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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밖 강의실 2017년 강의
도덕경을 바로 읽어 면후심흑面厚心黑을 헤아리다
2017-02-17
“상처는 빛이 들어오는 공간이다.”
- 마울라나 잘랄렛딘 루미(13세기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
"나는 하나의 종착점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것은 무덤이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며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곳까지 가는 길에 있다.
물론 길은 한 가닥이 아니다.”
- 루쉰의 묘비문
―……이제 나는 세상의 똥으로 돌아갑니다.
더럽고 냄새 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버려지는 똥 말입니다.
저 다양하고 갖가지 표정을 짓고 있는 똥을 한번 들여다봅시다.
똥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자장면을 욱여넣고 산 검은 똥, 김밥을 먹고 눈 푸르딩딩한 똥, 땡감을 마구 먹고 싼 된똥, 비곗살을 먹고 나와 기름기가 둥둥 뜨는 똥, 매운 김칫국물에 말아먹고 싼 빨간 똥, 변비에 걸려 토끼처럼 동글동글하게 쏟아지는 구슬 똥, 단물을 하도 먹어서 단내가 물씬물씬 나는 물똥, 라면 먹고 심사가 뒤틀려 배배 꼬여서 나오는 똥, 껍질 벗긴 군고구마처럼 한 덩이로 쑤욱 크게 떨어지는 똥, 천둥 치는 소리만 요란한 방귀 똥, 폭탄주 마시고 술내가 풀풀 풍기는 까칠까칠한 똥, 돈만 보며 달리다 똥끝이 타서 새카맣게 그을려 나온 똥,
이게 바로 저입니다.
하지만 밑으로 빠지는 똥이 없이는 위로 들어가는 밥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죽음 앞에서 깨닫습니다.
인간의 구불구불한 창자를 통과해서 이런 똥이 되기 전에 나는 싱싱한 푸성귀였군요. 맑은 샘물이었군요. 토실토실한 살코기였군요. 넓고 푸른 바다의 깊은 곳을 마음껏 헤엄치던 지느러미를 단 생선이었군요. 투명한 공기이자 햇살이었군요. 저 온갖 욕망과 허영과 오기와 아둔함으로 가득 찬 나라는 껍데기 인간의 어둡고 탁한 터널을 통과하기 전에는 말입니다.
똥이 다시 부드러운 흙과 투명한 바람과 서로 몸을 섞고 맑은 공기를 따라 푸성귀도 되고 짐승의 살이 되듯 일평생 똥이 가득 머물다 간 집이었던 내 몸뚱어리는 스스로가 똥이 되려 합니다. 거름이 되려 합니다. 끝내 다시 태어나려는 기억도 잊으려 합니다……
- 김소진,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 수록된, 미완성 유고 「내 마음의 세렌게티」 중에 서, 367~368면.
도덕경을 바로 읽어야 면후심흑面厚心黑을 읽을 수 있다.
한비자의 제왕학에 이어 중국의 현대판 제왕학으로 추앙받고 있는 '후흑학'은 중국판 마키아벨리즘으로도 불린다. 권모술수를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바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후흑학'을 단순히 음흉, 뻔뻔함을 위주로 하는 처세술쯤으로 이해한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후흑의 궁극적인 목적은 뛰어난 후흑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후흑구국(厚黑救國)에 있었기 때문이다.
후흑학은 청 말에 태어나 중‧일전쟁 막바지에 사망한 학자 리쭝우(李宗吾, 1879~1944)가 창안한 것이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 낯가죽 속에 뻔뻔함을 감출 수 있게 해 주었다. 또 속마음에 음흉함을 감출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이처럼 귀한 보물을 몸에 지니고도 쓰지 않으니 천하에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만하다”(리쭝우, 「난세를 평정하는 중국 통치학」).
리쭝우는 "영웅호걸이란 한낱 뻔뻔하고 음흉한 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심흑'의 대가는 조조(曹操)다. "남에게 버림받느니 내가 먼저 남을 버리겠다"고 한 조조의 속내가 시커멓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 '면후'의 고수로는 유비(劉備)를 꼽았다. 남의 울타리 속에 얹혀 살면서 전혀 수치로 생각지 않았다. 울기도 잘 울어 동정심도 잘 구했다. '유비의 강산(江山)은 울음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노자 도덕경』2장, 美의 상대어는 醜(추)가 아닌 惡(오)
美‧醜, 善‧惡 등 이분법적 사고는 불평등의 시작
天下皆知 美之爲美 斯惡已요
皆知 善之爲善하나 斯不善已니라
故로 有無相生하고 難易相成하고
長短相較하고 高下相傾하고
音聲相和하고 前後相隨니라.
