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 책을 읽으면서 필자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살아가면서 알게 된 점이 있다. 뭔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거기에 몰입한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는 몰입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슈타이너 책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것이 무의식에 남는 듯 어느 순간 그 의문에 대한 답이 불현듯 머리를 쳤다. 순간 의문이 풀렸고, 다시 또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의문이 생기는 상황이 계속 되는 것이다. 일상 삶에서 생긴 의문도 마찬가지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가 질문이다.
바로 말하면 필자의 상속에 들지 않은 자아, 본래 자아에게 직접 질문했기 떄문에 답을 들은 것이다. 즉 직접이 몰입 행위이고, 질문이 본래 자아를 만나는 일이다. 예를 들면 기도란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간절히 비는 행위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첫째, 인간의 본래 자아가 우주 진리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본래 자아는 우주 진리, 즉 신적 존재이다. 따라서 기도란 내가 나의 본래 자아에게 비는 행위이다. 즉 기도를 통해서 본래 자아를 만나게 된다. 둘째, 그렇지만 현실에서 나의 본래 자아는 상속에 들어있기 떄문에 우주 진리는 아니다. 기도함으로써 상속의 자아가 우주 진리에 연결되는 것이다. 요컨대 기도 행위로 해서 상속의 자아가 우주 진리에 연결되고, 이는 또한 나의 본래 자아를 만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우리가 하는 기도 행위는 뭘까? 우리가 간절하게 원하는 질문이다. '이렇게 되고 싶어요'라고 간절하게 비는 것이나, '무엇일까'라고 간절하게 갖는 의문은 그 본질이 같은, 나의 본래 자아에게 연결되는 일인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이 간절해야 한다는것, 다르게 표현하면, 온 마음이 그 질문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본래 자아를 우리는 내가 그 일(질문)과 하나가 되었을 때 만난다. 이런 질문을 해결해 주는데, 슈타이너 책은 어느 책보다도 훌륭하다.
슈타이너 책은 보이지 않는 정신이야기로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당연히 몇 번 읽어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책 내용을 간절하게 질문하면, 어느 순간 그 답이 이해된다. 이는 필자가 그 수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참 신기한 것이 정신은 이해하면 그 수준이 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 수준이 안되면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고도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정신을 이해할 수있는 가장 좋은 점이지만, 배척받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결론은 필자의 모르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하는 성향이 정신을 파악하는데 좋은 성향이라는 것이다. 슈타이너의 책을 읽으면 필자의 수준에 맞는 질문이 생기고, 또 그 수준을 넘어서면 그 수준에 맞는 질문이 생겨서 어느 순간 정신의 수준이 깊어지는 것이다.
다음은 여담으로 슈타이너의 책을 읽으면서 의문이 풀린 경우이다. 물론 필자의 생각이므로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은 이렇게 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질문은 '법륜스님은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창조를 할 수 있을까'이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듣다보면 머리를 탁하고 치는 부분이 항상 있다. 필자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법륜스님은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란 의문이 강하게 든다. 아마도 이런 질문이 필자의 잠재의식 속에 항상 있었기 떄문에 슈타이너의 책에서 답을 찾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자기 의식적인 대상 의식이 육성되면 사람은 다른 세계들의 창조력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존재들을 지각하고 그 존재들에 영향을 미칠뿐 아니라, 몸소 창조에 나설 것이다. (인간과 지구의 발달, 2021, 168)." 먼저 자기 의식이 대상 의식으로 육성되어야 한다. 통상은 자기 의식이 자기 의식에 갖혀있다. 하지만 자기 의식에서 벗어나 대상의 의식이 되어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그렇게 되면 주변의 다른 세계(정신세계)들을 만난다. 꼭 인간의 정신세계뿐만이 아니라 다른 주변의 모든 정신세계 존재들의 창조력도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만나면 정신세계의 속성은 모두 같으므로 그 정신세계의 창조력을 이해를 할 수가 있다. 