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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운 대보름
대보름이 내일 모렌데
밖이 흐릿하기에
달이 없는 줄 알았더니
부신 전기불빛에 쫓겨
외진 산등성이 위에서
힘없이 웃고 있다.
환청으로 들려오는
ㅡ달아 달아
밝은 달아
ㅡ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눈 감아도
떠오르는
어머니
어머니
2. 어두운 풍경
- 세상에 이런 일이
몇 해 전부터 추석 앞두고
벌초하러 아버지 산소를 찾으면
누가 했는지
말끔히 벌초가 되어 있어
요즘 같은 세상에
참 고마운 분도 있다며
감격해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한 오십대 여성
아들 며느리와 찾아와
제 남편 제 아버지 무덤이라며 우기는 통에
무덤의 주인을 가리기 위해
파묘破墓까지 하여
분별하는 장면을 TV에서 보았다
새로운 것을 얻으면
지나간 것은
추억조차도 버리는 세상
바쁘다는 편리한 핑계로
제 남편 제 아버지 얼굴도
잊고 사는 오늘
누가 있어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3. 착각
30년 만에 만난 제자 왈
“선생님, 많이 젊어 뵙니다.”
정말인가 싶어 거울을 보았다.
고개를 돌리니 또 다른 제자 왈
“선생님, 많이 늙어 뵙니다.”
정말일까 봐 거울을 돌아섰다.
4. 장가계張家界에서
보이지 않던 게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에 백세가 되어도 장가계를 보지 못하면 제대로 늙은 것이 아니라는 말에 홀려 수만 리를 달려가 가파른 계단 오르니 6눈을 의심하게 하는 기묘한 봉우리와 아득한 사연이 앞을 막아선다. 알파고가 바둑을 두는 오늘도 미세한 생명체 하나 만들 수 없는세상은 저리 시끄러운데 자연은 이리 의연하다. 태고적 속살이 드러나 있는 자연의 신비 앞에 커 보이던 인간의 키가 새삼 무색하다.
5. 여물어가는 가을
유리 같이 맑은 하늘에
흠 될까봐
바람도 숨죽이는
10월의 아침
금오산 정상 바라보니
가을이 여물고 있다.
다갈색 높은 산봉 위로
파아란 하늘이 열려 있는 게
이종무李種武의 가을 유화다
서릿바람에 흔들리는
산비알 밭둑의 억새가
늦가을의 눈目인 양
부시게 빛나는 그 위로
푸드덕
장끼가 날아오른다.
6. 봄날
오늘도 빈 하루.
빌수록 더 무거워지는 마음
청전靑田의 “춘경春景”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
저 끝없는 여운 속에
무거운 나를 잠재우고 싶다.
연초록 잎 새로
불어오는 감미로운 바람
우렁우렁 메아리치는
먼 산의 화답 물결
티 없이 속살대는
개울물의 합창
진달래 꺾어들고 내닫던
정겨운 고향 산마루
무심하던 흰 구름
드센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지금도 무연히 흘러가고 있을까
7. 산 하나를 넘지 못하고
날개를 단 마음이
산 하나를 넘지 못하고
땀도 말라버린 종심從心의 마루에서
소낙비가 그리운 건 무슨 조화인지
봄 오면 싹 트고
가을 되면 잎 지는
이치를 아는 태양은
능청스레 웃고만 있다
갈채 속에서
길길이 키가 크는 나무들도
필경엔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걸
아직은 남아 있는 구정에
쉬 손을 흔들 수도 없는데
하늘은
저리 높아만 가고
8. 바람 많은 계절 ㅡ <경북문단>
원시의 가락으로 노래하는
자연의 코러스
보이지 않는 가슴이 아름답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가슴이 아름다운 것은
아직 건너야할 강이
남아있기 때문인데
바람 많은 계절
막상 젖고 보면
절로 얼굴이 붉어지는데
바람에 좌우되어
비를 기다리는 사람들
봄 오기 전에는 비단이불에
꽃비가 내려도
하냥 저릴 이 관절
약을 쓴다고 새가 될까
9. 봄 서정
포슬포슬 내리는 안개비에
벚꽃이 투명하게
젖어가는 아침
봄이 몽글몽글 피어 오르고
눈길 닿는 곳마다
어머니가 건너왔을
보름달 같은 그리움이 고여 있다
입을 열면 신비한 비밀이
포르르 날아가 버릴까 봐
슬며시 입을 다물고 있다
순간
안개를 가르는 금빛 햇살이
가파른 시선으로 내리 꽂혀
세상이 수런수런 깨어나고 있다.
10. 갈대의 항변
나는 아직 내가 약하다는 말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허리가 가늘다는 이유만으로 약하다는 누명을 뒤집어쓴다는 건 아무래도 억울하다.
모두가 버리고 간 마른 모래땅 모진 흙바람을 온몸으로 막고 살아온 고집과 몸보다 옷이 힘이 되는 세상에서 단 벌 푸른 옷으로 수수한 웃음 웃어준 게 험이라면 험이다.
바람 불면 부는 대로 흔들어 주고 비 오면 오는 대로 맞아 주면서도 언제 한 번이라도 얼굴 바꾸고 섭리를 거역해 본 적 있었던가.
