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월. **신문 인문학 칼럼)
「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하루’를 위하여
이민숙 (시인, 샘뿔인문학연구소장)
‘하루’는 그들에게,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이 소설은 많이 러시아적이다. 러시아 아니면 결코 기록할 수 없는 배경이기도 하고, 러시아 작가가 아니면 결코 체험하기 어려운 시베리아의 춥고 배고픈 수용소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솔제니친이 그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고, 그들은 하나같이 수용소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며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억압과 함께 사상과 몸을 감금당한 후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들의 수용소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혹한의 겨울, 영하 삼사십 도의 추위, 그것도 멀건 ‘양배추 죽’이 양반일 정도로, 건더기는 찾아볼 수 없는 후루룩 국물을 먹기 위해서 온갖 머리를 써야 하는, 지독한 강제노동으로 지친 시간들 속에서 허기조차 때울 수 없는 하루 30그램의 빵을 배급 받아 아끼고 아껴 먹느라 온갖 지혜를 동원해야 하는 그런 곳!
인생의 하루, 일장춘몽의 하루, 하루 같은 십 년, 먹을 것을 갈취당하지 않고 먹을 수 있고, 아니 죽 한 그릇을 속여서 두 그릇을 먹을 수 있었던, 장화를 수선해주고 돈을 벌 수 있는 작은 줄칼 하나를 숨기고 들어올 수 있었던, 실로 꿰매어놓은 빵이 도둑맞지 않아서 미소 지으며 먹을 수 있는 그런 하루, 수용소 내의 열흘이면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 처참한 영창에 들어가지 않은 하루.....그래서 거의 행복했다고 느끼는, 담배까지 사서 들키지 않게 피울 수 있었던 하루.....그러나! 십 년형을 언도받고 충실히 복역했지만 끝나면 또다시 십 년을 더 살아야 하는 죄수의 하루, 영원 같은 하루, 하루 같은 영원의 의미가 솔제니친의 하루가 아닐까.
지나온 세월, 십 년을 되돌아본다. 그래 좋았다! 적어도 하루 같은 십 년은 아니었다. 하루하루를 모두 떠올릴 수 없다 하더라도, 생생한 꽃빛의 하루들도 많았다. 그저 아름다운 삶을 추구했던 건 아니지만 저들의 수용소에 비하면 지독히 행복했던 하루들이 추억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 안에 시도 있다. 시를 쓰느라 고민했던, 책을 읽느라 밤을 새웠던, 많은 시간들이 나를 감싸고 있다. 감히 러시아적 삶 속에서 태어난 저 명작들을 넘볼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나대로 내 삶의 씨앗 속에서 발아시킨 문학적 열매를 낳을 수 있었던 시간들이다. 고통의 강도만큼 태어나는 세기의 작품들.....하루를 살아도 그렇게 살아 남겨놓은 작품들.....부러운가? 그러나......
요즘, 자꾸 ‘빵’이라는 말이 처절하게 들린다. ‘배고픔’속에서 살아왔던, 아니 그저 몸의 허기가 아니라, 존재적 허기랄까? 그런 세월들이 내게 주었던 경험들이 수용소 삶의 여러 날들을 더 온전히 공감하게 해 준다고나 할까. 어쩌면 그저 상상 속의 공감이라고 할 정도로 결코 일치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고는 해도 인간에게 억압과 배고픔과 추위는 참으로 이겨내기 어려운 그 어떤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할 정도의. 그래서 어제도 빵 몇 개를 샀다. 아픈 엄마께 갖다 드리고 식탁에 올려놓았다. 바라볼수록 수용소 안의 죄수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그 빵에서 풍기는 고요한 향기가 하루를 의미있게 살도록 도울 것 같아서 한 쪽 떼어 맛있게 먹는다. 고맙다 삶아!라고 속으로 웅얼거리면서......
몇 주 전에 문학기행차 갔던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과 윤동주 문학관, 그 즈음 보았던 ‘동주’라는 영화, 요즘 내게 찾아온 일련의 삶에 대한 주제들은 일관성 있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듯도 하다. 특별히 요즘인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삶의 본질들은 꼭 역사 속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고도 보편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다면성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도스토예프스키나 솔제니친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늘 그러한 부조리를 경험하고 있기도 하다. 그저 느끼지 못하고 느긋하게 살고 있을 뿐. 짐짓 모른 체하고 즐기고 있을 뿐. 그러나 어찌 그 즐거움이 잘못이라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저 수용소의 삶처럼 비참한 일상에 매몰되지 말라는 법도 없잖은가 말이다. 세상은 여러 모로 비참하고 참담할 일 투성이다. 돌아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모든 문명이 눈부신 시대 21세기! 이 시대의 주인공인 우리는 여전히 행복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지구인들은 행복한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면 안 된다는 듯이 소수만 즐기는 지구적 삶은 괜찮은 건가? 한국적 사회는 어떻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적 길들을 우리는 잘 걷고 있는 것일까?
강한 나라들은 강한 나라인 채로, 약소국은 또한 약한 나라인 채로, 그 안의 민중들은 주인의 삶을 살기 어렵다. ‘신자유주의’라는 몰상식한 체제는 자유라는 허명을 내세우며 줄기차게 타인의 삶을 억압한 대가로서의 행복을 쟁취하도록 부추긴다. 무한경쟁만이 대안일까? 소박한 행복을 가져와야 할, 철학도 인문학도 필요 없다는 게 신자유주의가 제시하는 결론이다. 학문의 틀은 우수한 인간이라는 목적론적 환상에 사로잡혀 보통의 사람들은 묻지도 생각하지도 말라고 정의하는 것만 같다. 능력이란 무엇인가? 너무도 수용소적이다. 권력적이다. 영웅적이다.
솔제니친은, 신을 향한 기도는 죄수들이 써내는 진정서와 같다고 생각한다. 말해봤자 꿩 구워먹은 소식, 거절당하기 십상인 말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유 아니면 아무 가치가 없는 수용소의 죄수들에게는......신도, 무능력한 한 존재일 뿐이라고 말한다. 한 번도, 그 누구도 자신의 뜻에 따라 자유로워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누릴 수 있을 때, 보통사람들이, 아니 죄없이 갇힌 죄수들이, 지금 삶의 죄라는 고삐를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는 권력자들의 힘 안에서 굶주리고 있는 민중들이, 세상의 하루를 행복하게 살았다고 할 때나 진정한 가치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는 모두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전복시키는 신자유주의적 발상들은 소수만을 위한 폭압일 뿐이다. ‘자유’라고 다 같은 ‘자유’는 아니다.
솔제니친,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의미는 비로소 그때 진정한 의미를 쓸 수 있고,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하루!’ 안을 들여다본다. 이 순간의 진정성이 그 하루가 아닐까? 카르페 디엠!
한 번도 그대는 내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결코 그대는 어제!라고 뒤돌아보지 않았다/한 줄기 새파란 천둥번개였다/ 거친 바위를 퉁탕거리는 계곡물이었다/ 지금도 온몸이 뜨거운 능소화로 피어나는 정오/ 물속에 한목숨 풀어헤쳐버리는 물푸레나무 / 난바다 펄떡거리는 상어 한 마리, / 수평선에 젖 물리는 돌고래 푸른 영혼이었다/
-졸시, <바람-카르페 디엠>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