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95) 인유, 다른 예를 끌어다 쓰자 - ① 인물의 채용 2-2/ 시인 공광규
인유, 다른 예를 끌어다 쓰자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dhg8526/ 신경림 / 다시 남한강 상류에 와서
① 인물의 채용 2-2
헐벗은 가로수에 옹기전에 전봇줄에
잔비를 뿌리고 바람이 매달려 울고
나는 진종일 여관집 튓마루에 나와
잿빛으로 바랜 먼 산을 보고 섰다
배론땅은 여기서도 삼십 리라 한다
궂은 날 여울목에서 여자 울음 들리는
강 따라 후미진 바윗길을 돌라 한다
목 잘린 교우들의 이름 들을 적마다
사기 가마 굳은 벽에 머리 박고 울었을
황사영을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친구들의 목숨 무엇보다 값진 것
질척이는 장바닥에 탱자나무 울타리에
누룩재비 참새 떼 몰려 웃고 까불어도
불과 칼로 친구들 구하려다
몸 토막토막 찢기고 잘리고 씹힌
그 사람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번개가 아우성치고 천둥이 울부짖을 때
추자도 제주도 백령도로 쫓기며
그 아내 원통해 차마 혀 못 깨물 때
누가 그더러 반역자라 하는가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
헐벗은 가로수에 옹기전에 전봇줄에
잔비가 뿌리고 바람이 매달려 우는
다시 남한강 상류 궁벽진 강촌에 와서
그 아내를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내 친구를 생각하면 나는 무서워진다
―신경림, 「다시 南漢江 상류에 와서」 전문
단연 27행의 이 시에서 인유되는 역사적 인물은 박해받던 천주교인인 황사영입니다.
창작자는 과거의 인물인 황사영의 죽음을 알리거나 애도하기 위해 이 시를 쓴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한 인물의 사건을 인유하여 화자를 통해 창작자의 입장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황사영이 피신하던 배론과 삼십 리 떨어진 거리인 남한강 상류에 와 있으며,
황사영의 지난날 피신생활을 생각하면서 “황사영을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지거나 무서워진다고 합니다.
그것은 “추자도 제주도 백령도로 쫓”긴 황사영의 아내나 친구들처럼 화자 자신의 아내가 당할 고통과
“내 친구”들의 고난 때문입니다.
어떤 정치적 사건에 연유되어 쫓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화자는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라고 반복하여 묻습니다.
창작자의 국가 허무주의가 화자에 의해 투영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독자가 황사영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정확히 읽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가독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김병걸 선생의 회갑연에서
김규동 시인은 말했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다가
경성까지 가는 나에게 잘 가라 악수하고
그는 이원에서 내리는
그날을 보아야겠다고,
관모봉을 끼고 돌아 부령, 고무산,
두만강까지 가는 친구들이 함께
다시 보자고 차창에서 손을 흔드는
그날을 꼭 보아야겠다고.
개마고원에서는
갈대들이 달빛에 흔들리고 있겠지.
키 작은 고산목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친구들의 이름 찾으며
하늬바람에 몸 웅크리고 있겠지.
그날 우리는 함경도집에서
순대로 늦도록 소주를 마셨지만
누구인가, 우리들의 이 애타는 마음을
칼로 토막 내어 길거리에 팽개치곤
돌아서서 웃고 있는 자들이.
―신경림, 「함경선」 전문
신경림은 현존하는 인물을 시에 채용하여 시를 창작하기도 합니다.
화자와 사적 친분이 있는 ‘김병걸’과 ‘김규동’ 이라는 인물을 시에 가져온 것입니다.
문학평론가인 김병걸과 시인인 김규동은 다 같이 분단 이북인 함경도를 고향으로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인물들입니다.
창작자는 이들과의 사적 관계를 개인적 인유로 활용하여 분단 현실과 해소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시는 ‘김병걸’의 회갑연에서 ‘김규동’이 말을 하면서 내용이 전개됩니다.
등장인물인 ‘김규동’이 말을 하면서 내용이 전개됩니다. 등장인물인 ‘김규동’은 1연 6행
“그날을 보아야겠다”와 10행 “그날을 꼭 보아야겠다”는 미래 의지를 통해 분단 극복의지를 내보입니다.
2연에서는 숨어 있는 화자가 “개마고원에서는/ 갈대들이 달빛에 흔들리고 있겠지./
키 작은 고사목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친구들의 이름 찾으며/ 하늬바람에 몸 웅크리고 있겠지.”라며
분단 이북의 정경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숨어 있는 화자를 포함한 김병걸과 김규동은 ‘우리’가 되어 함경도집에서 늦도록 소주를 마십니다.
화자는 분단의 해소를 바라는 “우리들의 이 애타는 마음을” 방해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하며 답을 독자에게 말하도록 열어놓습니다.
이와 같은 개인적 인유의 방법은 독자가 인유의 원천인 김병걸과 김규동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할 경우 작품의 해독이 어렵다는 한계를 지니게 됩니다.
<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공광규, 시인동네, 2018)’에서 옮겨 적음. (2021. 2.23.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95) 인유, 다른 예를 끌어다 쓰자 - ① 인물의 채용 2-2/ 시인 공광규|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