누가 뭐래도 눈 감고 귀 막고 우직하게 한 곳에 뿌리 내려 눌러 산 죄밖에 없다.
사람들아, 지금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11. 절이라도 하고 싶다
달리기라면 꼴찌만 하던 딸애가 가을운동회 ‘손님 찾기 경주’에서 손잡아 달려 준 아즘마 덕분에 3등을 했다고 자랑이다. 손목에다 찍어 준 ③이라는 스탬프인印이 지워지지 않게 테이프로 붙여두고 싶단다.
얼굴도 모르는 그 아줌마를 찾아 절이라도 하고 싶단다. 직장에 출근하느라 응원도 못 갔는데 다 잊고 저리 좋아하는 걸 보니 오늘은 내가 딸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다
(1990)
12. 산사山寺의 밤 < 월간문학>
침묵조차 침묵할 것 같은
조용한 산사
빗소리가
소음을 삼켜
숲이 더 고요하다.
아득한 어둠 속
별 이야기 묻어 있는
바람이 살며시 다가와
아득한 그리움을
쏟아 놓는다.
천지가 어둠 속에
숨죽인 이 밤
그리운 이름
때 묻지 않은 소리 보는
안경 하나 있으면 좋겠다.
13. 겨울비
때 아닌 계절에
장마비가 내리더니
희미한
안개를 몰고와
미친 바람과
눈 밝은 사람들로
덫에 걸린
세상의 무게가
바위처럼
무겁다.
14.진주 남강晋州 南江
사백 년을 흘러도
논개論介는 남강에 있고
깊이만 다를 뿐
촉석루矗石樓는 아직도
정정亭亭히 높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짙은 안개 속
푸른 빛 하나 지켜
여흘여흘 흘러온 가람
강물보다 청청한
그날의 이야기가
성근 돌 축대
젖은 흙 속에서
파아란 이끼로 숨 쉬고 있다.
즈믄 구비 휘돌아
강심江心을 메운 세월이
멀리 서울 안방에서
의암義岩을 타고 앉아
논개를 몸채로 낚고 있어도
논개는 남강에 있고
남강은 진주에 있다.
15. 허전한 넋두리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내 옆 자리에 와서
손자의 귀여운 사진을6 보여 주며
손자가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천자문을 다 익혔다고
은근히 자랑을 한다.
여태 장가도 가지 않는 아들을 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자문까지는 두고
그저 멀리서라도
건강하게 놀아주는
손자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한 때는 꿈도 많았는데
이제 다 내려놓고
남의 행복한 모습이나 보고
부러워하는 나이가 되고 보니
맥락 없이 살아온 세월이
한없이 허전하다.
아직도
내게 무엇이
남아있기나 한 것처럼.
16. 호박꽃 /
누가 호박꽃을 못생겼다고 하는가 누구처럼 까탈스레 앉을 곳 가리지 않고 누구처럼 이것저것 눈치 보지 않고누구처럼 호드갑스레 꾸미지 않고 제 얼굴로 제 자리에 발 붙이고 비바람 묵묵히 다 안고 앉아 푸근하고 넉넉한 얼굴로고향을 지키는 어머니의 꽃, 누가 호박꽃을 못생겼다고 하는가
17 안압지雁鴨池
경주 박물관 가는 길에 수상한 바람에 이끌려 안압지를 찾았더니 1330년 전 그때 그 자리 백성들이 땀으로 못(池)을 모으고 석축을 쌓아 동궁으로 사용했다는 임해전臨海殿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역사를 세일하고 있었다. 오리가 노닐던 못엔 금붕어가 가득하고 왕자가 거닐던 길엔 속절없이 빨라져가는 세상의 속도에 맞춰 폐타이어 조각으로 포장을 해 두어 책으로 읽던 신라가 저만큼 더 아득해 보였다. 금빛 박수갈채 머물던 자리 미니아튀르 같은 시간이 저만큼 늘어지고 있었다. ( 2005. 4)
18. 남은 가을
산 비알
남새밭 밭둑
무참하게 말라버린
풀숲 위로
물 먹은
서릿바람 불고
때를 잃어버린
산까치 한 쌍
남은 가을을
줍고 있다.
19. 비 하느님
이 가뭄엔 비가 하느님이다. 눈만 뜨면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 눈을 감아도 물이 보이고 귀를 막아도 빗소리가 들린다. 쩍쩍 갈라지는 논바닥 타들어가는 고추, 고구마엔 물이 생명줄인데 보洑를 열어 피 같은 물을 흘려버리는 유식한 정치 앞에 못 배운 농민들은 차라리 울고 싶다.
하느님, 이제 믿을 데라곤 당신밖에 없습니다.
