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평화운동의 수행자적 자세(휴심정)
지난 1월 26일부터 27일 까지 경기도 고양시 벽제 동광원수도원에서 28명이 모여 '생명평화마당' 좌담회를 통해 대화를 한 이후 광주광역시 대안학교인 지혜학교 김창수 초대 교장이 쓴 소회입니다
인도의 민담에 어떤 수행자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불어나고 온갖 것들이 함께 떠내려 오는데, 한 수행자가 떠내려 오는 전갈을 발견하고는 그 전갈을 건져주려 하고 있었다. 수행자의 마음에 자비심이 일어 전갈을 건져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전갈이 물에 떠내려가면서도 자신을 구해주려는 수행자의 손을 쏘아 대었다. 전갈은 홍수에 떠내려가다 익사당하는 것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수행자의 손이 더 두렵게 느껴졌던 것이다. 수행자는 아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기어이 전갈을 손으로 잡아 물에서 건져주었다. 그때 마침 다리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이 수행자를 조롱하였다.
‘미련한 수행자여, 전갈이 당신의 손을 쏠 것인데 그대는 전갈을 건져주는가!’ 수행자는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왜 그것을 모르겠는가, 다만 전갈은 전갈의 일을 한 것이고 나는 내 일을 한 것뿐이라오.’
도움의 손길인지도 모르고 수행자의 손을 쏘는 것은 전갈의 일이고, 건져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 전갈을 구해주는 것은 수행자의 일이고 비웃는 일은 구경꾼의 일이다. 우리는 세계생명평화운동을 하고자 모였다. 인간에 의한 생태계 파괴가 지구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전쟁과 갈등으로 고통당하는 생명체들의 아우성이 온 천지에 울려 퍼지는 데 차마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살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작은 손이라도 내밀고자 한 자리에 모였다.
생명평화운동의 진행 과정에서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생길수도 있고 우리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거나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고 심하면 우리를 공격하는 이들이 생길 수도 있다.
우리는 수행자의 마음자세로 생명평화운동의 길에 나서야 한다. ‘자아’를 잘 다스리거나 해소해가도록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운동이 진행되어야 한다. 70~80년대에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시대에 우리가 믿고 따랐던 어느 시인은 자아를 해소하지 못해 초라한 노인으로 전락하였다. 그는, 자신이 영웅이나 주인공으로 추앙받지 못한 상황을 못 견뎌 해서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생명평화운동은 누구를 영웅으로 숭배하고 하는 운동이 아니고 소수자, 타자, 소외받는 자와 함께 하겠다는 운동이다. 자아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전갈처럼 우리를 쏘아대는 사람들에게 서운한 마음이나 미움이나 심하면 그들을 향한 증오심도 생길 수가 있다.
종으로서의 전갈은 생물학적으로 전갈이지만, 인간은 처음부터 전갈로 결정되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연유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기 성찰적 조건을 갖지 못했거나 그런 상황을 접하지 못해서 전갈 같은 사람이 된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우리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서운해 하지 말자. 무 소의 뿔처럼 묵묵히 가자. 그 길만이 우리가 가야할 유일한 길이니까. 구경꾼들이 소곤거리는 것에도 너무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지도 말아야 한다. 구경꾼은 이러쿵 저러쿵 관전평을 하거나 분별심을 갖지만 손수 나서서 물에 빠진 전갈을 구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도와줄 것인가를 묻지 않는다. 그들이 도와주는 일은 차라리 침묵하는 일일 것이다.
이번 행사는 벽제동광원에서 치루었다. 장소가 갖는 상징성부터가 예사롭지가 않다. 벽제 동광원은 이현필이라는 걸출한 영성가가 온갖 이지러진 생명들을 사랑하다가 마침내 민족분단의 허리 지점에서 숨을 거둔 사랑의 동산이다. 케노시스, 자기를 비워 종교를 넘어 성속을 넘어 유기체의 통일을 염원하던 한 수행자가 몸을 누인 곳이다.
이제 동광원은 예수와 이현필의 뜻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어갈 것인지를 새겨보고 각 영역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선 자리에서 어떻게 생명평화운동의 길에 나설 것인지를 생각하는 과제가 남았다.