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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동굴에서 조정래가 만난 건(조현)
8년 뒤 인생 마지막 작품 ‘영혼과 내세’ 찾아 글 고행
<조정래 작가 북인도 3200㎞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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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 ‘승려 조종현’도 아른아른
조정래(75) 작가가 인도로 떠났다. 구랍 21~31일 북인도 3200킬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8년 후 인생 마지막 작품으로 구상 중인 ‘영혼과 내세’에 대한 소설 취재를 겸한 순례였다. 그는 “더 나이가 들면 장거리 여행이 어려워질 수 있어 미리 왔다”고 했다. <한겨레> 휴심여행’에 참여한 40여명과 함께였다. 여행다운 여행의 마침표가 될지도 모를 조작가의 여정엔 조작가의 장편소설들을 탐독한 골수펜들이 빠지지않았다. 한 40대 여성은 해외 여행을 거의 해본적이 없지만, 조작가와 여행할 수 있는 기회여서 무조건 신청했다고 말했다. 조작가로부터 가보로 남길만한 글귀를 받고 싶어서 신청 마감을 넘겨 사정사정해 온 참가자도 있었다. 애장서인 조작가의 책에 사인을 청하는 것은 기본이고, 조작가의 부인 김초혜 시인과 손자가 주고받은 글을 담은 최근작 <행복편지>를 가져와 사인을 요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첫 방문지는 가장 인도다운 고도 바라나시였다. 짐을 풀고 마자 릭샤는 전장 같은 매케한 매연을 뚫고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빼빼 마른 인력거꾼은 두사람의 무게가 실린 페달을 힘겹게 밟으면서도 인파와 소와 개들의 난장판을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 나룻배를 타고 강으로 나아가자 화장터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강가 화장터에서는 대여섯 곳에서 동시에 주검을 태우고 있었다. 어느 곳은 불이 거세고, 어느 곳의 불길은 초라했다. 주검을 태울 장작 살 돈마저 부족한 빈자와 장작값 정도는 개의치않는 부자는 불길마저 확연히 달랐다. 그 건너편으로 영혼을 정화한다는 힌두교 의식이 펼쳐지고 있었다. ‘불가촉천민’(접촉해서도 안된다는 최하위 계층)일듯한 빈자들마저 최상위 카스트(계급)인 브라만 사제의 근엄한 몸짓에 눈을 고정한 채 구원을 갈구했다. 여전히 관습상 카스트 계급이 사라지지않고, 이를 종교 진리의 이름으로 수호하는 갠지스강은 온갖 혼돈을 삼키며 유유히 흘렀다.
고타마 싯타르타는 영롱한 설산 옆 고향을 떠나 왜 이 아수라장으로 나왔을까. 조작가는 안개속 어둠을 응시했다. 길 없는 길에서 길을 찾으려는 순례자의 눈빛이었다.
자욱한 강 너머엔 그가 토해낸 현대사의 피울음이 아스라하게 물안개로 피어올랐다. 만해 한용운이 만든 항일독립운동지원단체 만당의 자금책으로 활동하다 해방 후 서북청년단에게 맞아 엉덩이에서 구더기가 슬던 그의 아버지 ‘승려 조종현’을 그린 <태백산맥>의 ‘법일’이 거기 있었다. 분단된 땅에서 불가촉천민이나 개·돼지처럼 취급됐던 빨치산과 좌익들의 한도 서리처럼 어려 있었었다.
중생의 병은 무지에서 오고, 보살의 병은 대비심에서 온다고 했던가. 중생이 아프니 그도 아프지않을 수 없었다. 조 작가는 1983년 인도 초행길에 문학인들과 갠지스강에 왔을 때를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당시 문학인들이 ‘저게 사는건가’라며 인도인들을 짐승처럼 경멸하자 가슴에 비수가 꼿히는 아픔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고 했다.
