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간섭하면 안되는 이유, 특히 아스트랄체가 탄생하기 이전이 문제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현장에서 초등 아이들을 가르쳤다. 가르치면서 여러 문제들을 발견했는데 그 중에서도 부모님이 아이들을 간섭하는 경우가 가장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이를 필자는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왜 문제인지'와 또 간섭이 사랑으로 포장되기도 했으므로 말을 하지는 못하고 궁금증만 가지고 있었다. 간섭이 왜 문제인지, 그리고 간섭과 사랑이 혼용되는 이유가 질문이다.
이 문제가 두드러지는 것은 시대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베이비 부머시대에는 형제들이 많았고, 또 당시 부모님들은 우선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야 했으므로 아이들을 보살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아이들이 자립하는 데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반면 이후 세대는 1-2명의 아이들이 다수이고, 또 부모님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관계로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부모님들의 신경이 오히려 간섭이 된 것이다. 간섭이란 아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다.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이렇게 하라거나 또는 저렇게 하라고 하는 것, 또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등등이 모두 해당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가만히 두면 되느냐는 질문도 생긴다. 간섭과 안내, 즉 아이를 이끄는 것과 간섭의 차이가 무엇인가가 첫번 째 질문이다.
다음은 여담으로 필자가 현장에서 경험한, 부모님이 아이를 가장 심하게 간섭한 경우이다. 5학년 남자아이였는데, 부모님의 직업은 자영업이었던 듯 하다. 필자가 아이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보통 아이들하고 달리 아이는 늘 가만히 조용히 있었다. 또 말도 잘 하지 않길래 수줍어서 그런가하고 살펴보니, 얼굴에 활력이 보이지 않았다. 또래 아이들은 숨이 찰 정도로 힘이 넘쳐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뛰어다니고 장난도 마구 치는데, 아이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가 '자신감이 없나'하는 생각마저 했다.
이런 사실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이가 한 반장 선거 소견 발표에서 였다. 통상 반장을 희망하는 사람은 스스로 손을 들고 순서대로 소견 발표를 하는데, 아이 역시 스스로 손을 들었고, 순서에 따라서 소견발표를 하게 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아이는 가정에서 연습을 많이 한 듯은 보였지만, 앞에 나와서는 말을 거의 하지 못하였다. 자신의 이름은 작게나마 말했으나, 그 다음부터는 무슨 말을 하는지 가까이에서도 잘 들리지 않았다. 개표 결과 아이의 표는 한 표가 나왔고, 아마도 아이 자신이 쓴 표가 아닌가 한다. 짐작하기에 아이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추후 아버지가 학교에 오셨고, 상황을 알게 되자 아버지 역시 많이 놀라셨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이다. 아버지는 아이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해서 어릴 때부터 시간표를 만들어서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루에 책은 몇 권 읽고 읽은 후에 독후감은 어떻게 쓰는 등등. 특히 또래 아이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다고 자랑하셨다. 그리고 아이의 표가 한 표가 나왔다는 말에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당시 새내기 교사이기도 하고 더 이상 조언(?)은 할 수가 없었다. 또 아버지 자신의 생각도 확고했으므로 많은 말은 오고 가지 않은 듯하다. 그 이후로 아이를 어떻게 기르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간섭이 문제인 이유는 아이의 자아가 형성되기 전(아스트랄체 탄생 전)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아가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첫째 주위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예컨대 자아가 받아들일 것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을 판단하는데, 자아가 탄생 전이므로 그것이 안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아는 여과장치라고 할 수도 있는데, 주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는 주위에서 간섭하는 그런 자아가 되고 마는 것이 문제이다. 즉 아이 스스로 독립된 자아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아이는 자신의 자아가 형성되도록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면서 아이의 자아가 성장, 발달하는 것이다. 아이가 무엇이든 스스로 해보아야 아이의 자아가 온전하게 성장한다는 의미이다. 간섭을 하면 이런 기회를 아이에게 빼앗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이를 길러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발달단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인간 자아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 자아는 태어나서 3세까지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온전히 우주에 연결되어있는 존재로 그래서 주위를 그대로 모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기 주위 상황이 그대로 아이의 무의식에 입력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이 아이를 양육한다면, 아이의 신경체계가 그렇게 형성되어서 아이도 훗날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아이가 커서 자신이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인지를 모른다는 것에 있으므로, 이때 자신을 성찰해서 짜증을 잘낸다는 것을 파악해야 짜증에서 놓여난다.
이 시기는 아이를 중심으로 주위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아이를 온전하게 사랑하는 긍정적인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아이를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온전하게 사랑해서 아이의 무의식에 그 사랑이 저장되어야 한다. 과거 베이비 붐 시대 우리 부모님들은 비록 먹고 살기는 어려웠지만, 어떤 경우에도 아이를 최선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아가 성장, 발달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가 있었다.