20. 길고양이 도둑고양이
집 없는 고양이를
길고양이라고 하는 이도 있고
도둑고양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길고양이라고 하면 길고양이가 되고
도둑고양이라고 하면 도둑고양이가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아다
21. 덕진이
언제 봐도 근심 하나 없이 웃는 덕진이. 공부는 못해도 결석 한 번 안 하고 하루 7시간 넘는 수업시간 꼿꼿이 자리 지키는 인내심이 기특해 머릴 쓰다듬어 주면 쑥스러워 얼굴 못 들고 거짓말이 넘치는 세상에서도 거짓말 한 번 할 줄 모르고 남들이 웃건 말건 여자 친구 있다는 말 오락실에 갔다는 말 숨기지 않고 남 싫어하는 일 죽어도 못하건만 남들이 꺼리는 일 앞 뒤 재지 않고 먼저 나서서 하고 하루 종일 선생님께 먼저 하는 말이라곤 일과 끝나자마자 교무실로 달려와서 종례해 달라는 말 한 마디뿐이지만 이십 리가 넘는 먼 거리에서 학교는 남 먼저 오고 남들이 무슨 말을 해도 해서 안 될 일 털끝만큼도 하지 않고, 해야 할 제 일은 먼저 나서서 하는 덕진이에게 세상은 무슨 말들이 그리도 많은지 (1999)
22. 할머니의 짝사랑/동시
바람 따라 다 떠나가고 텅 빈 집 혼자 남아 고향을 지키는 할머니 아들은 아득해서 말도 못하고 자나 깨나 보고 싶은 손자 생각에 귀여운 음성이라도 들어 보려고 어렵게전화를 해 보지만 한사코 대답이 없어 애꿎은 전화통만 바라보고 있다.
23. 고향집 감나무
할아버지가 지으신 집 아버지 돌아가신 후 바람 따라 다 떠나가고 잡초 무성한 빈집으로 20년을 버티다가 망을길 정비사업에 몰려 철거되고 혼자 남아 고향을 지켜 오던 감나무 지난 겨울 누군가의 실화로 줄기가 까맣게 그을려 죽은 줄 알았더니 봄 되자 기적 같이 새 잎이 돌아왔다 70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다시 살아오신 것 같다.
24. 멀어져 가는 고향
꿈에도 그리는 언덕인데 떠나온지 50년 답답할 때 전화할 한 곳이 없네.전화기가 귀하던 시절 이장집 전화 한 번에 부모님 안부에 고향 집 문까지 챙겨 주던 때가 있었는데 고향집 찾았다가 잠그는 걸 잊고 온 수도꼭지 걱정에 밤을 새다가 날 밝자 그 하나 챙기려 60리 길을 달려가 잠그고 왔다. 떠나 와도 떠나지 못하는 갈수록 저만큼 멀어져 가는 고향 가난했지만 인정 나누던 그 시절이 그립다.
25. 사람의 무게 ㅡ <종심의언덕>
세상을 다 태울 것 같이 뜨겁던 하늘에서 오늘은 거짓말 같이 시원한 소나기가 내리고 있다.
장마철에 지겹다고 그리도 푸대접하던 비가
가뭄 속에 내리니 하나같이 나서서 금비라고 반긴다
필요한 건 무엇이든 귀해야 대접 받는가
배추가 금추가 되고 오징어가 금징어가 되는 세상이지만 사람은 어느 때라도 사람인 세상이 되어야지
요즘 세상 보면 사람의 무게가 낯설다.
26. 무제1 /
무심코 길을 가다 보니
이 추위에빈 집 담벼락 아래에서 털이 엉성한 개 한 마리 떨고 있다. 친구라며 데리고 다닐 때는 언제고 늙고 쓸모없어졌다고 내다 버린 사람들.
의리 버린 사람을 개만도 못하다더니 사람들의 그 말 개가 들을까 두렵다.
세월은 날로 가팔라가는데
의義에 눈 감고 제 걸음만 걷는 사람들
할 말이 없다.
27. 무제3 /
시골에 귀한 손님이 오면 한바탕 일어나는 전쟁. 자신이 키우던 닭을 잡으려는 사람과 잡히지 않으려고 사력 다해 달아나는 닭. 친구 같던 주인이 돌변하여 잡겠다고 달려드니 당황하여 제 정신이 아니다. 이제 와서
사람을 믿고 주는 대로 받아 먹은 게 어리석었다고 가슴을 친들 무엇하랴. 사람은 닭이 아닌데
천진한 닭의 마음 생각하니 하늘이 무겁다.
28. 가을 마중
가을을 마중하려고
산에 오르니
억새가
여름의 작별과 가을의 시작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풍경이 예술이 되는 계절
천상의 어느 화가가 와서
이리 그려 놓았나
첩첩한 산곡
산이 온통 갖가지 물감을
칠해 놓은 채색화 같다
하나 같이
따뜻하고 풍성하다
날카로운 세상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여기 와서 마음 놓고
듬뿍 담아 갔으면.
29. 가슴이 허전할 때면
그리운 것은 묻어두고 오래오래 그리워나 하자.
가슴이 허전할 때면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리워나 하자.
높아 가는 하늘 익어가는 山色도 그리워나 하자.
그래도 그립거든 흘러가는 구름 새로 푸른 하늘을 보자
하늘이 산이 되는 날, 너는 말 못하는 산이 되거라
30. 앙코르왓트의 아이들 ㅡ선주문학 45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원 달러'를 외치며 달라붙어
엽서, 팔찌, 부채 등을 팔고 있는 아이들.
