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우린 유행가를 몰랐다. 아참, 요즈음은 유행가란 말도 쓰지 않더구먼. 대중가요도 낯설고. 라디오조차 귀한 시절에 유행가를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지. 지나고 보니 그게 우리에게는 좋았을른지도 몰라. 음악교과서에 나오는 동요라든가 외국 가곡, '스와니강'이라든가 '클레멘타인'하고 '아~ 목동아' 같은 명곡을 충분히 부를 수 있었으니까. 유행가를 나이에 맞게 늦게 접할 수록 교육에도 엄청 좋았을꺼야.
티브이에서 옛날을 추억하며 별이 빛나는 밤에, 하드만 난 별밤세대가 아니야. 당시엔 에프엠도 없었지. 아님 HLKA 중앙방송국밖에 나오지 않는 시골에서 별밤이거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 하는 에프엠 심야 음악 프로를 들을 수 있겠어? 하긴 그때에는 그런 프로가 나오기도 전인 아주 옛날이였는지도 몰라. 그저 죽으나 사나 에이치엘케이에이 대한민국 중앙방송밖에 모르는 우리가 무슨 음악의 신조류를 알았을까? 중학교 들어가고 난 다음 접한 유행가만 도통했지. 남인수와 고복수, 현인 같은 트로트의 1세대 카수들 노래를 죽자고 따라불렀으니.
동백아가씨, 코맹맹하면서도 어딘가 가슴 아린 곡조의 이미자의 목소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국보급이다. 이미자 선생님!-선생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이름만 부른다. 결례를 용서 바란다.- 이미자 노래 동백아가씨가 대중가요와의 첫 만남이 아니었을까? 아~ 한명숙이 노오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난 다음이구나. 노오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 레코드 5만 장 팔렸다고 떠들석했다. 그랬다. 황금심이 한물 가면서 동백 아가씨로 등장한 이미자는 대단했다. 지금은 데뷰 60년을 훌쩍 넘겼지 아마? 40주년 기념 공연 테입은 내가 가지고 있는데. 그땐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이미자가 돌아가신다면 그 성대를 따로이 국립박물관에 보관해얀다나. 이런 끔직한 소리라니. 정말 이미자 목소리는 흉내 낼 수 없는 게 아니던가? 요즈음 레전드, 흔한 소리지만 이미자하고 비교한다면 그건 언어도단이다. 불후의 명곡에 이미자가 나오긴 나온건가? 이미자를 빼고서 우리 대중가요를 이야기한다면 ....... 한평생을 울며 웃으며 부르게 될 유행가와의 만남은 길거리에 있던 소리사에서였다.
'소리사'가 뭐냐고? 대중가요는 라디오와 전축(오디오 시스템)에다 레코드(엘피, 에쓰피)를 팔던 종합 음악 전문점인 소리사의 번창과 맞물려 성장했다. 당시 거리를 걷노라면 온통 이미자 노래가 들려왔다. 이쪽 소리사에서 트는 동백아가씨와 저 길모퉁이에 자리한 소리사에 흘러나오는 황포돗대가 기싸움을 하듯 왕왕거렸거든. 소리사의 경쟁은 이랬다. 사과 궤짝 같이 생겨먹은 스피커를 가게 밖에 내놓고 노래로 승부를 했다. 뭐 어쩌랴 공짜로 노래를 듣는 게 유쾌했을테니. 요즈음 같으면 소음공해라고 신고할 테지만 그때는 고맙더라고. 다들 전축은 뭐 라디오조차 변변하게 갖추지 못한 살림살이에 소리사가 노래를 듣는 유일한 창구였거든.