반면 그 이후 시대는 경제적으로 살만하니, 아이들을 자신이 원하는 상황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하지만 무의식의 사랑은 현실에서의 사랑이 아니다. 즉 이런 사랑은 무의식의 사랑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무의식의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아이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랑이다. 예를 들어 체첸성 지진에서 어머니가 아이를 자신의 품안에 안아서 살린 그런 사랑이다. 이런 사랑이 경제적인 풍족함, 또 부모가 받은 사고교육(지식교육)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것이 간섭으로 드러났다는 생각이 들지만, 문제는 이런 사실조차 모른다는 데에 있다.
3세에서 4세 즈음 아이가 드디어 자신을 자각한다. 마치 섬광처럼 자신에게 꽂히는 자아 경험을 누구나 했을 것이다. 이 자아는 상에 들어간 자아로, 이제부터는 이 자아가 지구에 적응해야 한다. 요컨대 지구의 여러 존재들을 자신의 정신에 연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 시기 자아는 다른 존재들과 자신을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말하자면 자연(해, 달 , 별 등등)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시기 아이들에게 동화를 통해서 자연을 아이의 정신에 연결시켜주어야 한다. 더불어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면, 아이는 정신세계에서 들은 천체음악을 기억하게 된다. 이것이 음악교육은 어릴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갈이(7세 무렵)가 시작되면 에테르체가 독립해서 발달한다. 에테르체는 생명의 힘으로 7-14세까지 발달한다. 이 시기 아이는 생명의 힘이 폭발해서 지칠줄 모른다. 이 시기 아이들을 길러본 사람들은 아마 알 것이다.에테르체는 리듬을 가지고 몸에 작동한다. 피가 흐르는 소리, 맥박, 호흡 등등의 리듬이 에테르체의 리듬이다. 이 리듬이 우주 에테르의 리듬이므로 음악교육을 통하면 우주 에테르가 활성화되어서 도움이 된다. 이 시기음악교육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9 세무렵 인간 발달에 중요한 지점이 있다. 아이의 자아가 주위와 자신을 파악하는 단계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9세 이전에는 주위와 자신을 같은 존재로 파악해서 모든 상황을 그렇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제 아이는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다른 존재를 통해서 인간으로 다가가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동물을 통해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파악하는 등등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완전히 타인을 의식하지는 못하는 과도기로 그래서 이 시기 교육이 중요하다. 이 시기교육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기적인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12세 무렵 드디어 아스트랄체가 탄생한다. 아스트랄체는 감정체로 영혼의 바탕체이다. 영혼이 드디어 사고를 시작하므로 사고 교육이 가능한 시기가 되었다. 아이가 사고를 할 수 있으므로 본받을 수있는 인간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어야 한다. 아이가 본받을 수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판단해서 본받을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21세 무렵 자아가 탄생하게 된다.
자아가 탄생하기 전 인간은 스스로 혼자서 판단하거나 살아가지 못한다.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인간 발달단계에 따른 교육을 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 발달단계에 따른 교육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자아가 온전히 탄생하는 것이다.
현재 젊은이들과 늙은 사람들이 서로 소통을 하지 못하는 것은 교육의 문제이다. 이 시기 젊은이들(자아가 탄생하기 전, 15세 무렵)은 자신이 본받을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런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늙은 사람들을 불신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늙은 사람들이 문제냐고 하면은, 늙은이들 자아 역시 교육으로 인해 자아가 온전하게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통솔하기 위해서 점점 더 고함 등으로 다스리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어렵다는 것이 슈타이너의 주장이다. 예로 그리스 아테네 젊은이들은 이 시기 집을 떠나서 존경받는 사람들의 집으로 간다고 한다. 늙은이들이 모범을 보여서 20대의 젊은이들을 이끄는 것이다, 문제는 나이가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모범이 되는 것에 있다. 현재의 젊은이들과 나이가 든 사람들이 사로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사다리'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인간이 탄생해서 자아를 의식하기 전까지는 주위 전부를 그대로 모방한다. 이 시기는 인간의 무의식이 형성되는 시기이므로 무조건 무의식의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 이후 에테르체가 탄생하면 에테르체의 속성에 맞게 보살펴야 한다. 아이가 자신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시키도록 자연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 에테르체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속성이 있으므로 아이를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또 누구를 보고 따르는 것이 에테르체의 속성이므로 교사를 믿고 따르도록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아스트랄체가 탄생함으로써 비로소 영혼이 사고를 하게 된다. 사고를 통하여 주위를 다시 인식해서 자신의 생각, 자아를 만들어간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21세 자아가 탄생하기 전까지 인간은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발달에 맞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부모가 아이를 억압하거나 무시하면 아이의 자아는 온전하게 성장하지 못한다. 이렇게 부모가 욕심을 부릴 경우에도 아이는 말하지 못한다. 아이의 자아가 탄생하지 못했으므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발달을 이해해서 아이를 보살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의 소유뮬도 아니고 스스로 독립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존재이다, 아무도, 부모라 하더라도 이를 막을 권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