是以로 聖人은 處無爲之事하여
行不言之敎니라.
萬物作焉而不辭하고
生而不有하고
爲而不恃하고
功成而弗居하고
夫唯弗居니
是以로 不去니라.
羊 양 양: 美, 善, 犧, 祥, 羨 象形(상형문자). 뿔이 난 양의 생김새를 본뜸.※ 부수로서 머리에 쓰일 때는 𦍌. 1. 양. 가축의 하나. 성질이 순하며 털이 희고 부드러움. 착하고 아름다운 것 등에 비유함. 羔羊之皮 詩經 羊頭狗肉 2. 상서롭다.모든 서술은 사실(fact)과 의견(opinion)으로 나뉜다. 사실은 진실(truth)과 허위(false)로 갈린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실과 의견이 뒤섞인 경우가 허다하고, 그래서 사례를 수집하고 논거를 검토한다. 그러지 않으면 불명료한 개념이나 추상적이고 모호한 표현, 전후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서술 때문에 성급한 일반화, 과도한 비약, 논리적 오류에 빠지기 쉽다.
즉,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에 빠지게 된다.
天下皆知 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 미지위미 사오이
斯 이 사(다른 표현: 천할 시)
1. 이.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 2. 어조사. 1) 곧. 동의자 則 2) 이에. 3) 강조의 뜻. 3. 쪼개다. 가름. 4. 떠나다. 떨어짐. 5. 희다. 6. 천하다. 낮음. 7. 잠깐. 잠시. 8. 다하다. 모두.
已 그칠 이(다른 표현: 이미 이)
1. 한정·강조 1) […已] …뿐이다. 2) […已矣·而已·而已矣] …뿐이다. 2. 영탄(詠歎) 1) [已矣哉·已矣乎] 절망하는 말. 2) [已] 감탄하는 말. 3. 수단 […已] …써. …로써. 以와 쓰임이 같음.
사람들이 아름답다 하니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는 싫은 것이 있기 때문일 뿐이고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만들어진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고 있지만, 싫다는 分別心이 있을 뿐이다.)
眼‧耳‧鼻‧舌‧身‧意(눈‧귀‧코‧혀‧몸‧뜻)에 지배당하는 것이야말로 구속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등 외부 상황에만 끌려다니는 게 진짜 속박이다. 좋아했던 것만 애착하고 싫어했던 것을 혐오하기만 하는 것이 진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며 좋은 것에도 싫은 것에도 평등하고 자애롭게 대할 때가 감옥에서 나오는 때, 집착과 혐오에 사로잡힌 바깥세상에 갇히는 게 감옥.
皆知 善之爲善 斯不善已
개지 선지위선 사불선이
선하다고 하니 선한 줄 알지만 이는 선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굽은 나무는 길맛가지 된다.”(속담), 장자의 “無用之用”
* 길마(짐을 싣거나 달구지를 채울 수 있도록 말이나 소의 등에 얹는 운반구)의 몸을 이루는, 말굽 모양으로 구부러진 나뭇가지
故 有無相生
고 유무상생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를 말미암아 있고,
상대 비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 관계와 소통, 인연과 만남에 의해 生滅.
애덤 스미스의 저녁은 누가 차려줬을까?
경향신문 칼럼, [한기호의 다독다독], 2017-02-14, 29면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라는 문장은 240년 전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내린 경제학의 현대적인 정의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을 뜻하는 유명한 이 문장은 대학입시에서도 자주 출제되고 있지요.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보기’라는 부제가 붙은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카트리네 마르살, 부키)에서는 이 문장을 색다르게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애덤 스미스는 식탁에 앉았을 때 푸줏간 주인과 빵집 주인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교환을 통해 충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애덤 스미스의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른 것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스테이크를 실제로 구운 것은 누구였을까?”