당시 이미자를 빼놓고 대중가요를 이야기 할 순 없었어. 남일해와 문주란 같은 트로트 가수 전성기였지만 음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조류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지. 이를테면 미8군 출신 가수들, 최희준, 이금희, 한명숙, 현미, 위키리, 윤항기, 김홍탁 같은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 미국 팝송에서 유래한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가 막 나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참 미8군 출신하니 미군부대 근무한 카추샤로 아는데 미8군 무대에서 미군을 위해서 연주 했던 가수라 하면 이해가 될른가? 그러니 당연 팝쏭이 불려질 수 밖에. 학교에 가면 친구들끼리 정보 교환이 한창이었어. 뭐 서울대학교 아니 연세대 입시 정보를 가지고 그런게 아니라 유행가를 놓고서 그랬지뭐. 그럼, 그시대 우리 노트를 볼까. 저마다 온 정신을 기울여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랫말 따라 배껴도 중간 중간 가사를 빠뜨리곤 했어.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들과 노트 교환을 해야 온전하게 가사를 완성할 수 있었지. 그리고 '흑산도 아~가씨...' 하고는 노래가 꺽어지는 대목에 가서는 톱니처럼, 노래가 고음으로 올라갈 때면 위로 올라가는 화살표↗를 그렸지. 콩나물 대가리♬는 무슨. 우리 음악 실력이 그랬어. 그때 말이야, 공부하다가 막힌 대목을 가지고 서로 토의를 하곤 했음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단연 인기 짱이었다. 우리 집이 책방을 했으니까. 세광출판사 15집이라는 유행가책을 들고가면 내 앞에선 다들 꾸뻑 죽지 뭐. 아~ 그때 음악 관련 책은 세광출판사가 단연 최고였지. 유행가에서부터 체르니, 소나티네 하는 피아노 연습곡까지 나오는 출판사는 세광출판사 혼자가 아니었던가. 노트나부랭이나 베껴가며 노랠 배우던 친구들이 보기엔 서점집 아들이야 황제지뭐 황제. 유행가 몇 개라도 주고받지 못하면 친구들한테 따돌림을 당했어. 그때도 왕따라는 게 있었다면 난 절대 왕따 당하지 않았을거야. 싸움박질도 못 하는 내가 친구들한테 군림하고 있었으니 말야. 우리 아부지가 책방을 하신 게 얼마나 복된 일인지 이럴 때 알겠더라고. 여담이나 들어볼라요. 그때 팝쏭, 기억나는 거는 칸쏘네, 토니달라라의 라노비아가 샨 모레 음악제에서 대상을 차지했을 때였다. 가사를 영어, 아니 이태리었으니 알파벳으로 적어놓은 것이 아니라 한글로 "비앙 라노비아...." 화이트크리스마는 "아임 드리밍 오붜 화이트크리스마스.."로 적었더라고. 아마도 알파벳도 일반화가 안 되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이상한 일은 한반 친구 중에 남일해 노래를 빼어나게 잘 하는 친구가 있었거든. 쉬는 시간이면 으례 앞에 나가서 "또옥 또옥 구두소리 빠알간 구두 아~하가씨~" 해가며 굵은 저음으로 부르는데 기가 막혔어. 남일해와 천상 똑 같았다. 어느날, 음악 중간 고사는 음악책에 나오는 노래로 실기 시험을 본다고 했어. 드디어 그 친구 차례가 왔어. 우린 기대가 컸기에 쥐죽은 듯 조용했어. 맙소사, 음치였어. 멋진 바리톤으로 가곡을 불러재킬 줄 알았던 우린 실망이 컸지. 그 친구도 얼굴이 벌개가지고 우물쭈물하다가 내려왔지. 참 이상도하지. 그렇게 유행가는 멋지게 부르던 사람이 가곡은 왜 그리 형편없을까? 변성기 때 유행가를 너무 많이 부르는 게 좋지 않은가봐. 아무래도 유행가와 가곡은 무슨 넘지 못할 장벽이 있는가봐.
