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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수직성
라환희(시인)
신이 인간에게 사랑이란 카드로 어머니를 주셨다면, 시인에게는 상상을 증명하라는 과제를 냈다는 억측에 골몰하다 보면 힌트처럼 보이는 게 나무다. 나무는 하늘이라는 추상과 땅이라는 물질성을 아우르며 사유의 폭을 넓히는 존재다. 있음이 주는 구체성과 없음이 잉태한 상상의 세계가 나무의 진수다. 이런 이원적 대상인 나무가 시에서 자주 인용되는 것은 하늘과 땅을 잇는 수직성 때문일 것이다.
땅에서 발화한 나무의 개척은 뿌리에서부터 줄기, 가지, 잎이라는 현시성을 확보하며 쉼 없이 상승한다. 이같이 하늘을 향하는 나무의 본능은 인간의 그것과 닮아 수백 년 동안 허공을 잠식해 온 고목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경외심을 표하는지 모른다. 나무의 이 발돋움 본능에서 누군가는 시인의 모습을 보기도 할 것이다. 시인 역시 일상이라는 땅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사유의 가지는 늘 뿌리에서 멀어지기를 꿈꾸니 말이다.
자연물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그 시원을 알 수 없는 습속처럼 뿌리가 깊다. 이 사실은 마치 시인이 일상에서 만나는 대상의 실체를 통해 존재 이상을 보는 것처럼 연상의 폭을 넓힌다. 그 대표적인 예인 나무는 현실과 미로 그리고 미지를 통섭하는 존재로 정의되지 않은 시를 견지하는 생장점이 되어 왔다.
수천만 년 전의 규화목은 화석이 되어서도 미지의 생흔을 더듬게 하는가 하면, 민담 속 노거수는 모두 신령한 영이 깃들어 있다. 뿐인가 올리브잎은 파도에 떠돌던 방주의 닻을 내리게 했고 월계수 가지는 명예롭게도 고대 올림픽의 빛나는 관이 되었다. 이처럼 나무가 하늘과 땅을 잇는 우주의 축으로 거시적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멈추지 않는 생명심 때문이다. 가시可視 밖 광활한 세계를 타진하는 이 성장점은 시가 기호로 고사하지 않고 상상의 씨앗이 되게 하는 근원이다.
열외된 것들이 떠내려온다
바람과 장대비가 묶은 잡목들
산사태라지만 나무들의 항명사태였지
줄기와 가지
뿌리까지 뒤섞였다
출생은 다르나 출신이 같은 무리들
부르튼 입술 앙다물고 행진하던 것들이
교각에 이마를 찧고 배수진을 친다
낙뢰의 호각 신호에 맞춰
저들끼리 스크럼을 짠 무연고들이
물러날 곳 없는 연고를 형성한다
물살의 난타에도 어깨를 풀지 않는다
산으로 가는 길이 잠겼다
퉁퉁 불은 분노들이다
살과 뼈로 거래한 물의 대출이다
- 심강우, 「침수」 전문
일반적 정서는 패러다임의 중심에서 벗어나 변방이 되는 것을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자발적 거리 두기가 아닌 타의에 의한 상태라면 더욱더 불편할 터다. 외부의 힘에 의해 제외되고 휩쓸린 “열외된 것들이 떠내려온다”는 이 도입은 주도적 의지가 삭제된 적요다. 그러나 현상과 이면, 선후관계와 인과관계를 갈음하는 시적 정서는 도입의 고독을 “나무들의 항명사태”로 순식간에 사태 전환하며 소리를 덧입힌다.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거센 해조음이 오히려 무언의 항변에 제압당하는 분위기의 진행은 나무의 결연함에 초점을 맞춘다. 소리 없이 뻗는 실뿌리가 벽을 무너트리는 것처럼 광장에 모인 침묵이 아우성보다 더 큰 음을 내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봐 왔다. 희생당한 무기력한 객체에서 불가항력에 대항하는 의식적 주체가 된 무리는 “출생은 다르나 출신이 같은” 연대 의식으로 결속하며 시에 능동성을 생성한다.