이해를 하면 그렇게 창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배이다. 이것이 사람이 그 존재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그 존재들의 창조도 인간이 할 수가 있는 것이다.요컨대 인간이 정신세계에서 다른 존재들을 만나면, 그 정신세계 존재들의 창조를 이해하게 되고 이어서 그런 창조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이 법륜스님 단계라고 한 것은 법륜스님의 창조력이 다른 세계들의 창조력, 다른 세계들의 존재를 통해서, 또는 같이 하면서 얻는 창조력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경우, 통상은 정신세계에 들어가는 수준, 나아가 정신세계에서 자신을 파악하고 그 존재들과 함께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아가 그 존재들의 창조력을 파악하고 그 창조력을 얻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그 존재들의 창조력이란 내가 그 존재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주를 창조하는 수준이다. 정신의 속성으로 정신은 삼라만상의 생명을 영위하는 힘이고, 또한 삼라만상이 움직여지는 원리이다. 이런 원리에 의해서 삼라만상이 창조되었고, 하나로 꿰뚫어진다. 정신의 근본 원리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원리를 파악했을 때만이, 이런 창조를 내가 창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정신의 속성으로 이런 원리를 알았다고 해도 그것이 지속되지 않는다. 내가 그 상황을 계속 유지했을 때만이 지속이 된다. 이것이 더 큰 어려움일 수가 있다. 하지만 법륜스님은 한날 한시같이 유지를 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일단 깨달음을 얻는 것도 어려운데, 이와 같은 수준에 이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법륜스님이 중학교 시절, 절에 놀러 갔는데 지금의 스승(불심 도문스님)께 어떤 큰 스님이 통상 100년도 내다보기 어려운데, 저 학생은 1000년을 내다보니 반드시 제자로 삼으라고 조언을 했다고 한다.
문제는 누구도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자신이 안할 뿐이다. 첫째, 마음도 먹지 않고, 둘째, 의지를 내어서 하지도 않는다. 불가에서 하는 3000배도 어려운데, 백일출가를 하는 사람은 10000배를 사흘 안에 하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기도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정신은 먼저 마음을 먹어야 정신세계에 들어간다. 마음을 먹으면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정신세계에 가 있을 수가 있다. 왜냐하면 정신세계는 현재 우리가 거주하는 시공간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같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이해했다면 필자도 이 수준에 이를 수가 있을까. 먼저 간절히 원해야 하고 정신세계의 속성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큰 이상을 가져야하고, 이상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이를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오늘날의 지구발달기에는 '아스트랄체의 변화가 한창 진행 중'이라고 한다. "현재 에테르체와 물질체의 의식적인 변화는 다음 시대에 일어날 일로서 현재 에테르체와 물질체의 의식적인 변화는 오직 신비의 전수자들, 곧 신비학자들과 그 제자들한테서만 시작된 상태이다(위책, 227)." 이런 변화는 몇 천년을 두고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 몇 천년동안 자신의 아스트랄체를 진화켜야 하는 것이다(슈타이너의 관점).
조용히 둘레길을 걷다보면 옆 사람들의 대화가 들려오는 경우가 가끔 있다. 대화의 내용은 듣지 않지만 그 파장, 진동은 그대로 전달된다. 상속의 자아가 대화를 할 때와 상을 벗은 본래 자아가 대화를 할때는 분명 서로 다르다. 물론 필자도 그랬겠지만, 상 속의 자아로 대화를 하는 경우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그림자 키재기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상속에서 아무리 말하고 대화한들 그것은 꿈이고 그림자일뿐이기 떄문이다.
삼라만상을 움직이는 생명의 힘은 에테르체이다. 이런 우주 에테르에는 그만의 진동이 있다. 식물이 자라는 생명의 힘도 같은 진동을 한다. 가만히 강물이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보아도 같은 진동을 한다. 즉 삼라만상이 같은 진동을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진동을 내가 파악한다면, 나는 우주 에테르와 같이 진동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진동을 통하여 나의 내부에 연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의 내부에 연결한다는 것은 내부 기관의 힘을 사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이 진동이 열쇠이다. 요컨대 우주 에테르에는 일정한 진동이 있고, 이 진동이 삼라만상을 움직이는 생명의 힘이다. 나는 이 진동으로 나의 내부기관의 힘을 사용할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