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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는 부산으로 돌아와 복음 간호학교에 입학했다. 다시금 학생이 되고 보니 마음은 종달새처럼 날아올랐다. 무엇보다 ‘함께 대학생이 되면 좋겠다’고 말하던 형기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는 생각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1학년은 교양과목과 함께 비교적 학업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2학년의 까다로운 전공과목을 거쳐 3학년 실습에 들어가면서 ‘백의의 천사’로 불리는 간호사가 이름과는 달리 너무도 힘들고 고된 직업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첫 주간의 실습 근무 스케줄은 주간 근무(D.7am~3pm), 저녁 근무(E.3pm~11pm), 야간 근무(N.11pm~7am)로 잡혀있었다. 처음 실습에 임하는 학생들에겐 특별히 큰일은 주어지지 않았다. 활력징후(혈압, 맥박, 호흡, 체온)를 측정하고 선배 간호사가 하는 일을 옆에서 견학하는 정도였다. 설자가 밤 10시 야간근무 실습을 시작하는 인수인계 시간이었다. 책상에는 저녁 근무 간호사가 야간근무 간호사에게 환자 인수인계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 설자와 함께 또 한 명의 실습생이 앉아 있었다.
“302호 김수미는 혈압이 불안정하여 Norpine 수액 20mgtt 로 시작했고······.”
“303호 최옥자는 술 취한 아들이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기도 하고······.”
간호사들이 사용하는 의학용어는 반쯤 알아들었다. 아직도 인계인수는 15명 정도 더 남았다. 설자는 고개가 떨구어지고 눈이 감겼다. 야간근무의 경험이 없어 낮에 잠을 자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8시간 동안 선배 간호사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은 몹시 힘들었다. 야간근무가 끝나면 그다음 주간에는 낮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생활패턴이 반대로 바뀌었다. 근무시간이 3교대로 로테이션 되면서 생체리듬은 흐트러졌다. 야간근무에서 퇴근하고 낮잠을 자려고 노력해보았으나 잘되지 않았다. 어떨 때는 퇴근길에 죽은 듯이 버스에서 잠을 자다가 집 앞 정류소를 지나치기도 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면 잠은 멀리 달아나 버린다. 창문에 암막 커튼을 치고, 안대를 하고 자리에 누워 보아도 어젯밤 선배 간호사에게 혼나던 기억만 또렷했다.
설자는 수업 시간에 들었던 나이팅게일을 떠올리고 노트를 펼쳐보았다. 그녀는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영국 명문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든 자와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을 좋아하는 성품을 지녔다. 늘 삶의 의미를 생각하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긴 사명에 따라 살기를 원했다. 그녀는 당시 여러 가지로 열악한 사회 환경에서 간호에 헌신하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으로 여겼다.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으나 스물네 살 때 간호사역을 자신의 평생 사업으로 몸 바칠 준비단계에 들어갔다. 서른한 살이 되던 1851년에는 독일의 개신교 여 집사 간호단을 찾아가 훈련과 실습을 받았고, 1852년에는 아일랜드의 더블린 병원을 방문하여 당시 널리 알려진 유럽의 간호 훈련기관을 견학하며 실습 체험을 했다. 나이팅게일의 전반기 사역은 크림전쟁(1853~1856) 시기에 헌신적인 간호로 시작되었고, 이를 계기로 전 세계의 간호인으로 널리 알려진 세기의 어머니가 되었다. …… 나이팅게일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부상병들을 일일이 돌보고 위로하며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필하는 등 매일 20시간을 부지런히 일했다.
설자는 나이팅게일의 사역을 살펴보면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는 것에 마음이 끌렸다. 한때 할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던 형기가 고향교회에 몸 바쳐 헌신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가 서야 할 자리로 돌아가면 좋겠다 싶었다. 설자는 아직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아주는 간호사역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간호사의 길로 들어섰으면 밤낮이 바뀌는 어려움 정도는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모든 선배들이 걸어온 길이 아닌가? 나이팅게일은 간호를 사명으로 알고 어떤 타협이나 양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간호사역은 비종교적이지만 간호사는 신앙인이어야 진정한 간호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설자는 좋은 간호사가 되려면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설자는 3년의 학업을 마치고 간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자격증을 통해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큰 기쁨이며 보람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 피었다 지는 나팔꽃과 같았다. 설자가 지원한 곳은 내과 병동 신생아실이었다. 간호부에 모인 신규간호사들은 담당 부서의 수간호사가 와서 한 명씩 데리고 갔다. 마지막 설자는 혼자 남았다. 잠시 긴장이 되었다. 나를 데려갈 수간호사는 누구일까? 왜 안 오는 것일까? 맨 늦게 도착한 수간호사가 허겁지겁 부장에게 인사를 하고 설자를 데리고 갔다. 그곳은 응급실이었다. 설자가 실습하지 않은 곳은 응급실과 분만실 두 곳인데 응급실에 배치가 된 것이다.