시적 서정은 본디 오늘이라는 주무대에서 열외 되는 것들을 애정한다. 그것은 서정의 뿌리가 경험을 토대로 한 어제에 있기 때문이다. 물살에 휩쓸리기 전에는 서로 연고가 없던 것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바람과 장대비다. 이 태풍에 “물러날 곳 없는 연고를 형성”하게 된 나무의 자구책은 저희끼리 스크럼을 짜는 것이지만 “산으로 가는 길”은 잠겨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시에서 위로를 받는 것은 화자의 태도다. 그는 강퍅한 현실에 일상이 뽑히고 꺾여 거센 물살에 휩쓸린 약자의 묵음을 굉음보다 크게 듣는 귀를 가졌다.
좀처럼 꽃은 피지 않았다
까맣게 탄 날들이 쏟아진 달력에 어머니는
삭망월을 그려 넣고 일요일마다
붉은 하혈을 했다 그리곤 피의 색깔로
앞날을 점쳤다
내일을 믿는 그녀에게 운명은
사람 인人자의 정점에서 피운 꽃 한 송이,
함부로 바람은 어린 앵두나무를 범하고
반성도 없이 가지 끝엔 무채색의 해가 열렸다
표류하는 무역풍에서 며칠이 더 뿌려지고
마른 연못에 고이는 누런 구름,
구름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눈에서
벽안碧眼의 눈동자가 여물었다
다시 태양은 작열할 것인지
햇빛을 대지에 구겨 넣어 어느 때
황무지에 꽃 한 송이 피워낼 것인지
어머니의 세계는 여전히 달밤이었다
분노인 듯 오래된 앵두나무는
뒤틀린 달빛 가지를 벋고
꽃의 거대한 뿌리인 산은
우리 집 커다란 장독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 배홍배, 「봄날 일기 2」 전문
인간이 본능적으로 신뢰할 대상이 있다면 그건 아마 어머니라는 존재일 것이다. 280여 일 하나의 호흡을 나누고 감각을 나눈 그 숭고한 시간을 자각하는 것은 어렵지만, 시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대부분 시적 화자의 뿌리이고 줄기이고 가지임을 연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 내밀함은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가장 친숙한 환경이고 가장 완벽한 내적 존재이기 때문에 동백꽃에서 동백나무를 목련꽃에서 목련 나무를 연상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까맣게 탄 날들”에 부차적으로 온 일요일의 “붉은 하혈”은 절망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희망을 배태한다. 연계하여 “삭망월을 그려 넣”고도 어머니가 멈추지 않고 일요일마다 피의 색깔로 점치는 것은 “사람 인자의 정점”에서 맺은 꽃송이다. 뿌리에서 끌어 올린 물과 잎에서 생성된 양분의 절정인 꽃은 실체와 환상의 결합물이다.
상형문자까지 거슬러 오르지 않아도 일상어 중에 단 두 획으로 ‘人’만큼 협력적이고 상호 의존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글자가 또 있을까 싶다. 일 점 의혹도 없이 상대를 향해 기운 획과 획이 만들어낸 균형미는 인간의 나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표상하고 있다. 현실의 바람과 기원의 믿음이 서로를 지탱하게 하는 염원은 “무채색의 해가 열”린 앵두나무와 “벽안의 눈동자”인 물고기에도 여전히 “달밤”이다. 무의식적 염원은 하늘을 향해 무한 생식하는 속성을 지녔다. 이렇듯 나무의 성장점 같은 상상은 “뒤틀린 달빛 가지를” 뻗은 어머니처럼 우리 인식의 지경에서 웃자라 “거대한 뿌리”가 된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으니,
빛도 어둠도 하늘도 땅도 구분이 없던
그 먼 시절은 가고
고물가와 고금리, 고환율로 어지러운
혼돈의 한가운데서 계절이 왔다
나라 안팎으로 산 날보다 살 날이 많은
사람들 한숨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집짐승을 제물로 바치며 섬겨왔다는
전설 속 살아 있는 신을 찾아
담양 죽녹원에 들었을 때,
서원마을 굵은 대나무들 사이로
영락없는 전설 속 먹구렁이를 닮은 저것
천 년을 넘게 살면서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커져서는
신통력으로 마을에 비를 내리게 했을지도 모를
땅 기운을 쫓아 나온 크고 검은 죽순 머리 하나
혼돈의 한가운데서
천지를 다스리는 그 무엇이 태어난 거라고,
고물가와 고금리, 고환율로 숨쉬기조차 힘든
오를 것은 다 올라도 사람 목숨값만 오르지 않는
혼돈의 세월을 사는 누구라도