저자가 제시하는 정답은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인 마거릿 더글러스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를 돌본 이는 28세에 홀로 됐지만 재혼하지 않고 오직 아들만을 따라다닌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전기를 쓴 존 레이는 “그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미스 삶의 중심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저자는 애덤 스미스가 그런 어머니를 망각하는 바람에 “그에게서 시작된 사상의 갈래가 근본적인 무언가를 생략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오늘날까지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칩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하루 약 2500원 이하로 먹고살”고 있고 “그중 대다수가 여성”입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국경을 넘어야 하는 세상일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전업주부로 아이들을 돌보는 여성들은 사회의 상류층과 하위 계층에 전적으로 몰려 있”는 현실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예상이 왜 나오는지 이해하려면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경제학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애덤 스미스의 저녁이 어떻게 식탁에 올라왔는지, 그것이 경제학적으로 왜 중요한지를 따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뒷 부분 생략)
難易相成
난이상성
어렵고 쉬운 것들은 서로를 이루며
과거 나치 같은, 다수 의견이 정의롭지 않은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몇 가지 방법이 ‘정의’, 저스티스(justice)인데 최근 40, 50년 동안 정치철학계에서 이 문제에 대해 주목받은 사람이 ‘정의론’을 말한 존 롤스다. 법 앞의 평등, 일한 만큼의 대가를 가져가는 것, 장애인이나 소수자 등 약자들에게 더 많은 분배를 줘야 한다든지 복지 혜택을 주다든지. 결과가 공정에서 벗어나면 보완해주는 것. 동양에서는 정의론은?
인의예지 합친 것을 덕이라 하고, 인의 핵심은 다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고 연민을 느끼는 것. 공자가 법으로만 다스리면 안 된다고 했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도 이것. ‘나는 법만 지키면 된다’는 한계다. ‘부끄러움’을 모른다. 부끄러움은 서양엔 없는 개념인데 이것이 동양에서는 사회적 정의의 바탕이 된다.
長短相較
장단상교
길고 짧은 것은 형태를 드러내어 서로 비교되기 때문이다.
“발전이 고개를 넘으면 퇴폐가 시작된다.” -루쉰
高下相傾
고하상경
높고 낮은 것은 서로 기울어진 다른 쪽이고,
불평등의 문제
낙수효과 (trickle down effect, 落水效果)와 분수효과(Fountain effect)
音聲相和
음성상화
음과 성(말하고 듣는 것)은 서로가 있어야 조화를 이루고,
언어의 社會性과 恣意性
성(聲)이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 예를 들면 문 두들기는 소리, 바람이 부는 소리, 이가는 소리 등 ※ 들리는 소리, 평판, 소문음(音)이란 이런 소리에 하나의 일정한 규칙을 만들어 주는 것을 음이라 한다.즉 noise를 포함한 모든 sound를 聲이라 하고, 여기에 rhythm과 melody를 더한 것이 音.
前後相隨
전후상수
앞과 뒤는 서로 맞물려 돌고 도는 것이다.
“실은 혁명이란 아무도 죽이지 않고 살리는 일이다.” -노신
是以 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 성인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그런 까닭에 성인은 사리사욕을 따지지 않고(일부러 꾸미지 않고) 일을 처리하며, 말없이 행함으로써 가르친다.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焉 어찌 언, 새이름 언, 어조사 이, 오랑캐 이
1. 의문·반어 (1) [焉…] 어찌. 어찌하여. 安과 쓰임이 같음. (2) [焉…] 어디. 어떻게. 어떤. 何와 쓰임이 같음. (3) [焉…] …인가. …는가. 乎와 쓰임이 같음.
2. 비교 […焉] …보다. 於와 쓰임이 같음.
3. 단정 […焉] …인 것이다. …임에 틀림없다. 矣와 쓰임이 같음.
4. 형용 […焉] 형용어의 접미사로 쓰임. 然과 쓰임이 같음.
만물을 짓고서도 말하지 아니하며, 만물을 낳고서도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의 「고향」중에서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위이부시 공성이불거
행하고도 기대하지 않고, 공을 이루고도 그것에 머물려 하지 않는다.
夫唯不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무릇 그것에 머물려 하지 않기에 그에게서 떠나지 않아도 된다.