설자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누가 보호자인지, 직원들인지 잘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응급실 중앙에는 의사 두 명과 간호사 몇 명이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옆으로 중환자 구역으로 보이는 곳에 약물중독 환자가 누워있다. 큼직한 인공호흡기에서 알람이 울렸다. 환자가 몸을 비틀었다. 양팔은 억제대로 묶여있었다. 간호사가 인공호흡기를 분리하고 기관삽관튜브로 가래를 뽑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인공호흡기를 연결하자 알람 소리가 그쳤다.
창문 쪽에서는 한 할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너는 주사기를 몇 번이나 찌르나? 이렇게 주사도 못 놓는 간호사가 우리 장손에게 주사를 놓으려는 거냐? 다른 사람 없어?! 수간호사 데리고 와!”
간호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혈관 찾기를 계속 시도하고 있었다. 5개월 된 어린아이는 주삿바늘이 어긋날 때마다 자지러지게 울었다.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 네 사람의 보호자가 주사하는 간호사만 쳐다보고 있다. 그 옆 침대에는 또 한 사람의 환자가 이마에 붕대를 감고 의식이 없이 누워있다. 보호자들은 옆에서 정신을 차리라고 환자의 귀에 대고 소리를 치고, 아내인 듯한 여인이 남편을 흔들며 의식을 불러내고 있다.
“수술해도 의식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담당 의사가 던진 말이다.
“살려달라고 안 할게요. 수술이라도 한번 받아봤으면 싶습니다.” 아내가 의사에게 간청하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아침에 출근한 남편이 아파트 공사장에서 작업을 하다 15미터 높이에서 추락했다는 것이었다. 응급실을 한 바퀴 돌아 나와 간호사 스테이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 들어온 신규간호사입니다. 앞으로 잘 도와주세요.”
수간호사가 선배 간호사들에게 설자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신설자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설자는 두 손을 모으고 머리 숙여 인사했다.
선배 간호사들은 시큰둥하다. 일에 너무 지쳤기 때문인지 설자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첫 출근에 대한 가슴 부푼 기대감은 맥없이 무너져버렸다. 응원과 격려를 보내줄 줄 알았으나 기대는 실망으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규들은 선배 간호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배워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선배가 “이게 무슨 약이야?”라고 물을 땐 가슴이 철렁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른 간호사가 유치도뇨관(소변줄)을 챙기고 있었다. 간호사가 챙겨야 할 준비물은 일일이 다 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독약도, 세트 안의 기구 수도, 준비물이 들어있는 장소도 수첩에 깨알같이 적어 넣었다. 직원들의 이름도, 가끔 오는 의사들의 이름까지, 외워야 할 것은 너무도 많았다.
간호사들이 교대로 점심을 먹는 시간에도 응급환자들은 계속 들어왔다. 선배 간호사가 얼마나 밥을 빨리 먹는지 설자도 삼키다시피 밥을 먹었다.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차 있는 용어나 약 이름은 내일까지는 다 외우라고 했다. 그리고 시험을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일을 마치자 몸은 물에 젖은 창호지처럼 축 늘어졌다. 퇴근해서는 따뜻한 물을 한 컵 마시고 숙소 침대에서 잠시 허리를 폈다. 캡을 벗어놓으니 머리는 한결 가볍고 시원하다.
‘아, 피곤해. 잠시 쉬었다가 세수해야지.’
‘첫날 너무 긴장했어! 내일부터는 좀 낫겠지······.’
눈을 뜨니 새벽 5시였다. 간호복도 벗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두 시간 후면 출근을 해야 한다. 얼굴화장은 멋대로 흐트러져있다. 누가 보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세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어제 퇴근 후부터 잠을 잤기 때문인지 몸은 개운했다. 설자의 간호사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