그걸 사 주면 돈 버는 맛에
학교에 가지 않아 교육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가이드의 말에
못 들은 척 뿌리치면
“언니 예뻐. 언니 날씬해. 오빠 미남이다”를
연발하며 끈질기게 따라오며 길을 막는다.
순수하고 예쁜 눈망울을 외면하고
멀찍이 떠나와서 뒤돌아보면
물건 한 점 사주지 않아도
야속하고 원망스런 표정 하나 없이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는 아이들.
맨발에 먼지 뒤집어 쓴 흐릿한 그 모습 위로
“기브 미 쵸콜렛” “기브 미 껌”을 외치며
미군美軍을 따라가던
50년대 우리들 아픈 모습이 오버랩 되어
돌아서 오는 발걸음이 천근이나 무겁다.
31. 시골학교 동창회 ㅡ선주문학45
시골학교 동창회땀에 전 일상 잠시 벗어 두고억지로라도 여유로운 하루북, 꽹과리, 징소리에 어우러져흥겨운 춤사위가 펼쳐지고구석구석 차일치고솥 걸고 엉겨 앉아정겨운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다.서울에서 온 사장도 대구에서 온 회장도이 마당에선 한낱 허울이다.들어도 들어도 싫지 않은 그 이야기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구수한 사투리에 하루해가 짧다.
32, 그리움 ㅡ ???<그리운 여백>/
이곳에 오면
눈 뜬 게 부끄럽다.
너무 높아
그 너머는
보이지 않는다.
다 벗어
눈 감고 보아야
그려지는
얼굴
× 남은 가을 ㅡ 18번과 중복×/
산 비알
남새밭 밭둑
무참하게 말라버린
풀숲 위로
물 먹은 서릿바람 불고
때를 잃어버린
산까치 한 쌍
남은 가을을
줍고 있다.
34, 두꺼비
마른 날 타는 가슴을
숨어 살던 두꺼비들
비 오자 참아온 울음을
밤을 새워 울고 있다
35. 빛이 되거라 -
ㅡ善山中高 校誌 발간에 부쳐
뒷골 솔바람에뿌리 내려 자라온 이야기가버들개지 하얀 눈처럼다수로이 피었구나단계천 여울 속 깊이뜨겁게 흐르던 사랑이이 추운 계절에송이송이 영글었구나솜털처럼 포근한 기쁨이저리도록 아픈 슬픔이때 묻지 않은 목소리로흥근히도 고였구나물은 강으로 흘러 강을 이루고흙은 산으로 솟아 산을 이루고나무는 나무로돌은 돌로꽃은 꽃으로 피어저마다 높고 큰 산이 되거라세월처럼 긴 강이 되거라태양처럼 눈부신 빛이 되거라
36, 겨울엔 나무도 춥다 2 / 바람의 계절
나무는무슨 바람이 불지 몰라
늘 불안하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하던 말이
세상을 움직이던 때가 있었는데
내일은 또 어떤 바람이 불고
바람 따라 무슨 구름이 몰려올지.
바람이 불면 나무도 춥다.
춥다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세상에 걸려 넘어지고
말하지 않는 것들도 생각이 있다.
나무의 아픔은 나무만이 안다
바람을 모르고 살던그 때가 그립다.
37. 허전한 가정의 달
오늘은 어린이날
하루해가 길다.
집집마다 아이들로 떠들썩한데
우리 집은 절간 같이 적막하다.
어린이날은
눈감고 귀 막고 보내지만
사흘 남은 어버이날은
어디가 숨죽이고 있어야 할지.
차라리 아는 이 없는 먼 곳으로
여행이라도 다녀올 요량이었는데
느닷없는 광풍에 허둥대다 보니
그 한 틈을 찾지 못했다.
깃발 요란한 가정의 달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늙은이에겐
이래저래 힘겨운 터널이다
허전하고 답답한 이 터널 벗어나
시원하게 푸른 5월의 하늘
맘껏 바라볼 수 있을까?
38. 먼 고향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는데
어디를 둘러 봐도
낯선 풍경이고
좀 낯익다 싶어 들어가 보면
비어 있습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밖에 나오니
뜨락의 낡은 의자가
무슨 말을 할 듯합니다
그러나 그뿐
무심한 바람이 지나갑니다
더 있지 못하고
돌아 나오는데
마당가 한 편 가죽나무 아래
50년 전 어머니 항아리가
눈앞을 가립니다
참았던 눈물이
장마철 흙담처럼 무너져 내립니다
39. 참회/
어머니,
당신이 헤아리시던
그 많은 소망들을,
그 간절한 기도를
아직 이런 모습으로 있습니다.
세월의 침잠 속에
어느 먼 날의 전설처럼
뜨거운 가슴 마주하여 앉으면
당신은 거기
너무도 선명한 모습으로 있습니다.
40. 가을 산책
비에 씻긴 산색이 부시게 밝고
다홍빛 물이 드는 플라타너스
넓은 잎과 파아란 하늘
노란 은행잎이 점령한 길을 걸으며
성큼 다가 온 가을을 읽는다
하루가 다르게 익어가는 가을
서늘한 바람에 문을 닫고
창을 통해 내다보는
억새가 너울너울 흔들리고 있다.