‘포스트-진실’ 시대의 뉴스
경향신문 [정동칼럼] 2017-02-13 31면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미국 대선이 한창이던 작년 말, 정치인들의 발언과 약속을 검증하는 사이트인 ‘폴리티팩트’는 트럼프의 진술 중 70% 이상에 거짓이 묻어있으며 이는 클린턴의 3배에 해당한다고 밝힌 바 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인들 중 다수가 트럼프가 클린턴보다 정직하고 신뢰할 만한 후보라 믿는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사실을 경시하는 후보를 더 신뢰하는 역설적인 상황. 정작 트럼프는 미국의 전통적인 주류 언론들을 ‘가짜뉴스’라고 폄훼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한 보수 인사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세계 유수의 석학들이 한국의 탄핵 실패를 예견했다”면서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복귀할 것으로 판단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러나 그가 인용한 ‘기사’는 누군가가 장난삼아 써서 유통시킨 가짜였다. 비슷한 사례는 끝이 없다. 미 대선 중 교황이 트럼프를 지지한다거나 클린턴이 이슬람국가(IS)에 무기를 팔았다는 뉴스가 유포되었다. 백과사전을 표방하는 우리나라의 ‘위키’ 사이트들은 엉뚱한 ‘의견’을 ‘사실’로 만들곤 한다. ‘팩트’를 신성시한다는 사이트 이용자들은 감성적 주장이나 이죽거림을 ‘팩트폭력’이라며 칭송한다.
2016년을 보내면서, 옥스퍼드 사전은 ‘포스트-진실(post-truth)’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이나 개인적 신념이 여론 형성에 더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의미한다. 사실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수식 대상의 본질적 의미를 일부 계승하되 그 한계를 극복할 때 사용된다. 하지만 옥스퍼드 사전 대표 그래스월은 여기서의 ‘포스트’가 “무의미한”을 뜻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포스트-진실의 시대란 ‘탈(脫)진실’보다는 ‘비(非)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가짜뉴스가 난무하는 현상을 정치적 상황이나 소셜미디어의 확산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부족하다. 사진은 사실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증거로 작동했지만 언젠가부터 사진적 증거는 합성과 조작이라는 혐의를 먼저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한 사건을 본 두 기자의 기사도 소속 언론사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은 이상으로만 남은 시대가 된 것이다. 500여년 전 합리성이 신을 대체하기 시작했듯, 이제 감성이 합리성을 대체하는 모습을 목격 중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경합하는 진실들을 중재하는 기제이다. 그 첫 번째 요소는 책임감 있는 언론이다. 언론은 진실(truth)이 여러 개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사실(fact)을 분명하게 밝히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포스트-진실 시대 언론의 역할이다. 가짜뉴스는 언론이 기각된 세계에서 횡행한다. 독자들이 좋아하는 대로 적당히 부풀려 써갈긴 연예기사들이 쌓여 사건기사의 신뢰도를 갉아먹었다. 스폰서를 밀어주는 홍보성 산업기사들이 쌓여 공 들인 경제 분석기사의 가치를 훼손했다. 가짜뉴스의 확산에는 기존 언론의 책임이 막대하다.
기술적 개입도 중요한 요소이다. 페이스북은 독일에서 ‘코렉티브’로 명명된 가짜뉴스 판별 시스템을 도입했다.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는 온라인 허위 뉴스 근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특정 사이트에 대한 광고 판매를 차단함으로써 가짜뉴스 사이트의 수익구조를 와해시키는 대책도 강구하고 있다. 텍사스 주립대학은 기사의 문장구조나 단어들이 사실관계와 제대로 조응하는지 실시간으로 판별하는 ‘주장파괴자(ClaimBuster)’라는 이름의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하지만 포스트-진실 시대에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비판적 사고’다. 스노든은 “가짜뉴스의 문제는 영웅적 심판의 등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며, 시민들이 비판적이고 참여적 시각으로 정보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공영 라디오방송인 NPR도 정보의 사실 여부를 체크하는 방법들을 제안한 바 있는데, 그 대전제는 각자 ‘약간의 시간을 할애할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 의심하던 바를 해소해줘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뉴스가 있다면,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진짜?”라는 질문을 존중하고, 더 많은 관련 정보들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포스트-진실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만을 믿으려 한다.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도 ‘즉각적 반응과 즉각적 망각’으로 바뀌었다. 이 변화는 수백년에 걸친 문화적 변용이기도 하기 때문에 마냥 한탄하거나 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의 모호함을 사실의 왜곡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포스트-진실의 시대라 하더라도 혹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언론은 더 자기 역할을 해야 하고 시민들은 비판적이 되어야 한다. NPR의 제안처럼, 피를 끓게 만드는 뉴스는 오히려 가짜 정보일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이기 때문이다.
겁쟁이들은 생전에 여러 번 죽지만,
용감한 자들은 마지막 단 한 번을 제외하면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않지.
일찍이 내가 들었던 모든 의아한 점 가운데,
가장 기괴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사람들이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보면서,
올 때가 되어야 오는 것인.
-세익스피어,「Julius Caesar 줄리어스 시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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