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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고향의 의미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읽고-
(풀내음)
모든 문학 장르를 불문하고 ‘좋은 작품’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오랜 시간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여러 문학이론서를 읽어도 명쾌한 결론을 얻을 수 없었던 나는 꽤 답답했다. 혼란스러움만 가중될 무렵, 『삼포 가는 길』은 속 시원히 그 고민을 해결 해주기에 충분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신선감, 간결한 문체로서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과 시대의 애환을 그린 글이라면 ‘좋은 작품’이 아닐까 하는 주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삼포 가는 길』은 가공의 지명으로 떠도는 자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1970년대 산업화가 초래한 고향 상실의 아픔을 형상화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진정한 고향의 의미를 되짚어 보며 마음이 착잡했었다. 또한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서 가난의 서러움을 털어 보고자 찬란한 꿈을 안고 도시로 나온 내 고향 사람들의 내면의 아픔까지도 간접 체험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무렵 나는 외톨이가 되었었다. 궁핍한 생활을 이유로 진학을 하지 못한 친구들은 산업체를 찾아 뿔뿔이 흩어져 갔었다. 한여름 느티나무 아래 무더위를 식히던 젊은 청년들 역시 농사일을 외면하며 살림부스러기를 챙겨 고향을 등졌다. 언제나 시끌벅적 이던 골목길에 인기척이 끊기고 적막감만 돌던 고향의 모습. 도시만 가면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소문이 내 고향 사람들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고향을 떠났던 그들이 몇 달만에 선물상자 한 아름 안고 정종 술병이라도 들고 동네 어귀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너무나 빨리 가난의 그늘을 벗어난 모습이었다. 몹시 부러웠었다.
그러나 나의 편견은 빗나가고 말았다. 공부 잘하던 내 친구 순희의 편지 속에는 도회지의 밑바닥 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달픈지를 구구절절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은 누구도 귀향하지 않았다. 비록 막노동을 할지라도 얼마간의 돈만 있으면 도시의 편리한 생활을 청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또한 한평생 시골에서 일을 해 봐야 목돈을 쥘 수 없다는 절망감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언젠가 형편이 닿으면 귀향하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수 십 년 삶의 터전을 거두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도시에서의 삶이 성공적이지 못했던 정씨는 막다른 길목에서 고향 ‘삼포’를 선택했다. 그러나 정씨가 동경해오던 고향은 이미 예전의 고향이 아니다. 관광호텔이 들어서고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다는 풍문은 그의 발걸음을 멈칫거리게 했다. 정씨의 위안처였던 고향은 그저 마음속에 담아 둘 수밖에 없음이 바로 요즘 우리들의 고향 풍경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현실에 고향 또한 예외가 있을 수는 없다. 도시든 시골이든 현실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어릴 적 고향의 아스라한 추억을 품고 사는 사람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한층 비애감이 깊어지지 않을까 싶다. 몰라보게 변해버린 고향 풍경에서 등장인물들의 실망 어린 눈빛들이 바로 그걸 잘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정씨처럼 우리는 과거의 고향만 기억하며 살아왔고 과거의 추억만을 찾아 귀향하는 본능이 숨어 있는 것 같다. 고향이 좋은 감정으로 남아 있는 곳이거나 통한의 아픔이 서린 고향이던 간에.......
금의환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은 곳, 시골에 고향을 둔 사람일수록 자신의 근원지인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애절할 것이다.