이미자 노래 이야기하다가 헛발질했네. 당시 우리들에게 이미자 노래 중에 '저강은 알고 있다' 가 단연 최고 애창곡이었어. 땅개 박노인이라고 우리 고장에 살던 노인 이야기를 영화로 찍었거든. 남자 주인공이 이예춘- 이덕화 아버지였지-이라고 성격파 배우였고 여자 주인공은 주증녀였던지 기억이 나질 않네만, 영활 좋아하는 친구한테 끌려서 싸인을 받으려고 여관에 갔어. 당시 무슨 호탤이 있었을까 여관에 묵고있는 배우들을 보려고 길거리는 인산인해였어. 시골에서 배우 보기가 어디 쉬웠겠어. 엄두가 나질 않는 나를 끌고 친구는 기어이 싸인을 받았어. 이예춘씨 싸인을. 그 친구, 끝내 영화로 나가더니 유현목 감독휘하에서 조감독으로 내공을 쌓더니만 감독이 되었어. 누구냐고? 무슨 영활 찍었는데. 애마부인 씨리즈를 두 편이나 했으니 예술 영화하곤 담을 쌓았지뭐. 여자 배우 얼굴이나 볼까, 혹시나 예쁜 배우지망생 하나 소개시켜 줄까 싶어 따라다녀봤는데 영~ . 그런데 이놈은 아직도 총각이야. 인물이 훤한데도 배우랑 스켄달이라도 날 줄 알았더니만. 언젠가 영화 찍으면, 취객 1은 날 시켜주기로 했는데, 아니 친구들이 줄을 서더구먼. 취객 10 번까지 정해놓고도 아직이야. 뻔하지뭐. 다들 술 먹고 질탕한 장면에 여자 배우랑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어서겠지. 그놈의 시나리오 언제 완성되는가 말이다.
그 영화가 '저 강은 알고 있다' 였는데 흥행은 실패했는가봐. 노래는 요즘도 나오는 이미자 애창곡에 빠지질 않았어. 인기 가요 1등을 몇 주간 했을거야. 우리 고장에서 찍은 영화 주제곡이니까 유달리 애착이 갔던거지.
이미자 노래 중엔 난 지금도 '아씨'란 노래가 제일 좋더구먼. 당시 티브이 연속극으로 장안의 화제가 된 아씨란 드라마 주제곡이었지. 하숙집에 티브이가 없어서 가끔 다방에 가서 본 기억이 나는데 아씨의 여주인공이었던 김희준을 생생하게 기억해. 말을 할 듯 말 듯 은은한 미소가 온갖 고초를 겪으며 시집살이하는 며느리깜으론 최고의 이상적인 스타일이더구먼. 일제 시대였을거야. 대학 공부하노라 서울인가 동경에 간 부자집 남자하고 학교 근처도 못 가본 시골 색시하고 집안에서 억지로 혼인을 시켜줬으니 결혼생활이 뻔 하잖던가. 바람 난 남편의 구박에도 참고 살아가던 아씨는 장안의 화제였고 김세윤이었을거야, 죽일 놈이라고 욕도 많이 들었어. 김희준은 이 한 편 드라마에 나오고 미국으로 이민갔다더군. 그래서 눈에 삼삼해. 1970 TBC 연속극주제가 `아씨`를 소개할까. " 예엣~날에 이~길~은 꽃가마~ 타~고 말탄 님 따라서 시집 가던길 여기던가 저기던가 복사꽃 곱~게 피어있던길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예엣~날에 이~길~은 새색시~적~에 서방님 따라서 나들이 가던길 어디선가 저만치서 뻐꾹새 구슬피 울어대던길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가사가 아직도 생생해서 담박에 옮길 수 있었다니까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겠지. 바람쟁이 남편이 아씨를 몇 번 나들이라도 시켜줬을까? 두어 번, 아니 단 한 번이라도 나들이 간 것을 평생 가슴에 담아두고 추억하는 아씨를 상상하면 콧날이 시큰해. 바보라고?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씨의 간절한 비원이 애리지 않은가? 나야 나가자 하면 '뭐 사 줄 건데' 하고 백화점이나 가자할테지. 복사꽃 곱게 핀 산에야 어림도 없는 내 옆구리가 그악스럽다. 세월이 흘러도 아씨가 그리운 건 왜일까? 남자라서? 일부종사한다는 옛날 여인네의 순종의 미덕을 그리워해서?
당시 인기가 있었던 유행가는 대게 영화 또는 연속극 주제곡이었거든. 하숙생, 남과 북, 창살 없는 감옥....그런데 요즈음은 OST가 대세인데 그게 뭔 말이여? 주제가라는 영어 말인감?