저 영한 머리 하나 부여잡고
계절 가기 전
우리 신화 한 대목쯤 낭창낭창 키워보고 싶은
- 김형미, 「담양 죽순 이야기」 전문
일설에 따르면 대나무는 싹이 튼 지 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무라 불렸다. 풀이었다가 나무였다가 대쪽이 되는 대나무는 하루에 1미터 가까이 자라는 종이 있을 만큼 성장 속도가 빠르다. 이 같은 폭풍 성장에도 꺾이거나 쓰러지지 않는 것은 마디의 힘이다. 마디는 나무가 거칠 것 없는 욕구를 멈추고 섭리를 생각한 자취이다. 아울러 자연계의 순환을 돌아보는 겸허가 생이란 역사를 만든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대나무를 올곧게 자라게 하는 것이 마디인 것처럼, 대상과의 교감에서 발원한 물아일체物我一體는 시인이 현실을 돌아보는 마디이다. 이 겸손은 “빛도 어둠도 하늘도 땅도” 구분 없는 순수의 상태를 꿈꾼다. 어떤 구별도 없어 평온했던 “먼 시절”을 향한 그리움은 인간의 귀소 본능과도 같아서 작품 속 화자가 찾아 나선 “전설 속 살아 있는 신”은 더욱더 현현하다.
“비를 내리게 했을지도 모를” 상상 속의 신과 화자를 조우하게 한 직시는 대나무와 결합하며 현물이 된다. 과정에서 이 시와 같이 모호와 명확 사이 완충재로 쓰인 나무는 기호를 넘어 의미망을 확장한다. “혼돈의 세월을 사는”, 또 살아내야 하는 시인은 하늘을 향해 자라는 나무의 특성에 기대어서라도 이 땅에 소망을 구현해야 한다. 그것이 “전설 속 먹구렁이”가 아니라 해도 무관하다. 상상이라는 “낭창낭창 키”운 한 대목의 신화에 기대 “고물가와 고금리, 고환율로 숨쉬기조차 힘든” 일상을 승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턱이 뾰족한 생각은 씨앗이 되었다
밤하늘과 접선한 별들이 비료를 뿌렸다
땅속엔 열쇠를 심었고
열쇠는
땅을 뚫고 솟아올라 떡잎이 되었다
여기는
북극성의 난민들이 모인 곳
수천 년 떠돌던 우리가 정착한 땅
경작의 날이 시작되었다
다른 별의 좀생이들이 오기 전
우리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회칙을 만들었다
회의는 맛이 없었고 열매도 수수께끼 같았지만
우리가 꿰어맞춘 이야기는 검푸른
문장 넝쿨이 되었다
농원의 땅강아지가 된 우리들은
리어카에 실린 갑골문자를 팔러 시타델로 나가곤 했다
이윤이 생기자
커뮤니티 센터를 짓기로 했다
누구는 중고 벽돌을 구입하자 했고
누구는 흙을 밟아 새 벽돌을 굽자 했다
우리 사이에 욕이 튀었고 등나무 같은
갈등이 생겼다
멱살과 소매가 찢기고 들풀이 말라갔다
춘분이 오나 싶더니 우박이
내렸다
상심한 연못은 늪이 되고, 장미는 등불을 껐다
눈을 뜨면 쌍꺼풀 같은 후회가 겹치고
우리는 골똘한 지푸라기가 되었다
모든 실패가 썩어 거름이 된 날
별똥별의 통로가 막히고
습자지 같은 눈이 내렸다
돌 위에 돌 하나 얹지 못했는데
우리는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서로의 얼굴을 만지면 재가 되었다
그 이후의 일은 당신이 짐작하는 바와 같다
- 황주은, 「베텔게우스 농원」 전문
인류의 문명이 원경園耕과 함께 발전했듯이 경작은 희망을 구체적으로 직조하는 행위이다. 시인은 시공을 개간하여 상상의 씨를 뿌리고 가꾸는 사람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지구인들이 수천 년 상상을 경작한 별이다. 하나의 씨앗이 자라 열매 맺기까지 기다리는 일은 시인이 시적 사유, 즉 “뾰족한 생각”을 공감각적 이미지로 치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경작은 “땅속엔 열쇠를 심”는 행위와 “열쇠”가 “땅을 뚫고 솟아올라 떡잎”이 되기까지의 믿음이 필요하다. 주관적 관념이 물질화됨으로써 객관적 호응을 얻기까지 시는 “수천 년 떠돌”며 형체 없는 씨앗을 뿌렸을 터다. 과정에서 상상은 현실과 충돌하며 “욕이 튀었”을 테고 칡과 등나무의 분쟁도 있었을 것이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첫 장이 빛나는 것은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면서 갈 수 있고 또 가야 할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란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는 문장이 시대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이 명문장은 지금도 형이상학적이고 윤리학적인가 하면 우주적 서정을 유발한다.