나 역시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고향을 떠난 지 십 수 년이 흘렀다. 더 나은 생활을 이유로 정처없이 떠돌며 살아온 세월이다. 마지막 정착지가 어디일지는 아직까지 속단할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타향살이가 길어질수록 고향의 의미도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백에 하나도 없으니 더욱 더...... 그래서 나는 불안정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다소 엉뚱한 생각까지 이르렀다. 현재 머물고 있는 곳도 나의 또 다른 고향이라 인정하는 것이다. 소중한 인연을 만나 정이 들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리 슬프지도 아쉬울 것도 없을 것 같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나의 육신은 비로소 옛 고향풍경을 안은 채 한줌의 재가 되어 고향산천에 영원한 귀착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 교육청 주최 사이버 독후감 대회 입상작)
진리를 찾아서(황석영 작 '삼포가는 길' 독후감)
영달이라는 한 뜨내기 노동자가 겪는 짧고 우연한 두 개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 이다. 노동판을 전전하던 그는 지금 하숙집 주인 여자와 불륜이 들통 나서 줄행랑을 치는 중이다.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 동행하게 된다. 십 년 만에 고향 삼포로 가는 정씨라고 부르는 중년이었다. 감방에서 배운 기술로 입에 풀치를 해오던 그는 이제 그런 생활에서 넌더리가 나서 몽땅 청산하고 귀향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요기나 하러 들렀던 식당에서 작부 한 사람이 밤사이에 뺑소니를 쳤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현상 붙은 여자 백화, 그들이 그 여자와 마주친 곳은 어느 눈 덮인 산 길 에서다. 도망치는 작부 백화는 불의에 마주친 두 사나이를 경계와 적의의 태도로 대한다. 하지만 약간의 실랑이 끝에 세 사람은 동행하게 된다. 삼포로 간다는 것 혹은 고향으로 간다는 일치된 동기가 그들을 순화시키고 무장 해제 시켰기 때문이다. 내면적인 교감이 이루어진 것이다. 진실을 향한 순수한 변화, 철학에서는 이것을 변증법이라 부른다. 변증법은 정, 반, 합의 과정을 반복하며 모순을 털어 냄으로써 진리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정, 반, 합은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그냥 한 꺼풀씩 모순이 벗겨지는 과정을 순차대로 부르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모순은 우리 삶에서 시루떡의 팥고물처럼 흩어져 있다. 결핍된 것, 왜곡된 것 등은 모두 이러한 숨겨진 얼굴들이다. 진리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고 사소한 변화 끝에 겹겹이 두루고 있던 모든 위선, 가장, 기만의 옷을 벗어던진 존재의 숨김없는 모습들을 두고 이르는 말일 뿐이다. 소설의 주인공들 에게 삼포 가는 길은 이처럼 위장과 허세의 모습을 털어버리고 각각의 진리에 이르는 변증법 과정이다. 백화의 눈에 영락없는 뜨내기 놈팡이로 비쳤던 영달, 거머리 같은 포주로부터 달아나는 힘없는 작부 백화를 잡아주고 돈푼이나 챙길 것 같았던 남자, 하지만 눈 덮인 산골에서 백화가 발을 삐지 뿌리치는 백화를 업고 그 긴 눈길을 건네준 것은 바로 그 남자 영달이었다. 주머니에 꼬깃꼬깃 숨겨두었던 마지막 돈으로 그녀에게 고향 행 기차표를 사 주고 빈털터리로 남는 남자, 그녀를 실은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눈발 흩어지는 역에서 말없이 오래 서 있어 주는 남자, 이것은 삼포로 가는 길의 한 종착역에서 이르게 되는 뜨내기 농동자 영달의 진리이다. 여기서 내가 본 작부의 백화의 눈물 , 눈물 젖은 아가씨 이점례 이것은 삼포 가는 길 변증법의 끝에 도달한 백화의 진리이다. 나의 모순은 무엇인가? 내가 당신에게 드러내야할 진리는 무엇인가? 나는 언제 삼포로 떠나려 하는가?(2003.4.25)
삼포 가는 길 독후감 (서호건)
소설은 영달이 밥값을 떼어먹고 도망쳐 나오다가, 고향인 삼포로 가는 정 씨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었던 영달은 정 씨에게 삼포가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정 씨를 따라 삼포로 가게 된다. 가다가 한 마을에서 국밥을 먹는 중에 ‘백화’라는 작부가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술집주인에게서 잡아오면 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그들은 감천으로 가는 중에 송림 사이에서 소변을 보고 있던 백화를 만난다. 당차게도 백화는 자신의 길고도 화려한 4년간의 작부 세월을 떠들었고, 그들은 그녀의 처량함 밖으로 나오는 당찬 태도에 매료되었는지 함께 길을 걷는다. 가던 길에 폐가에서 잠시 언 몸을 녹이며 백화는 영달에게 호감을 표하지만, 영달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분히 백화의 이야기를 듣는다. 다시 길을 걷다가 눈길에 백화가 넘어져 다리를 다치고 영달이 그녀를 업고 간다. 감천 읍내에 도착하여 백화는 영달에게 자신의 고향엘 가면 일자리를 잡아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영달은 차표와 빵을 사다주며 백화를 기차에 태운다. 백화는 개찰구로 나가며 영달에게 본명이 ‘이점례’라며 소리치고 기차를 탄다. 그들은 대합실에서 노인에게서 ‘삼포가 개발되고 있다’는 희비가 엇갈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영달은 잘된 일이라 여기지만, 마음의 정처를 잃은 정 씨는 기차가 도착하자 발걸음을 내딛기 힘들어했고, 기차는 어두운 들판을 향하고 소설의 마지막 점이 찍힌다.
