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에도 형통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어떻게 감옥에 있는 것을 형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정치를 배워야하는데, 히브리사람으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신분으로서는 결코 정치인들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정치인들이 들어가는 특수한 감옥으로 보내서 그곳에서 정치범들로부터 간접적으로 정치를 배우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애굽의 돌아가는 정세와 정치를 배우려면 짧은 시간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정치인들의 감옥에 들어가서 몇년을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서 "형통한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상황이 고난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아래에 있다고 믿는다면, 그 고난을 통해 복된 길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형통한 길임을 인식하고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결코 감옥에서도 불평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정치에 대한 교육을 마치신 뒤에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라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율법과 세상의 학문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재물이나 문화나 오락을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바로 복있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형통한 삶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이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편하고 안전하고 물질이 풍부하며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되어지는 것이 형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견고한 진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계획하신 그 길을 겸손히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복있는 자로서 우리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큰 은혜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제가 생각해왔던 복의 개념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의 개념이 차이가 있었던 것을 깨닫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기복적인 풍속에 젖어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 행함이 없이 그저 복만 받아누리고 싶어서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많은데, 저도 그런 부류에 속했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도 있지만, '복'이란 개념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을 때에 받아 누릴 수 있는 '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서 복만 받고 싶은 것이 죄인들이 마음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는 별로 관심이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며 교회생활을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성경에 대해 너무 무식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성경말씀을 알고자하는 간절한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저 남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 또는 남들보다 많이 안다고 자랑하기 위해 상식적으로 알고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고있는 상식과 대립되는 성경말씀을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그와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제 자신을 굽혀야 한다는 생각에 결코 제 자존심을 구길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을 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의 입을 막은 것이 주님 앞에서 심히 교만한 것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습관적으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제 속에 너무나 견고한 마귀의 요새가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고백하오니,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사 제 속에 있는 더럽고 추악한 견고한 진을 주님의 말씀으로 산산히 부서뜨려주옵소서.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제 속에 있는 단단하고 고집스런 굳은 마음을 제하여 주시고, 부드럽고 온유한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래서 주 안에서 생각이 복을 받으므로 복있는 자의 언행을 함으로 경건한 습관이 제 삶 속에서 배어나오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저의 변화된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놀라게 하시며, 그들의 입에서 "복있는 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모든 것을 순종하며 실천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소극적으로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것으로 그치는 삶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저도 미워하며 주님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주께서는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제가 복을 받을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으므로 복을 받지 못했음을 깨달아 알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복을 받기 위해 이제부터 매일 매순간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겠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아서 복을 받지 못하면서, 제 잘못은 생각지 못하고 하나님과 환경만 원망했던 것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이제는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고 싶습니다. 아니 주님께 칭찬받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하오니 저에게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시고, 온전히 제 삶을 주께서 주관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한 순간도 제 뜻대로 살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뜻대로만 살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모든 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서 그 복을 주위에 나누어주며 살아가는 복의 근원의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