오래전부터 별은 닿을 수 없는 먼 거리와 해가 뜨면 사라지는 유한성으로 시인의 밤을 밝혔다. 별이 뜨고 지는 것처럼 다음날이면 전복될 말의 씨앗 하나를 가꾸는 수고를 감내하는 것이 시인이다. 그것이 상상의 힘이다. 이 무한의 힘은 새싹에서 성목을 보게 하고 실낱의 빛에도 경계를 넘게 한다. 하여 순간순간 허공을 향해 뻗어가는 나무의 상상은 생명심이 강하다. 가끔은 “상심한 연못은 늪이 되고, 장미는 등불을” 꺼도 발육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실패는 거름이 된다. “서로의 얼굴을 만지면 재가” 되는 순간들까지도.
테이블 위엔 처음 보는 재료들. 우리는 기다리는 중이다. 무화과 없이 무화과잼을 만드는 일. 설탕은 아무리 조심해도 빗나가죠. 문장은 발명에 가까워서 공중에 호수에 씨앗에 녹아 있고. 종이 속의 시간은 착각착각 흘러간다. 무화과는 다소 흐려짐. 땀방울을 쥐고서 심혈을 기울임. 좀 마셔둬요. 누군가 우리에게 짓무른 제목을 내민다. 메아리를 조금씩 쏟으며. 서서히 전이되는 무화과. 무화과의 밤과 융합하는 기표들. 언제쯤이면 다 걷힐 수 있을까. 무화과… 무화과… 무한대로 퍼져가는 무화과…. 완성을 기다릴수록 무화과 타는 냄새가 났다
- 지관순, 「무화과」 전문
낙원의 무화과는 아담과 이브에게 분별이라는 없던 기능을 새로 준 것인지, 본래 잠재한 기능을 일깨워 준 것인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무화과 없이 무화과잼을 만드는 일”처럼 시가 추구하는 면면은 상식 밖의 세계일 때가 많다. 때때로 비상식은 오히려 가려진 이면을 통해 반어적 일상을 마주하게 한다. 무화과는 꽃이 없다는 이름에서부터 꽃에 집중하게 한다. 그리고 역습처럼 열매껍질이 꽃받침이고 과육처럼 보이는 붉은 속이 꽃이라는 사실과 꽃이 없는 과일이라는 이름이 충돌하며 시심의 생장점을 간지럽힌다. 한 대상의 종합적 정보를 나타내는 고유명사의 배신과 시인이 배신해야 하는 상식들에 대해 “땀방울을 쥐고서 심혈”을 기우려 녹이는 일이 또 다른 고유명사를 생산하는 일이라 해도 시인은 공상을 멈추지 않는다.
신화란 신이 등장하는 서사가 아니라 수용자들에 의해 신성시되는 이야기를 뜻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상상의 힘은 그것을 믿는 자들에 의해 발휘된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관념이 몸을 얻기까지 “문장은 발명에 가까워서” 무른 일상을 냄비에 넣고 달콤한 희망과 꽃이 없다는 속임수를 마법의 가루로 넣어 잼을 만드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인식의 경계 안에서 언어로 정의되지 않은 맛은 말벌을 녹이는 무화과가 동물성인지 식물성인지처럼 묘연하여 시는 매일 다시 태어나는지 모른다. 때로는 헛가지를 뻗을 때도 있지만, 空의 세계를 지향하는 시심은 실상의 정점인 나무 꼭대기에서 멈추지 않고 무형의 세계인 상상계로 “서서히 전이”되며 교접한다. 그렇게 현실적 대상에서 발화한 상상은 “무한대로 퍼져가는 무화과”처럼 몸을 바꾸고 맛을 바꾸고 향을 바꾸며 내일은 또 다른 시의 우듬지에 올라 초성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