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 성향숙
무기력에 대하여 / 성향숙
욕실 수채구멍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머리카락이 뭉쳐있다
많은 무리속에서 나약한 소외감으로
떨어져 버린,
뿌리잃은 생으로 한가닥씩
나뒹굴던 머리카락들
더 이상 꿈을 공급받지 못할
이미 버림받은 생들은
미세한 바람에도 풀썩거리고
아주 작은 물 흐름에도
소용돌이로 휘말리며
여기 저기서 밟히고 뒤채이다가
그곳에 소외된 힘들이 하나하나
모이기 시작한다
더러는 좁은 구멍 속으로 빠져나가
전혀 다른 무리들과 섞이기도 하고
움직이는 것들에 잠시 붙어 있기도 하며
구석의 먼지라도 껴안고 뒹굴면서
안간힘을 써 보기도 하는,
그것들이 비로소 힘을 내기 시작하는가
구멍을 꼭 막고
거센 소용돌이를 정지시키는
힘이 발휘된다
[당선소감] “ 상처받은 영혼 보듬고파”
아침 식후,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사이 허리가 불편하신 어머니가 '아유-'신음소리를 내며 설거지를 하신다. 침침한 눈과 기가 많이 빠져나간 손아귀의 힘으로 음식찌꺼기가 덜 씻겨져 매번 설거지를 다시 해야 하지만 유일한 노동의 즐거움을 빼앗는 것같아 몇번 만류하다 이제는 그냥 내버려둔다. 어쩜 힘은 들지만 꼭 해야만 될 것같은 늙은 어머니의 설거지. 내가 시(詩)를 하는 것이 꼭 그 행위 같다면 억지일까.
도립도서관 문예강좌에서 처음 시라는 걸 알았을 때, 아니 처음 말 배우는 아이처럼 되지도 않는 언어를 시라는 이름으로 내보였을 때 부정의 말보다는 내속에 들어있는 단단하고 건조한 시의 씨앗에 축축한 습기를 적당히 부어주어 싹 틔워주신 스승님과 무럭무럭 자라게 해주신 또 한사람의 스승님, 그리고 내 졸시를 처음으로 인정해 뽑아주신 농민신문에도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상처받은 영혼을 보듬어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시를 쓰고 싶고 매일 설거지를 하듯이 아주 개운한, 만족에 가까운 시를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작은 것이 갖는 힘의 상징성 돋보여”
예심을 거쳐 심사위원에게 넘어온 응모작품의 수준은 높아졌으나, 유행적인 시풍을 답습하거나 요설증(饒舌症)이 흠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전종평의 <개미살이>, 신정민의 <석재소에서>, 최월강의 <늪에서 숲으로>, 연용호의 <문둥이골 창꽃 따러 갈제>, 이광수의 <석계里 봄>, 성향숙의 <무기력에 대하여> 등 여섯편이었다.
<개미살이> <석재소에서> <늪에서 숲으로> 등은 감수성이 보이지만 추상적인 분위기, 압축과 절제의 부족, 환경시의 한계점 등을 드러내고 있다.
<문둥이골 창꽃 따러 갈제>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보여준 풍속도이지만, 감각과 사고력의 깊이가 부족하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 <석계里 봄>은 면밀한 관찰을 통해 본 농촌의 풍경이 산문적으로 늘어져 있다.
당선작으로 뽑힌 <무기력에 대하여>는 아주 작은 것이 갖는 힘, 쓸모없는 것이 갖는 힘이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준다는 상징성이 돋보인다.
그리고 삶의 진실을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함으로써 서정시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 점을 높이 평가하여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 문덕수, 함동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