‘혁명가 붓다’의 삶과 길 따라
다음날 일행은 애초 예정에도 없던 둥게스와리행을 감행했다. ‘둥게스와리’는 ‘버려진 땅’ 이란 의미다. 싯다르타는 ‘주검을 버리던 땅’으로 찾아들어 6년간 고행했다. 조작가는 무리한 일정으로 초반에 감기에 걸렸음에도 흔쾌히 산중턱에 올랐다. 왕위 계승자로서의 신분을 버리고 고행승이 된 싯다르타가 주검을 싸맨 옷을 주워 맨몸을 가리고 오르던 그 길이었다. 산길엔 여전히 버려진 사람들이 구걸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동굴의 출입구는 몸을 낮추게 했다. 허리를 깊숙히 숙이고 들어서자 어둠 속 대여섯평쯤의 동굴이 드러나고, 정면에 고행상이 있었다. ‘구원의 손길을 청할 데라곤 없는 이 버려진 산의 동굴에서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도록 고행한 그 싯다르타였다. 원불교 서울교구장과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낸 원로인 이선종(74) 교무는 “사람들은 보통 깨달은 뒤 석가모니의 광명만을 기억하지만, 그 빛을 낳기 전 처절한 고행이 있었다”고 말했다.
싯다르타가 스스로를 가둔 동굴은 조 작가에겐 아버지처럼 가난하게 살고싶으냐며 경영학과를 가 편히 살기를 바라던 어머니의 청을 물리치고 ‘굶는과’로 불린 국문과를 택한 결단이었고, 20여년간 하루 16시간씩 자신을 가둔 글감옥이었다. 또 빨치산들을 다룬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빨갱이 아니냐’며 11년간 조사를 받아야했던 굴욕이었다.
그 어둠의 동굴에서 조 작가는 2600년의 시간을 넘어 고행승 싯다르타 앞에 섰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계급 차별이 가장 심한 이곳에서 왜 당신은 ‘모든 사람이 다 부처’라고 했나요. 귀족이 노예쯤은 때려죽여도 별 죄가 안되는 그 시절에 왜 어떤 생명이든 해쳐서는 안된다고 했나요. 왜 신으로 숭배 받을 수 있었는데도 자신을 숭배하지말고 진리를 깨달아 스스로 그 길을 가라고 했나요. 그 오랜 화두를 묻듯이 싯다르타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 동굴을 나섰을 때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 깊고 빛났다. 조 작가는 그 산을 내려와 “동굴 속에서 느낀 영적 체험을 소설 속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순례는 ‘사람이 곧 부처’라는 <법화경>을 설한 영축산과 <금강경>을 설한 기원정사, 길에서 죽는 순간에도 마지막 한사람까지 구제하려 최선을 다했던 ‘열반의 땅’ 쿠시나가르,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로 이어졌다. 그 모든 여정엔 버러지 취급을 받는 당신도 바로 부처라는 ‘혁명가 붓다’의 삶이 있었다.
“아내는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
참가자들은 고단한 순례중 ‘인간 조정래’에 대한 탐구도 놓치지않았다. 단연 인기를 끈 화제는 조작가와 부인 김초혜 시인과의 러브스토리였다. 대학 2학년 때 이미 시인으로 등단한 ‘잘 나가던 김초혜’와 일등병으로 결혼을 감행한 조 작가는 신혼초부터 자신이 연탄을 다 갈고 연탄재를 버리고, 김치독을 묻고 설거지를 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도 부인에게 커피 타 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않은 채 김 시인이 섬섬옥수와 감수성을 유지케 돕고있다고 한다. 조 작가는 부인에 대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라며 닭살 돋는 자랑을 태연자약하게 했다. 여성참가자들은 “붓다만 혁명가인줄 알았는데, 벌써 50년 전부터 조작가도 남성우월주의를 벗은 혁명가였다”고 호응했다. 특히 외아들에게 자기 욕심을 투사해 삶의 결정권을 침해하지않고, 그 아들 결혼식을 일체 외부에 알리지않고 양가에서 50명씩 딱 100명의 가족들만 불러 치른 철저함엔 ‘또다른 수도승 아니냐’며 놀라워했다.