그 속에서
바람 불면 키를 낮추고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가슴으로 듣는다.
(비에 씻긴 산색이 / 부시게 산뜻하고다홍빛 물이 든 / 플라타너스 넓은 잎과파아란 하늘 / 노란 은행잎이 점령한골목길을 걸으며 / 가을을 읽는다서늘한 바람에 / 익어가는 가을창을 통해 / 흔들리는 억새를 보며바림 불면 키를 낮추고 / 때를 기다리며 사는인생 이야기를 / 가슴으로 듣는다.)
41. 5월
초록빛 더해 가는
연악 산마을
바람도 숨죽이는
5월의 문턱
까치가
조심스레
아침을 깨운다
42. 미망迷妄의 계절 ㅡ <경북문단>
해는 중천인데 갈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만 남은 미망迷妄의 계절 가는 사람은 남은 사람이 부럽고 남은 사람은 가는 사람이 부러운 역리逆理의 거리에서 갈 곳 없어 남은 사람은 왜 가는지도 모른 채 먼 길을 가고 있다
43,쓸쓸한 추석 (93) /
추석날 오후아내와 둘만 남아 지키는집이 답답해서가까운 등산길 산마루에 오르니세상 많은 사람 중에나 같이 쓸쓸한 사람은 없는지정자가 텅 비어 있다.주인이라도 된 양 정자에 앉아근심 없이 자란 나무와높푸른 하늘을 보니가슴이 차 오른다귀를 열어 주는맑은 바람과청아한 새소리는가외 선물이다.더 욕심내면머리가 무거울 것 같아내려오다가어려울수록비우라던 어머니그 말씀을 듣는다.
44. 나무 앞에서 (32)
아침마다 나무에 물을 주는 행복
밤새 찌든 먼지가 물과 함께 씻기고
잠자던 영혼이 잎 위에서 빛난다.
무시로 부는 바람 앞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제 가락을 빚어내는 일만 하는 나무 앞에서
잘못 살아온 내 일흔 다섯 해가 부끄럽다.
물 하나에 반짝반짝 웃어주는 잎들에게
나의 시는 너무 초라하다.
주는 만큼 키가 크는 정직한 얼굴
어떠한 물음도 함부로 던지지 않는
바위 같이 의연한 자태
이 눈물 나게 고마운 자산을
다 내어주고
하냥 저리 무념무상
넉넉하고 푸른 모습만 보여 주고 있는
나무 앞에서
45. 나
세상이 너무 밝아서 밍밍한 산문 같은 시대
시詩세계에 무심하던 P가 詩集을 보내왔다.
하고 많은 책 중에
하필 시집을 선물한 마음이 궁금해서 밤 늦도록 읽고 또 읽어도 단서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럴수록
그 깊이가 더 알고 싶은
나.
혹 세상이 모르는 천재가 아닐까7
몇 십억 몇 백 억을 가지고도
사생결단 부동산에 목을 매는 세상에
그 좋다는 강남에
땅 한 평 없이 살면서도
그 사람들을 웃고 있는
나.
혹 나만 모르는 천치가 아닐까?
46. 팔순의 산골 할머니 (91)
8 할머니.
어쩌다가 이리 되었느냐고 하니
"일하기 싫어서 허리가 굽었지요"
할머니 무거운 대답이 가슴을 저민다.
65년 전 20세에 도시에서 시집와
먹고 살기 위해 병약한 남편 대신
농삿일 하고 계곡에서 약초 캐며
살아오셨다는 아득한 이야기.
남은 소원 무어냐고 하니
"내가 영감 좋아 이곳에 왔으니
죽을 때도 같이 가야지요."
헐겁게 웃는 할머니 허한 모습에서
한평생 일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 지친 모습이 떠올라
눈을 감고 싶다.
( TV를 보다가. 2022.6. 25)
47. 호미곶虎尾串에서 (90)
호미등虎尾嶝 긴 해안선 따라
무시로 몰려와서 부서지는 파도
해조에 깎인 바위 서리서리
여름내 벗어 놓고 간
추억의 더께가
이끼보다 파랗다.
파고 높던 무서운 밤
걱정으로 끓던 몸살
시린 사연 딛고
저리 밝은 빛으로
하늘을 껴안고 앉아
둥실둥실 부표를 띄우고 있는 게
막내딸의 눈망울마냥 정겹다.
연푸른 이내 속
살을 에는 겨울 바다
바람도 추위도 잊고
생선회와 소주에 취해
기우는 마음 추스르며
시詩를 앓는 가슴이 뜨겁다.
(동해안 문학기행에서)
48. 아득한 길
행사장에서 만난 어린 스님
바로 앞 무대의 활기찬 분위기에도
시종 무표정한 얼굴이다
‘감정이 없는 건가’
‘수행자의 모습은 저래야 하는 건가’
그 생각 하나로 잠겨 있는데
또래 아이들이 춤추며 노래하고
손뼉을 치는 아우성에도
석상처럼 얼어 있더니
옆 큰스님이 눈길을 주자
비로소 웃음을 잃어버린 것 같은
그 돌부처가 배시시 웃는다.