술집 이야기를 할까. 선술집, 대포집이 서민들이 애용했던 곳이라면 기생집, 요정은 술값이 비싸서 높은 양반이거나 돈 많은 한량들이 가는 곳일테지. 선술집은 대게 나무 탁자거나 드럼통을 잘라서 연탄을 사용하는 화덕을 중간에 놓고 노가리나 수루매(오징어), 호메이(양미리) 생선을 구어먹는 안주가. 아님 김치찌게가 주종을 이루었지. 물론 술은 탁배기 또는 막걸리라고 부르는 탁주였어. 그땐 삼겹살 같은 돼지고기 구어먹는 것은 구경하질 못했어. 요정은 떡 벌어지게 차린 술상에는 온갖 귀한 요리가 올라 오고 술도 맑은 술이라던데. 병풍을 둘러친 양반 자리 뭐 이랳어. 한복 입은 기생이 시중을 들었을 거고. 내가 그런 곳에 출입을 해보지 않아서 몰라. 그럼 넌 어디에서 마셨노? 음~ 룸 뭐시기라고.. 아이고 몰라. 왜 그리 꼬장꼬장 따지긴 왜 따져.
돈에 따라 출입하는 술집이 달라도 술자리 풍습은 매 한가지였어. 두어 잔 술이 들어가면 성질 급한 놈이 숟가락을 잡을 테지. 그리고는 노래를 부를거야. 우리나라 사람들 술자리에 노래가 없다는 건 상상도 못해. 그 다음은? 깝치지 말어. 요즈음처럼 밴드가 있거나 반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으례 젓가락을 들고서 술상에 대고 가락에 맞춰 두드리는 거야. 함께 자리한 기생들이 한손에 젓가락을 다른쪽은 손바닥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는데 신명이 절로 나거든. 예술의 경지야. 히야~ 난 흉내도 못내겠더만. 유행가하고 젓가락 장단은 기막힌 앙상블이야. 이것도 무형문화재로 등록하면 좋을 텐데.
요정도 장단이야 같겠지만 기생이 일단 한복을 입고서 멋들어지고 운치가 있게 박자를 맞추겠지. 하지만 선술집은 완존 난리부르스야. 상을 팰 것같이 무지막지하게 두드려. 그리고 알루미늄 주전자는 훌 쭈그러져 볼쌍 사납지. 일상에서 참았던 울분을 실어서 가락을 맞추며 술상을 두들겨 패는 화끈한 젓가락 장단을 어찌 잊을손가. 유감이지만 이제는 흘러가버린 추억이야. (히야~ 그립다, 그시절이)
소리사와 시작한 유행가는 젓가락 장단에 맞춰서 커왔다고 봐야해. 노래따라 한세월, 유행가와 젓가락 장단은 우리 민족의 피속에 녹아 흐르고 있을거야. 노래가 끝나면 얼릉 다음 노래가 이어지는 유행가 향연은 서민들의 심성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테고. 떠나가버린 옛사랑이, 그리운 부모님이, 뛰어 놀던 옛동산이, 돈이 없으면 빈대떡을 부쳐 먹으라 했고,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타령도, 추풍령 구비마다 한 많은 사연이 쌓였을테고, 영시에 떠나는 대전발 기차가, 섬마을에 오신 총각 선생님도....
최근 일찍이 우리 곁을 떠난 배호 특집이 있었다. 배호하면 추억이 새롭다. 키가 껑충한 배호는 퉁퉁 부은 얼굴로 마이크 앞에서 노랠 불렀지. 짙은 허스키와 무언가 가슴을 애달프게하는 애수가 독특한 음색으로 '안개~속으로~' 부를 때면 누구나 쌉싸레한 맥주의 호프 맛이, 색소폰의 호소력 있는 반주에 맞춰서 저 믿바닥에서 쥐어 짜올리는 목소리에 절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지. 이상도하지. 결국 신장 관련 병으로 가버렸지만. 배호가 가버린지 한 40년이 넘었지 아마. 아직 배호를 잊지 못하고 모창대회가 열리고 음반이 계속 나오는데 가짜가 많데요. 모창 가수가 부르는 배호판이 이리도 많은 줄이야. 시민회관에서 부르던 배호를 잊지 못할거야. 나도 배호가 쓰던 안경, 그걸 애용했지 마비스라고. 물론 색깔은 빼고서. 시청에 다니는 공무원 아제가 표를 주시길레 시민회관에서 배호 같은 당대의 대가수들의 쇼를 많이 봤어. 무대에 고정되어 있는 마이크 앞에서 그냥 노래를 부르는 게 당시의 공연 모습이었어. 기껏 손을 약간 흥겹게 흔들거나 간주 시간에 다이어먼드 스탭이라고 가벼운 스탭을 밟곤 했지. 얼만가 시간이 흐르고 외국 가스 공연 때 보니까 마이크를 꽂아 두는 스탠드를 옆으로 댕겼다가 돌리는 등 가지고 놀더구먼. 그때 '아주 지랄을 떨어요' 했는데 그게 대센가 봐. 이젠 삼각지 로타리도 허물어 버리고 장충단 고개에는 안개가 끼지 않은 날이 많더만 곁을 떠난 배호는 돌아오질 않아.