노성자 교무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누구나 홀로 선 나무/서로 가지를 뻗어/어깨동무를 하여 숲을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조 작가의 시를 읊조리며 삶을 평했다.고행승 싯다르타가 45년간 길에서 고통 중생들과 고락을 함께 했듯이, 조작가가 글감옥에 있으면서도 가족 및 현대사의 상흔을 지닌 이들과 어깨동무하여 아픔을 나누며 숲을 이루어가도록 추동해왔다는 것이다.
송태호씨(63)
이번 인도 여행은 그동안 해외여행에서 느낄 수 없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충격과 슬픔과 괴로움, 즐거움과 유익함이 혼재된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인도라는 나라는 서로 다른 다양한 사상, 종교, 계층, 인종, 문화가 서로 뒤엉켜 있으면서도 심각하게 충돌하지 않고 서로를 포용하면서 다름을 녹여내어 현재의 인도라는 주형물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껴서 ‘혼돈의 용광로’라는 표현을 해 보았습니다.
길가에서 본 최하층민들의 모습에서는 ‘불결하다’는 단어를 모르고 사는 것 같은 충격과 그런 최악의 환경에서도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에 경외감마저 느꼈습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들을 볼 때마다 같은 인간으로서 왜 저들은 저렇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세상에 대한 깊은 회의감과 함께 슬픔과 괴로움이 교차하면서 여정 내내 제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이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 준 것은 여행을 함께한 주변 분들의 따스한 마음과 살갑게 대해 주는 친밀함이었습니다.
특히나 조 작가님의 특강에서 말씀하신 투철한 작가의식과 올바른 역사의식. 나아가 한 여성만을 지고지순하게 평생 동안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 이 말씀은 저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하시는 사자후로 들렸습니다. 앞으로 제 삶의 지향점에 이정표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인도와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책 내용만 전달하지 않고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전달해 주셔서 더욱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조 기자님의 그간의 지난한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칠순이 넘으신 연배에도 활기차게 제반 사회운동을 하시고 계시면서 느끼신 생각을 실감나고 유머스럽게 토로하신 이선종 교무님을 통해서는 앞으로 나이든 분들이 본 받을 롤 모델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이라는 말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행적을 볼 때마다 초라하고 못난 저로서는 그저 감동과 반성만을 되풀이 했을 뿐이었습니다. 책을 보는 것과 현장에서의 느낌은 비교할 수 없는 차이라는 것도 절감했습니다. 이제 저는 종종다리 까치걸음으로 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열흘 동안 제가 보고 느낀 소중한 추억들을 제가 괴롭고 흔들릴 때마다 호미로 캐면서 위안 삼으면서 살아가렵니다. 이번 한겨레 인도 여행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서 부처님의 위대하고 숭고하신 깨우침을 화두 삼아 각성하시면서 살아간다면 보다 의미 있고, 보람 있고 향기 나는 삶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김옥자씨(66)
서둘러 나선 여행길에서 문득 떠오른 단어가 ‘빛’이었다. 볼 수있는 유일한 것-빛! 빛이란? 솔직히 빛 너머의 것을 느껴보고 싶었다. 결과는 대성공! 인도의 빛깔(빛의 겉모습. 색?)은 다양했다. 색 밀도 세계 제일일듯. 가이드의 설명도 5km 밖은 다른 모습이라 하였다. 내 눈엔 1m 밖이 다 다른 색이었다. 찍은 동영상을 소리없이 틀어 보아도 지루하지 않다. 너저분하고 위험해 보이고 뭔가를 깨달아야하는데 어렵기만한 3D의 나라가 시간이 지날수록 역동적이고 다양하고 명확한 답을 주는 나만의 3D로 다가왔다.
이제 그 너머로 가고 싶었다. 몸? 마음? 영혼? 하드웨어, 전기에너지, 소프트웨어? 재미없다 싶어 내 주의를 이리 저리 마구 옮겨보았다. 재밓었다. 400nm에서 800nm까지의 세계를, 빛의 세계를 벗어나는 재미를 맛보았다. 짧은 시간에 이런 찐한 느낌을 얻을 수 있었는 것은 무엇보다 조현기자님의 말씀 덕분이었다.