바람도 범접하지 못할
냉혹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적멸寂滅에 이르는 길이 저리 아득하다면
차라리 난 이냥 이대로
먼지 묻은 사람이고 싶다
49. 술과 시
잡문雜文 같은 세상에서
시詩만 쓴다는 게 힘겨워
시 대신 산문을 쓸 때
부끄럽다는 홍윤숙 선생님*
1925년생이면
안방이 더 어울릴 할머니인데
여자 나이 이순耳順이면
이미 ‘여성女性’은 아니라며
사이다 대신
화끈한 소주나 달라신다.
선생님의 주량酒量은
시인 홍윤숙의 메타포인 양
연거푸 여섯 잔을 비워도
취할 줄을 모르신다.
시는
이렇게
30도의 소주에도 취하지 않아야
시가 되나 보다.
(1987년 3월 28일 문학 강연을 위해 선산에 오셨을 때.)
50. 물 먹은 바람
자고 나면 비 비만큼 많아지는 말 말만큼 속이 비는 세상 바람소리가 난다 바람도 물 먹은 바람이라 연을 띄우지 못하고 젖지 않은 길만 찾는다.
51. 할 말이 없다 /
시장으로 팔려가면서 어미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송아지의 애처로운 눈망울 바라보며
눈물짓는 어미 소
속수무책 떠나보낸 새끼 생각에
며칠째 먹지도 자지도 않고
버티고 있는 모습 눈물겹다
‘음매, 음매’ 애달프게 울부짖는 소리가
생다지로 어미와 자식 떼어놓는
사람들 향해 꾸짖는 회초리 같다
무정한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하더니
이게 사람의 모습이냐고
사람이 짐승만은 한 것이냐고
요즘 세상 보면 할 말이 없다
52. 화랑畵廊에서
아침 신문에서 미국에 가 있다는단원檀園을 듣고단원이 보고 싶어 화랑을 찾았더니단원 부재 중돌아 나오다 청전靑田을 만났다내 작은 호주머니에 담을 수 없는 청전의 추경秋景그 불타는 계곡에서 나를 잃었다.한참을 취해 있다 돌아보니먹과 붓으로 세련된 조형미를압축적으로 표현한산정山丁의 수묵 추상화동양적 여백에 단순화된 붓 터치로경쾌한 느낌을 주는남정藍丁의 신비로운 산과 나귀나귀를 타고 청산 속을 걷는 도인道人짙푸른 강가에 돛단배를 띄우고강심江心을 낚는 어옹漁翁이어지러운 세상 혼미한 나를 깨운다.
53. 강남터미널에서
산 같은 집
짐승 같은 자동차
기계 같은 사람
회색빛 하늘 아래
검은 아스팔트
그 사이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무
그 나무를 닮은
나
아슴푸레
관악산 넘어간
흥부네 집 제비의
신음 소리 듣는다. (1987)
53. 남원 광한루
지금 남원엔 춘향이 외출 중
객客들만 모여 벌이는 잔치의 막판
광한루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틈에
웬 코 큰 사내가 기웃기웃
술이나 한 잔 마시고 가잔다.
55. 기림사祇林寺에서
달을 머금은 산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전설 어린 용연龍淵을 안고
푸른 햇살 원광圓光처럼 부신 가람
거대한 삼천불전三千佛殿 금빛 불상보다
빛나는 무단청無丹靑의 대적광전大寂光殿
게송偈頌으로 다져진 천년의 뜰
대적광전 앞 이끼 묻은 석등
세월의 향기를 뿜어내는 삼층석탑
맑은 바람 불어 주는 수굿한 반송盤松
솔숲 푸른 수심에 취해
세상모르고 흐르는 계곡
무심히 나무를 타고 오르는 다람쥐
풀잎을 흔들고 가는 푸른 바람
엉거주춤 서 있는 매월당梅月堂 영당影堂에서
잔뜩 긴장된 얼굴로 세상을 내다보는
매월당梅月堂의 매서운 눈빛이
기림사가 천년을 녹슬지 않는 이유를
말해 주고 있었다.
* 기림사 - 경주시 양북면 함월산含月山에 있는 삼국시대 사찰
56. 강창나루
나른한 햇살 아래 흰 구름 떠가고 근심 없는 미루나무하늘에 닿아 있던 사연 많은 강나루
무정한 세월에 묻혀 인정 실어 나르던 나룻배술 익는 강마을 밀밭 노고지리 우짖던 갈 숲 목월木月 따라 가버리고 목매기송아지 봄을 부르던 논둑길 무성한 잡풀이 남아 할아버지의 붉은 흙을 지키고 있다
57. 바람 속의 비둘기
찬 바람 부는 겨울 아침 비둘기들이 도로 옆 언덕에 시위하듯 모여 있다
한때는 평화의 상징으로 편지를 전하는 전서구傳書鳩로 귀한 대접 받았는데 반가운 소식 전해 줄 편지가 없어진 때문인가
불편한 듯 그 자리에서 바람 속에 살아도 마스크 없이 마음껏 하늘을 나는비둘기가 부럽다.