무슨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할까? 이 짧은 소설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아져, 쉽사리 정리가 안 된다. 뇌 속의 ‘생각 체증(滯症)’이 일어난 것일까? 가장 먼저 정리된 것은 ‘소설 속의 눈에 너무 잘 띄는 우연성’이다. 영달과 정 씨가 소변보고 있는 백화를 만나게 되는 절묘하고도 신기한 전개가 그것이다. 사실 어색한 부분이 아닐 수 없지만, 작가로서는 백화라는 인물이 갖는 ‘삶의 탈피’의 이미지를 원활히 살리기 위해서는 만나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작가의 의도적인 개연성이 되는 것인가? 물론, 소설 밖의 일이기에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단지 결벽에 가까웠던 완벽성을 추구했다던 황석영의 소설에 이러한 눈에 띄는 우연성이 있다는 것이 조금 어색하게 느꼈다.
그리고 정리되는 것은 ‘삼포’라는 곳이다. 나에게도 ‘삼포’가 있는가? 마음속에 담가 둔 온 생각의 집결 점이인 그 곳.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대로 믿고 목표로 둔 가치 뒤에 숨어있는 내가 모르는, 내 모든 것의 집결 점의 가치를 무의미하게 해버릴 수 있는 ‘삼포의 존재성’ 말이다. 아직 나는 노인을 만나지 못했으니 기차에 오르기에 힘든 발걸음을 내딛을 걱정은 없지만, 막상 기차를 타려는 순간에 내가 몰랐던 진실을 말해버릴 노인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정 씨처럼 가슴에 억장을 무너뜨리는 우뢰를 맞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의 변화를 충분히 감할 수 있는 내가 된다면, 그것이 결코 기차를 타려는 내 발길을 붙잡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소설에서 느낀 ‘삼포’이다.
물론, 당시 시대상에서의 70년대 산업화로 인한 고향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그나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마지막 여생의 희망마저 유랑으로 보내지는 아픔과 결국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서로를 이해하며 의지하게 되는, 당시에 필요한 민중의 연대적인 의식 촉구하고자 함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한 본래의 의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삼포의 상실이 그러한 단순한 상실일까? 예기치 않은 변화에 민중은 수긍하고 모두 벙어리가 되어 모두 손과 발로 서로를 어루만지기만 해야 하는가?
그 당시 민중은 오히려 서로 부둥켜안고 서로를 쓰다듬기만 하는 영원히 어둠의 들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야했다. 영달과 같은 입장이 된 정 씨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슬픔을 끌어안고 안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두운 들판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는 것뿐이었을까? 그리고 그 기차는 왜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으로 향했던 것일까? 그럴 바에야 타지 않았어야 했었을 것을...
‘삼포’가 내가 꿈꾸던 ‘고향’과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면... 그러한 입장에서 나라면, 뜨내기 기술자가 되어 ‘삼포행 기차’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영달만 보내고, 나는 내가 꿈꾸었던 삼포 같은 곳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삼포’가 아닌 ‘제 2의 고향’을 꿈꾸며 변화의 원단(原緞)의 패턴에 알맞은 실 가닥을 끼워가며 새로운 무늬를 수놓을 것이다. 내가 걷는 발길은 전혀 무겁지 않다. 가던 길의 방향만 바꾸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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