요즈음 티브이를 보면 알고 있는 노래가 없더구먼. 걸그룹이라고 떼거리로 나와서 현란한 율동을 뽐내며 춤을 추며 노랠하더만. 아예 보지 않고 체널을 돌려버리지. 기껏 월요일에 하는 가요무대거나 일욜 밤에 하는 7080정도가 들을만하대. 새 조류를 모르는 뒷방 늙은이라고? 천만에 소녀시대 멤버들 이름 다 안다고. 티파니도 태연이도 에프엑스도 알지야. 요즈음은 효린이가 잘하더군. 그래도 걸그룹 노랜 내 취미가 아냐. 음~ 우리 본당에서는 가을이면 구역 대항 합창 경연을 한다. 지정곡이야 성가일테고 자유곡을 가지고 내 주장을 펴봤는데 한 번도 채택 되질 않았어. 황성옛터라던가 목포의 눈물을 해보자고 했것만 아예 무시 당했어. 우리 가요를 합창으로 해보라고. 기가 막힐 걸! 우리 합창단이 군인 위문공연 갔을 때야. 준비한 고상한 노래가 숫제 먹히지 않더라고. 그래서 부랴부랴 황성옛터하고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불렀는데 아예 연병장이 따나가버릴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어.
내가 뭔 소릴 한대. 그렇게 군웅이 활거하던 트로트 시대가 끝나가면서 통기타 시대가 막을 올리게 되나. 통기타로 넘어가서는 다음에 올려볼까해. 기대하시고 고대하시라.
참 당시에는 군사정권이라 뻑하면 방송 금지곡이 많았어. 가사가 퇴폐적이라서, 자꾸만 왜 날 불러싸 온갖 구실을 붙여서 금지곡을 만들었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왜색적이라 금지됐을거야. 듣고싶어도 듣질 못했는데 무교동 코롱 빌딩 지하 무슨 술집엘 드나들던 친구가 있었어. 거기에서 동백아가씰 들을 수 있다는 거야. 쏜살같이 달려갔지. 윤시내하고 최창권 작곡가 알지? 살짜기 옵서예를 작곡한 분이지. 피아노 반주로 동백아가씨를 부르는데 소름이 끼치더군. 윤시내의 독특한 음색을 뭐라해얄까. 이미자완 전혀 다른 풍이지만 대단했어. 우린 기립 박수를 쳤다네. 야 죽이더군.
어~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시골에서 세례받으려고 예비자 교리반에 다닐 때야. 첫날 첫시간, 수녀님이 교실벽에 환등기인가, 영사기를 틀더라고. 갈대가 바람에 날리는 가운데 노래가 흘러나오는거야. 노랜 최희준의 하숙생이었어.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런 내용이었지. 유행가가 가톨릭 교리에 등장한 엄숙한 순간이었어. 하숙생만큼 인생의 허무함을 진솔하게 알려주는 게 어디 있을까?
아무튼 유행가만큼 우리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게 어디 있을까. 어쩜 우리 피속에 녹아 흐르고 있을거야 트로트의 음율이.
이글은 미스터 트롯트 방송이 나오기 십여 년 전에 쓴 것임을 밝혀두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