요즘 세상 보고 있으면 얼마나 더 넘어야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목이 아프다.
(2021. 12)
* 이 추운 계절에, 그라운드골프구장 인근 다리 옆 언덕에 전에 없던 비둘기 떼가 모여 날고 있고, 그 다리 아래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202년 12월
58. 자연의 주인 /?
세상이
아무리 밝아져도
자연의 주인은
자연이다
풀숲 속에 살고 있는
지렁이와 개구리도
그곳에선 그들이 주인이다.
애먼한 해충 쫓겠다고
독한 연기 피우지 마라
그들이 가버리면
더한 것이 찾아온다.
자연이 아름다운 건
다투지 않고
서로 존중하고
품어 주는 데 있다
59. 산촌 근황
하루 종일
사람은 그림자도 안 보이고
어쩌다가 고양이가 지나가는
한적한 산촌 마을
대문 근처만 가도
개가 요란하게 짖어대는
평지와는 달리
낯선 사람 찾아가도
먼저 다가와서 반긴다.
요즘 같은 때
사람 대접 받는 것 같아
은근히 고맙다
60. 꿈
꿈 한 번 꾸기도
드물게 힘든 요즘
지난밤 꿈자리가 좋아서
아침 새 소리를 듣고도
깨고 싶지 않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기다리던 소식이 올까
반가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오래 기다린 간절한 소망의
실마리가 풀릴까
말을 하면 기대가 깨질까 봐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설렘으로 조용히
나만의 하루를 보내고 싶다
설령 설렘이 설렘으로
끝나버린다 해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은근히 행복하다
61. 시대의 역설
감골마을
이곳에 오니 산비탈에 붉은 흙이 흘러내리고 물풀 우거진 봇도랑에 참붕어와 버들붕어가 살아 있다. 어디 그뿐인가 외딴집 굴뚝에서 몽실몽실 연기도 피어나고 희미한 고가선 위로 강남제비도 날고 있다. 욕망이 질주하는 시대에 살아 있는 역설이다.
62. 우리집 치과의사 /동시
ㅡ 다섯 살 동생이
이가 아프고 흔들려서
엄마가 치과병원에 데려가
뽑아내야겠다고 하니
병원에 가는 게 겁나서
동생이 가지않겠다고 한다
할머니가 동생을 달래서
흔들리는 이에 실을 매고
이야기를 하다가 실 끈을 잡아
동생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턱 치자
잇빨이 뽑혀 나왔다
아픈 주사 한 번 맞지 않고
통증 없이 상한 이를 뽑아 냈다
동생의 상한 이를 뽑은
할머니는
오늘 우리집 치과의사이다
62. 새
한 때 솔거率居의 소나무를 진짜 나무로 알고 날던 새가 오늘은 유리창을 하늘로 알고 날다 떨어져 웃음을 사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밝아져도 새는 새다
63. 세월의 바람
설 명절 앞두고 TV에서 만난 아들만 둔 독거노인과 딸만 둔 80대 노인이 나누는 대화 한 줄기ㅡ딸을 둔 집 앞에는 택배가 쌓이는데 아들 둔 집 앞에는 바람만 지나간다. 오랜 우리네 셈법에선 열 딸보다 한 아들의 무게가 더했는데 이제 그 하나가 열 중 하나만도 못하다니 이러다간 아예 그 하나의 의미마저 무색해지지나 않을지? 이게 다 세월의 바람이라니 무도한 바람을 넘을 솔로몬의 지혜 품은 현인賢人이 기다려지는 요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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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상미약화上美若花
꽃의 이름은 아름다움이다 얼굴 따라 이름은 달라도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붉으면 붉은 대로 푸르면 푸른 대로 꽃이라는 이름에는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누가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아도 꽃은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꽃이다
65. 이발 /
머리가 산발이 되어도죽어라고 이발하길 싫어하는녀석을 보면목이 달아나도머리털 하나 못 깎겠다던면암勉菴의 말이비스듬히 보인다효도를 볼모로한사코 이발을 거부했던증자曾子는지혜로운 사람인가그렇다면아예 머리를 감는 것조차거부하는 아들 녀석은효자 중의 효자가 되는 셈이다 (1989)
66 도심 속 진달래/동시
도심 공원에 옮겨 심은 진달래서울ㅕ7 그래도참나무 소나무와 뜻이 통했는데밋밋한 포플러와는저만큼 서먹서먹 목이 타나보다.한 때는수로부인水路夫人을 애태우던자존심도 지녔었거니소월素月이 보듬던사랑도 품었었거니어쩌다가모진 광풍에죄 없는 이방인이 되어생경한 도심 속 회색의 아픔을묵묵히 저렇게침묵으로 항변하고 있다. (1986)
67. 마흔 고개/
내 나이 벌써 마흔 하나이 고개만 넘어서면 혹惑 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갈수록 귀가 커지고 눈이 밝아진다.함께 사는 아내의 말도 겉돌던 귀에멀리 미국美國에 사는 이상구李相玖박사의 목소리가유난히 크게 들리고머리 위 파란 하늘만 보이던 눈에먼 산마루 흐르는 흰구름까지 시야에 들어온다.이렇게 밝아지는 눈․귀만큼속까지 밝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1989)
68. 과학을 하늘로 믿건만/
지금 어딘 가에선 350미리가 넘는 호우가 쏟아져 철길까지 다 잠겼다는데 여긴 천 년 물 흐르던 강바닥이 한길이 되어간다. 자고 나면 모른 척 높아만 가는 하늘 그 흔한 태풍마저 저만큼 비껴가더니 뜬금없이 마른하늘 아래 철길마저 불붙어 세상이고 인심이고 제 정신이 아니다.비 올 확률 70% 약속 지켜 천지가 다 젖고 있는 오늘도 여기만은 섬처럼 동그마니 속이 타는 마음을 속 편한 사람들은 그게 다 하늘 노하게 한 죄 값이라고 한다. 과학을 하늘로 믿건만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우길 수만 없는 현실이 39℃의 무더위보다 무덥다.