태초에 빛이 있어라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사랑)이 있어 빛이있었다는 성경말씀(펙트첵크 안됨)처럼 빛은 소리에너지의 전환인지 조현 기자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빛 넘어의 세계를 넘보게 해주었다. 더불어 함께한 여러분들의 한결같이 잔잔한 파동이 거슬림없이 공진되어 요동치는 강력한 에너지 장이되어 여행의 피로감을 완전 녹여버렸다. 나는 그 넘실되는 파동에 몸만 실으면 되었다. 정말 여행의 피로감이 이리도 없음에 놀랍다. 아니 한꺼번에 닥쳐올까는 의심이 들어 살짝 두렵기도 하다.
장권익씨(61)
눈에 보여진 것들을 지워야 본질을 알 수 있을까? 온갖 다양한 삶들 속에 인도의 신비가 감춰져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젠 휴심여행을 잊고자 한다.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를 시키고자 함이다. 인도 어린이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겐 지어낸 애처로움은 있을지라도 그들의 눈동자에는 사악함이 없었다. 빈부의 격차 따위는 자신들하고 상관없는 것이고 오롯이 지금 살아내는 것일 뿐이었다. 전정각사에서 만난 한국인 장도연 씨의 눈동자에는 연약함에서 강인함이, 강인함에서 초연함과 평온이 담겨 있었고, 중생을 위한 열정이 가득했다. 나에겐 ‘이대로 괜찮은가?’를 화두로 출발한 여행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 알고 있지 않는가. 지금 내 모습은 거짓일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있다. 이젠 제 2의 삶인 후반전을 지금껏 살아온 정신으로는 안된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이름도 지위도 다르게 받지만 오직 행위만이 남아 삶이 결정된다는 환생! 환생을 망각한 비빔사라왕의 감옥터에서 우리는 앉아 있었다. 조 기자님은 불교는 끊임없는 혁명 즉 자기혁신이라고 했다. 스스로 허물을 벗는 행위일 것이다. 누구나 부처이다.
“삶은 앵무새 꼬리를 잡아 계단을 질질 끌고 내려가는 고양이였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그의 머리가 부딪쳐 쿵쿵 뛰어 올랐다.” (시대의 소음 중 발췌)
내 삶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달 돈에 휘둘리며 일희일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겹고 삭막한 일인지 안다. 산다는 몫의 부채일 뿐인 삶을 이해하며 받아들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왜 나는 인도에 갔는가.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였다. 왜 나는 인도로 갔는가?
이은정씨(46)
삶 죽음 삶..그 윤회의 여정을 극명하게 바라 볼 수 있는 열흘이지만 천 년같은 시간이었습니다.‘몇 년 전 부터 포장된 역할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참나’로의 인생여정에 들어섰어요. 그 동안 제 인생 중에 몇 번의 유사죽음의 시간의 줄에 걸린 거미 같은 절 느끼게 됐어요.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쳤지만, 역설이 필요한 때에 극과 극의 모순의 덫에 들러붙어 있으면서 지치고 숨만 꼴딱거리며 죽지도 못하고 버둥대는 삶이었지요. 이런 삶의 순간에 양극단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역설은 ‘공부와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자체가 공부지만, 내면으로의 여행이 배제된 외부로 향한 여행은 죽음이 없는 삶이나 삶이 없는 죽음처럼 허망한 가면축제마냥 진실된 자연과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자신을 기만하고 나아가 만물에 깃든 영혼을 조롱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인도 휴심여행은 내면과 외부로의 여행이 선명하고 깊이있게 잘 조화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공부였으며, 제 앞으로의 삶에 꼭 필요했던 보석같은 자원을 캐어내고 지니고 가게되는 운명적인 만남이고 기회였습니다.(굿)
다시 한 번 그 여정을 동행해주신 여러 선생님과 긴밀한 애정으로 함께 해주신 부처님께 사랑과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