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고 계신가? 기억나시나?"
묵직한 남자 정병도형, 경상도 대구 사나이가 키는 작아도 매처럼 추상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되 흐트러짐 한번 없는 정확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군 장교로 말뚝을 박았다면 최고의 군인이 되었을 가슴이 뜨거워 사람을 마음으로 담고 사는 정이 가득한 정병도 형. 이십사 년 전에는 포항 용흥동 한라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지만, 현재 나는 순천에서, 정병도 형은 구미에서 살다 보니 잊고 살 때가 많다. 그런 형으로부터 며칠 전 카톡에다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사진 속 기념 타월에는 "계유년 한라 6차 아파트 큰 잔치" 그 밑에는 조그맣게 "1993. 2. 7."이 찍혀 있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잉크 냄새가 물씬 날 정도로 또렷하게 나의 기억을 되돌려 놓았다. 그러면서도 형은 안타까움이 컸던지 짧은 댓글까지 매듭으로 달려 보내왔다.
"가지고 계신가? 기억나시나?", " 그리운 시절~.", " 이게 뭔지 아시남? 그리운 시절~! 이제 와서 어쩌남~?"
우연찮게 형수가 장롱을 정리하다 나온 거랬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 형도 지나간 세월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본 순간 1993년도의 기억을 장롱 속에다 누군가는 저토록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보진 못했다. 세상 열심히 바르고 아름답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본래 모양 그대로 간직한 기념 타월이 찍힌 한 장의 사진을 보며 나는 잊고 지냈던 20여 년 전 추억 속으로 순식간에 빠져들고 말았다.
86년에 포항제철에 입사하여 결혼한 뒤 셋방을 전전하다 내 나이 서른하나에 31평 아파트를 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겁도 없이 무모한 빚을 안고 샀지만, 하여간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런데 타향에서 우연히 그 아파트의 입주자 대표를 맡게 되었다. 그런 계기는 때마침 주변에 고층 아파트 건축 붐이 불면서 저층인 우리 아파트가 불편한 여러 가지 영향을 받게 된다. 고층이 들어서는 건설 현장과 인접한 아파트 동(棟)은 부분적으로 건물에 균열이 가고 소음과 분진 등으로 입주민의 불편이 가중되었다. 결국 참다못한 입주민들이 실력으로 건설 현장 차량이 드나드는 진입로를 봉쇄하게 된다. 그토록 갈등이 악화되어도 아파트 입주자 대표는 적절히 주민을 위한 대응을 하지 못해 주민 불만은 가중되었다. 당시 내 판단으로는 입주자들이 선임한 임원진들이 주민의 이익을 위한 노력이나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다고 본다. 이후 임원진이 자진 사퇴까지 이르게 되면서 입주민 임시총회가 열리게 된다. 시급한 환경에 적절히 대응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임원진 선출이 필요했고 그때 내가 누군가의 손가락 총으로 많은 입주민의 지지 속에 입주자 대표가 되었다.
입주자 대표의 호칭은 회장님이었고 회장의 업무는 아파트 유지 보수에서부터 청소원과 경비 채용을 포함 고용된 사람들의 급여 관리까지 맡았다. 요즈음으로 치면 공동주택관리사의 업무를 수행했다고 보면 된다. 당시에는 공동주택관리사 제도가 없었기에 그게 관행이었다. 그런 업무는 힘들지 않았는데 당장 건설회사와 벌여야 할 협상이 심적인 부담이 되었다. 지루한 밀당 끝에 아파트 내부에다 편의시설 추가 설치와 아파트 인입 도로 및 주변 아스콘 포장 그리고 균열이 간 담장 재시공부터 시작하도록 했다. 거기다 아파트 전체 외곽 도색과 벽체 균열부 보수까지 많은 안건을 타결해내는 성과가 있었다. 주민 불편 사항이 거의 해소될 즈음 마지막으로 입주민에 대한 그동안의 불편과 노고에 대한 보상차원에서 건설사로부터 상당한 비용을 협찬받아 화합 및 위안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잔치를 하면서 만든 기념 타월을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는데 정병도형이 카톡으로 보내온 사진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진 속 타월에 찍힌 글자를 보며 이토록 마음이 설레다니. 이후 그 형은 청하중학교에서 교편을 접고 구미로 이사를 떠났고, 나는 광양으로 94년도에 발령받아 와서 지금에 이르도록 인연을 맺고 있으니 참으로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 형의 마음이 참으로 진국중 진국이었다. 헤어지고 얼마 후 꼭꼭 눌러쓴 손 편지를 보내와 나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 편지에는 광양 쪽에 박철영이 하나 있으면 그것으로 가볼 만한 곳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몇 년 후 구미에서 사전 연락도 없이 나를 찾아왔었다. 형이 보내준 편지는 내 소중한 기억 상자에 지금껏 보관되어 있다. 당시 아파트에서 좋거나 나쁘거나 사사로운 민원들이 발생하면 죄다 회장님인 내 몫이 되었다. 그럴 때 옆에서 든든히 힘이 되어주었던 형이었기에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아파트 내, 외부의 난제가 다 해결되자 서서히 일부 노회한 나이 많은 주민들을 축으로 회장 흔들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꼿꼿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서 나의 진정성을 믿어주는 분들이 많았기에 가능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매달 반상회 날이면 영계 회장이라며 서로 자기 통로에 와달라던 통로 반장 아줌마들을 생각하니 지난 일이지만 행복하다.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살아볼 만한 세상임을 알게 해 준 나에게는 소중한 시절이었다고 본다. 포항에서 광양으로 전근이 되어 이삿짐을 차량에 실을 때 도와주다 기어이 눈물을 흘리던 아줌마도 생각나고 못내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아쉬워했던 그분들이 많이 보고 싶다. 지금은 다들 어디론가 이사를 하였거나 각자의 위치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만약에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테니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족해야 한다. 토요일이면 주차장을 비워 아파트가 떠나가도록 함성을 지르며 족구 시합을 하였고, 그런 우리들을 아파트 창문을 열고 응원하던 주민들과 함께 어우러져 기어이 통기타 리듬에 맞춰 7080 노래를 부르며 놀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그런 시절은 다시는 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빨갛게 감이 익어가는 시월이면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포항 용흥동 고갯길을 걸어 올라가던 그 세월이 그립다. 병도 형의 카톡 사진 한 장 때문에 되돌릴 수 없는 추억 속에만 오롯하게 남아 더 그리운 시간과 사람들이 잊힌 내 기억에서 온전히 살아났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오랜시간이 지나도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 준다면
그 사람은 참 행복할거 같습니다. 그 시절 열정이 지금 형의 모습 속 어딘가에 숨어 있겠죠?
구미사는 그 형은 병도없이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하
나도 덕분에 병도형을 알았기에 병도없이 잘 살고 있다네
정시인의 재밌는 댓글에 고맙네그려
친구 이름이랑 같아서 깜놀했네 그려.
그랬어
아마 이름만 봐도 훌륭한 분일거네
자네 곁에 멋진 친구를 둔거지~~^^
오랜 빛바랜 사진을 움켜쥐고 두손을 살며시
두 눈을 지그시
제 옆자리 남자의 그 사랑을 훔쳐보듯
멋진 추억의 남자들의 글을 몰래 훔쳐 봅니다
맞아요
남자들끼리 삼십대에 의기투합해 맺은 인간애는 대단한 것이었고
지금껏 이어오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