69. 소나기
메마른 땅에 내리는 소나기 보는 것만도 시원하다. 분盆에 심은 케일 늘어진 잎이 놀란 듯 생기가 돌고 무더위에 헉헉이던 사람 먼지를 뒤집어 쓴 도시가 일순 부활하여 잃었던 말을 찾아 나서고 있다. 껌벅껌벅 졸던 금오산도 푸시시 깨어나 성큼성큼 새 얼굴로 다가서고.
70. 붓꽃
산 같이 큰 나무도빛 따라 가지가 휘어지고 바람 따라 잎이 지는데메마른 땅 풀줄기로 꼿꼿하게 하늘 향한 곧은 줄기어쩌면 그리도 붓을 닮았나.꺾이고 짓밟히면 풀이 되는 이치를 알기에 비바람 눈서리에 발이 시려도꿋꿋이 다져가는 매운 마음 어쩌면 그리도 붓을 닮았나.서슬 푸른 얼굴에 유연한 자태까지 어쩌면 그리도 붓을 닮았나.
71. 이유 있는 불만
오랜만에 서울에 갔다가 전철을 탔다. 빈자리가 없어 서서 가는데 느닷없이 자리에 앉아 있던 50대의 중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앉으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마냥 반갑지가 않았다.
환승역에서 전철을 바꿔 타고 서서 오는데 자리에 앉아 있는 중학생들이 서 있는 나를 보고 눈을 돌렸다. 어른을 몰라주는 무례함에 눈을 감았다.
72. 허졉한 생각
고희古稀 고개를 넘어서니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많다. 보이지 않는 걸 보겠다고 기를 쓰고 건너온 75년. 다 보이는 것보다 덜 보이는 게 신비한데 가려져 있는 부분이 있어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빈틈이 있어야 정이 가는데 바닥까지 다 보이면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데 직선보다 곡선이 아름다운데 참말보다 허담이 웃음을 자아내는데 모자란 듯 어눌한 구석에 웃음이 숨어 있는데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데 죽어라고 밝은 곳만 쫒는 요즘 사람들
73. 우박
천년 노송이 베어지자 그 끝에 걸려 있던 하늘이 떠나가고 바람 따라 뜬금없이 먹구름이 몰려와서는 무식한 우박을 내려 죄 없는 농민 가슴을 듬성듬성 뚫어놓고 모른 척 슬그머니 해 속으로 숨어 버렸다..
74. 유구무언有口無言
귀성객으로 교통 정체가 이어진다는 뉴스가 딴 나라 이야기 같다. 민족 대이동이라는 한가위 아침 홀로 집 지키는 여든 노모 의사 아들에 5남매 자식이 있으면 뭣 하는가. 명절이면 만사 제쳐두고 천릿길 멀다 않고 만원버스에 매달려 달려오던 고향 길인데 팔십 리 길이 어쩌다 먼 길이 되어 버렸는지. 서울에서 공부하는 제 자식 보러 갈 땐 천 리 길을 달려가던 며느리가 명절만 되면 허리 병이 도지는 이유를 노모는 알고 싶지 않다. 정신과 전문의인 아들도 못 고치는 병, 당당하던 아들까지 꼼짝 못하게 하는 병을 모른 체하고 싶다.
75. 한가위 단상
태풍에 쫓겨 간 한가위텅 빈 도시 한가운데 서서군軍에 간 아들을 생각한다.지난해 오늘 함께 보던 하늘파아란 물길 위로 부서지던 햇살소리 없이 웃던 얼굴을 그려 본다.송편이며 과일이 가득한 식탁별로 즐기던 햇대추와 파전에자구만 눈이 간다.시원한 맛이 좋다며 탐하던 배[梨]가올해 따라 유난히 풍성한데아들 식탁엔 배가 올랐을까?오늘 밤엔 아들이 있는 兵營의 하늘에도배 닮은 둥근 보름달이 뜨겠지.달은 아직도 하늘에 있으니. (1998. 10. 5)
76. 불혹不惑의 마루에서 /
아들놈은 대학생 되어 서울로 가고딸애는 고등학생 되어 기숙사로 가고텅 빈 방 둘이 누워 서로 보며 웃는다.식탁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나누던 얘기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